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진인 2019. 12. 11. 09:40



주 크리슈나의 제자 웃다바는 해탈 후의 헌신을 성취했는데, 그것은 브라만의 화현력이다.

곧 환(幻)은 개아를 통제하는 힘을 가졌지만, 웃다바는 환(幻)을 소유했다.그는 마야를 통제했다.

이것은 말하자면, 우리가 어떤 새로운 것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실제로 알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환을 신화라고 부르고, 그것이 거짓이라고 판정할 힘을 가지고 있다.

마야는 뭔가를 창조해 왔다. 여러분이 해탈 이후 뭔가를 창조하고 싶다면, 이 창조력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

세계는 상상된 것이므로 우리 자신의 상상력으로 그것을 수정할 수 있다.

꿈 속에서는 일어나는 상상력이 즉시 경험된다.

자신이 부라만임을 전적으로 확신하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이것을 마야를 통제하는 힘이라고 말한다.

브라만 안에 완전함을 가져오려는 어떤 일도 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이 뭔가를 얻기 위해 기울이는 어떤 노력도 무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해탈후에 남아 있는 것은 결함없는 브라만이다.

이제 존재하는 것은 경험의 영역 내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마중하러 나갈 것도 없이, 그것은 있는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기억하려고 애쓸 것도 없이 말이다.

그것은 기억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아니다. 기억은 망각과 함께 사라진다.

그것은 진실과 비진실을 넘어서 있다.

진실도 아니고, 비진실도 아니다. 있는 '그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마음과 지성은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다. 말로는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

그것의 '색깔'이나 '색갈없음', 그것은 '문자'나 '문자 없음'은 말로 서술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무엇을 말할려고 하면 그 말은 해독 불가능해집니다.

말이 도망가는데, 누가 그것을 묘사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말'의 의미는 지(知)로서만 알려진다.

여러분은 의식이 그것을 표현해 줄 것으로 기대하지만, 의식 그 자체가 사라진다.

그것의 근처에는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근처에 아무 것도 없고, 오직 말없는 비존재, 고요함만 있다는 뜻이다.

둘이 있는 곳에서는 경험이 있을 수 있다.

오직 하나가 있는 곳에서는 누가 경험을 할 수 있고, 무엇을 경험하겠는가?

경험의 어떤 요소도 없는 그는 '경험의 큼'이다.

그는 모든 것에 대한 경험을 주는 자이다. 그는 그 자신이 '큰 경험'이다.

그는 모두를 알지만, 누구도 그를 모른다.


알 수 있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다.

만물은 생겨나고 사라진다. 그는 시간에 의해 지지되지 않고, 시간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시간은 그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시간은 거기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와 함께 살아갈 능력이 없다.

시간은 끝이 있고, 사라진다.

말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의 존재함은 언제나 있다.

그는 큰 경험자이지만, 존재하는 '사물' - 이는 그것이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지만 -​ 은 그를 알수 없다.

왜냐하면 그 사물은 거짓이기 때문이다.

혀는 그 자체를 맛볼 수 없다.

꿈 속의 경험은 사라졌으나 큰 경험자는 남는다.

생시 상태의 경험과 그 경험자가 큰 경험자이다.

꿈의 경험자는 실재하지만, 그 꿈의 경험은 거짓이다.


큰 경험자는 그가 늘 존재해 온 그 상태이고, 그는 완전하다.

그는 본래 존재하나, 분리된 어떤 사람, 어떤 다른 존재인 '나'라는 느낌은 이제 사라졌다.

5대 원소와 여섯 번째 요소인 '나'라는 느낌이 모두 진아 위에 덧씌워졌있었다.

그 '다섯가지'는 거짓으로 인식되었고, 여섯 번째인 '나'는 염소처럼 도살되었다.

이제 브라만과 하나가 될 누가 남아 있겠는가?

(브라만과 자신을)동일시하는 그 자신이 거짓이다.

이것이 실제로 체험되었다.

이제 누가 공부하겠는가?

공부하던 그 사람이 죽었다.

그가 죽었다는 것이 체험되었다.

어제가 사라졌듯이, 그 체험도 마찬가지다.

에고 의식이 사라졌다.


남데브와 주 비딸라 간의 이야기가 있다.

남데브는 비딸라와 친한 사이였다.

많은 현자들과 남데브가 함께 모였을 때, 남데브는 상자라고 하기에는 그다지 완전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그는 아직 덜 성숙했다고 말했다.

"사실이지, 하지만 나는 자네를 완전하게 만들어 줄 수 없어. 진인 케짜라를 찾아가야 해."

