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생사(生事)를 버리지 않은 채 열반(涅槃)에 든다.

무한진인 2020. 1. 15. 10:01


[본문]

문: "어떻게 일체법을 통달합니까?"

답 : "사물에 즉하여 견(見)을 일으키지 않음을 통달이라 한다.

사물에 즉하여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사물에 즉하여 탐착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사물에 즉하여 번뇌를 일으키지 않음을 모두 통달이라 한다. 색(色)에 즉하여 번뇌를 일으키지 않음을 모두 통달이라 한다.

색(色)에 즉하여 ​색이 없음이 색을 올바로 통달함이며, 유(有)에 즉하여 유가 없음을 유를 통달함이라 한다.

생(生)에 즉하여 생이 없음을 이름하여 생을 통달함이라 하고, 법에 즉하여 법이 없음을 이름하여 법을 통달함이라 한다. 사물을 만나 바로 통달하니 이 사람은 혜안(慧眼)이 열린 것이며, 또한 사물에 접하여 상이 다름을 보지 아니하고,

다름에 즉하여 다름(異)이 없음을 이름하여 다름을 통달함이라 한다.

[본문]

문 : "경(유마경)에서 이르길, '외도는 여러 지견(知見)을 좋아하고, 보살은 여러 지견에서 흔들림이 없다.

천마(天魔)는 생사를 좋아하고, 보살은 생사에 있되 이를 보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답 : "사견(邪見)은 정견(正見)과 같은 까닭에 흔들림이 없다. '외도는 여러 지견을 좋아한다'라 한 것은, 유(有)를 보고 무(無)를 보면 바로 유(有)라 하고 불유(不有)라 하며, 바로 무(無)라 하고 불무(不無)하고 하는 것이니 이를 흔들리지 않음(不動)이 없다고 한다.

흔들리지 않음이란 삿됨(邪)을 떠나지 않고 바로 정(正)이며, 해(解)하는 때에 즉하여 바로 삿됨이 없기에 꼭 삿됨을 떠나야만 정(正)을 얻는다고 함이 없는 것이다.

유(有)에 즉하여 유(有)가 아니니 흔들리지 않은 채로 유(有)를 본다. 무(無)에 즉하여 무(無)가 아니니 흔들리지 않은 채로 무(無)를 본다. 법에 의거하여 보는지라 삿됨(邪)와 정(正)이 모두 다르지 않다.

까닭에 '흔들리지 않음(不動)'이라 한다.

경에서 이른다. '삿된 상(邪相)으로써 정법(正法)에 든다.

'또 이른다. '여덟가지 삿됨(八邪;팔정도의 대칭으로서 팔정도에 반하는 행임) 을 버리지 아니하고 여덟가지 해탈(八解脫)에 들어간다. "

[해설]

앞 두절의 법문과 같다. 생사에 생사를 넘어서는 뜻과 자리가 있고, 삿된 지견에 정견(正見)의 뜻과 자리가 있다.

생사를 넘어서는 뜻과 자리를 바탕으로 생사가 있고, 정견을 바탕으로 하고 전제로 하여 삿된 지견도 있게 된다.

그래서 올바로 통찰하여 요지한다면 생사의 세계에 처하여 생사를 넘어서며, 삿된 지견에 처하여 정견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생사와 삿된 지견의 경계에서 흔들림이 없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한 편에 마음이 쏠리지 않는 것이다. 마음의 흔들림이란 어느 한 편에 쏠리면서 일어난다. 마음이 어느 한편으로 쏠려 향해 가는 것이 곧 수상행식(受相行識)에서의 행상(行相)이다. 이 행상(行相)이 멸하면 수(受)와 상(相)의 견문각지(見聞覺知)가 고요하고 흔들림 없는 가운데 수중월(水中月)처럼 되어진다. 생사든 생사를 떠난 자리이든, 삿된 지견이든 정견이든 모두 같은 마음 자리일 뿐 따로 다른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마음 자리는 얻을 바가 없다. 어디에도 없는 것이 곧 마음인 까닭이다. 또한 대상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 


[본문]

생사와 열반이 같은 까닭에 버리지 않는다. 생(生)에 즉하여 무생(無生)이고, 사(死)에 즉하여 무사(無死)이며, 생(生)을 버림을 가디리지(전제로 하지) 아니하고 무생(無生)에 들며, 사(死)를 버림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무사(無死)에 든다. 적멸한 까닭에 열반이다.

경에서 이른다 " 모든 중생이 본래 적멸하니 다시 적멸에 드는 것이 아니다"

또 이른다. " 모든 것이 다 열반이다." 생사를 버림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본래부터 열반이다.

마치 사람이 얼음을 버림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본래부터 물인 것과 같다. 성품이 스스로 같은 까닭이다.

생사와 열반 또한 성품이 같다. 까닭에 버림을 기다리지 않는다.

이 까닭에 보살은 생사에서 (이를) 버림이 없다. '보살이 부동(不動)에 머문다.'함은 머무르지 않음에 머무는 것을 머묾이라 한 것이다. 외도는 여러 지견을 즐겨하지만 보살은 지견에 즉하여 지견하지 않도록 하니 지견을 떠나려고 힘쓰고 나서야 지견이 없게 되는 것이 아니다. 천마(天魔)는 생사를 즐겨하고, 보살은 생사를 버리지 않는다 함은, 생(生)에 즉하여 무생(無生)임을 깨닫도록 하고자 함이다. 생을 버림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무생에 드는 것이 마치 물을 버림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습기(濕氣)를 구하려는 것과 같고, 불을 버림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열기를 취하는 것과 같다.

물이 그대로 곧 습기이고, 불이 그대로 열기이다. 이와 같이 생사가 곧 그대로 열반이다.  이 까닭에 보살은 생사를 버리지 아니하고 열반에 든다. 생사의 성품이 곧 열반인 까닭이다. 생사를 끊음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열반에 든다.

(또한 불을 끄는 것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열기의 성품에 드는 것과 같다. 이 까닭에 생사를 끊음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열반에 든다) 왜 그러한가? 생사의 성품이 곧 열반이다. 성문은 생사를 끊고 열반에 든다. 보살은 체지(體知 : 靈知: 心體 : 覺性)의 성품이 평등한 까닭에 능히 대비(大悲)로써 모든 사물들을 함께 취하고 쓴다. 생(生)과 사(死)는 뜻으로는 하나이고 이름이 다르다. 부동(不動)과 열반 또한 뜻으로는 하나이고 이름이 다르다.

[해설]

생사와 열반이 같은 성품이라 함은 아무 데도 없는 본심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생사와 열반이 있다면 그대로 본심의 바다에 뜬 수중월일 뿐이다. 수중월(水中月)이든 수중화(水中花), 수중석(水中石)이든 이름만 다를 뿐 모두 그림자이며 환(幻)과 같아 얻을 바 없는 성품인 뜻은 동일하다.

그래서 생사라 하여 이를 버림을 통해서 열반을 얻고자 함이 없고, 열반이라 하여 이를 취착함도 없다. 생멸하는 모든 차별의 사물이 모두 체지(體知), 즉 영지(靈知:眞知)인 심체(心體) 각성(覺性)에서 평등하다.

여기에서 보살의 대비광명(大悲光明)이 나온다.

각해무변(覺海無邊)하고, 일심동체(一心同體)이며, 그 빛은 대비의 광명이다.


                                                        - 담림 편집, 박건주 역주 <보리달마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