남데브가 케짜라를 찾아가자 이 진인이 그에게 참된 '이해'를 안겨 주었고, 그래서 그는 완전해졌다.

그 뒤로 남데브는 사원의 주 비뗄라를 찾아가지 않았다.

비딸라가 남데브를 찾아와서 물었다.

"친애하는 남데브여, 요즈음은 왜 사원에 오지 않는가?" 남데브가 말했다.

"우리는 자신의 진아만을 보살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제가 저 자신에 대한 찬가를 불러야 합니까?  지금 만일 제가 당신에 대한 헌가를 부른다면, 우리 둘은 정말 둘입니까? 집과 사원이 지금 둘입니까? 이제 전세계가 하나의 사원입니다" 비탈은 이 대답을 듣자 매우 즐거웠다.

개아로서의 '나'가 별개인 한에서 모든 학문, 베다, 헌가 찬송등도 삶 속에서 어떤 자리를 접한다.

그 '나'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 남는 것은 결함없는 브라만이다.

누가 누구에게 기도하거나 헌신을 바치는가?

장신구의 형상이 사라지고 나면 금만이 남는다.


가시적 성질의 '보편적인 몸'을 가진 지고아가 브라만이다.

그를 사구나(형상이 있는) 혹은 샤끄샤뜨 빠라브라만, 사끄샤뜨 빠라마뜨만(주시하는 지고의 실재)이라고 한다.

두 번째가 없는 오직 하나가 있다면, 그 몸이(곧, 보편적 몸이) 어떻게 별개일 수 있겠는가?

'나'가 사라지면 '너'도 사라진다. '나'와 '너'가 함께 남아 있거나, 아니면 '나'도 '너'도 남아있지 않다.

'나'가 없으면 '너'도 없다. 웃다바는 이 상태를 깨달았다.


하나인 참된 브라만 위에서 어떤 것을 상상하는 것이 마야이다.

누구나 뭐든지 상상할 수 있다 ! 여러분이 몰두하는 그 상상은 현실화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무엇이 좋겠는가? 우리가 상상하게 될 것이 좋은 것이다.

이 세계 자체가 하나의 상상이므로, 여러분이 무엇을 생각하든 그것은 성공할 것이다.

이것이 웃다바가 이해한 통제력, 곧 화현력이다.

그는 마야가 거짓이라는 것을 완전히 깨달았다.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는 무욕이 되었다.

이 무욕과 함께 스승에 대한 헌신이 솟아 올랐다.

그렇다면 헌신자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왜 일어나지 않겠는가?

스승에 대한 완전한 헌신, 전적인 무욕이 우리 내면에 있을 때, 그리고 우리의 확신이 온전할 때, 깨달음은 쉽고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스승이 그 자신의 진아, 곧 빠라브라만임을 이해하는 사람은 마치 자신이 '팔이 넷인 신(비슈누)을 만난 것처럼 행복해질 것이다.


스승의 헌신자만이 이처럼 행복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달리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 없다.

돈과 흙을 같이 보는 사람은 이 힘을 얻는다.

어떤 사람은, 일체가 스승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포기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 또한 스승의 헌신자이다. 그는 스승의 힘이 도처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몸마저 스승에게 내주었다.

식사할 때, 그가 무엇을 먹든, 그가 무엇을 하든, 일체가 자기 스승을 위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 스승의 은총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만일 필요하다면 스승을 위해 일체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을 스승에 대한 헌신이라고 한다.


마야를 누가 통제할 수 있겠는가?

마야에 신경스지 않는 자만이 마야를 통제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금에 대해서도 흙과 똑같은 가치를 부여한다.

그런 사람만이 흙을 금으로 바꿀 수 있다.

'하나'를 금이라 하고  다른 하나를 '진흙'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개념이라고 하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힘이 있다. 마야를 창조하고 마야를 파괴하는 것이 '마야를 통제하는 힘'이며, 마야를 자극하고 마야를 억제하는 힘이다. 이 마야 통제력을 크리슈나가 웃다바에게 준 것이다.

스승을 숭배하는 자만이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나는지를 알고, 인식할 수 있다.

그런 사람만이 왜 어떻게 이 모든 환이 생겨나며, 어떻게 그것이 쓸려나가는 지를 안다.

이미 스승을 숭배해 왔거나 숭배할 수 있는 사람만이, 어느 것이 우리의 참된 처소, 참된 지위, 참된 시간인지를 안다. 그런 헌신자만이 자신은 시간의 시작 이전과 시간의 끝 이후에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런 사람만이 마야의 통제자인 것이다.


                                                               -싯따르메쉬와르 마하리지 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