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진인 2019. 11. 29. 09:54



이 의식이 일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인식의 과목들을 배우기 시작한다.

이 중에서 특히 두 가지는 배워지지 않는데, 생시와 잠이 그것이다.

그러나 환경에 의해 자극받는 여타의 타고난 습들과 그것을 충족하는 수단은 배워서 익히고 이해해야 한다.


"나-의식"은 자동적이고 따라서 애씀이 없는 것이기는 하나, 다른 측면에서는 우리가 일련의 알아가기 과정을 거쳐야 한다. 먹고 마시는 등 여러 가지를 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서로 다른 것들을  분간하고  언어표현과 실행을 통해 그것들을 사용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또한 자신의 몸과 그것을 돌보는 법을 서서히 배워나가야 한다.

그 행위와 특징들의 일부는 필요에 의해서나 우리의 기호에 따라 숙달되겠지만, 필수적이지 않고 흥미롭지는 않기도 해도 역시 배워야 할 다른 것들이 있다.


의식상의 배움의 과정에서는 바다같이 광대한 사물들의 세계에 더하여 더 큰 규모의 홍수가 쏫아져 들어온다.

세계의 알려진 것들과 알려지지 않은 것들 뿐 아니라, 그 너머의 것들에도 대처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저 너머의 것들을 알려고 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통제자이지 지지자인 신이라는 존재를 알아야 그의 도움으로 다른 것들을 알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단계들을 말해주는 것은 누구, 혹은 무엇인가?

 

우선 뿌라나(Puranns)가 있는데, 이것은 베다와 여타 경전들에 기초한 것이다.

(뿌라나를 통해) 우리는 선조들의 역사를 알게 되고, 경전들은 우리의 전반적 행동들을 인도한다.

베다는 우리에게 그런 활동을 '왜' 하는지 묻게 한다.

이 베다들은 신이 있다고 주장하며, 또한 무엇보다도 ​감각세계 너머에 다른 영역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신의 축복을 가장 얻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신은 누구이며, 어떻게 해야 그를 기쁘게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성자들과 친교를 맺고 그들의 지시를 정기적으로, 독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신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왜냐하면 누구에게서도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 진아 깨달음을 얻은 사람, 그의 심장이 만족, 자비, 축복으로 가득한 사람, 그리고 지고아 안에서 영원한 통일적 삶을 즐기고 있는 사람을 찾아 내어 그와 친교하는 것이 이른바 '희유한 행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이 좋아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 그는 그 성자가 곧 신이라는 거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그 성자가 우리에게 말한다.

"여러분 자신이 신이다. 그만을 생각하고, 그의 존재에 대해 명상하라. 여러분 자신이나 다른 어떤 사람을 생각하는데 빠지지 말라"

그는 우리가 명상할 때 따라야 할 규칙도 이야기해 준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여기서 부터 그 과정이 다시 시작된다.


한동안 나는 내가 '나-의식'에서 태어나는 한 인간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온갖 일을 처리하고 앎과 배움 같은 행위들을 수행하곤 했다.

그 다음은, 나 자신을 알기 위하여 나 자신을 신으로 명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무엇을 기억하거나 지각하거나 느끼든, '내가 곧 아는 자'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기억되거나 지각되거나 느껴지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그 '아는 자'의 성품을 내관한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나 자신 안에 근원이 있다.

내가 보고, 내가 안다. 나는 아무도 나를 볼 수 없는 은둔장소에 앉아 있다.

눈을 반쯤 뜬 상태이지만, 그 눈들이 감겨 있는지 반쯤 떠져 있는지 의식하지 못한다.

내가 나 자신 안에서 기억하거나 지각하거나 느끼거나 경험하는 모든 것은 나 자신 안에서 생겨난다.


나의 명상은 나의 횃불이며, 내가 보는 것은 그 빛이다.

나는 내가 보고 기억하는 모든 것이 내 명상의 빛일 뿐임을 확신한다.

그 빛이 불타오르고 있을 때 나는 애씀없이 이 체험을 얻는다.

내 명상과 주위의 감각적 세계는 하나의 단일한 역동적 삶의 기술이다.


내 주위의 감각적 세계는 내관의 형태를 한 나의 영적 깨달음이 확장된 것일 뿐이다.

이 깨달음이 없을 때는 감각적 세계도 없다. 내관이 없으면 세계과정도 없다.

이 세계 너머에 있는 것은 나에게 매우 분명하다.

나는 이제 저 빛나는 진아, 나의 참된 안내자를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이 세계 너머에는 그만이 있다 -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서, 완전한 충만함 속에서 말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명상을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명상의 성품자체가 워낙 자연발생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과정 속에서 무수한 형상과 이름과 성질을 일으킨다.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인식하거나 아니면 기록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내가 그 모든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제 나는 이 나의 명상이 산에게서 태어나며, 사물들의 세계는 내 명상의 산물일 뿐임을 의심의 여지없이 확신한다. 창조, 유지, 파괴의 순환과정은 그것의(세계의) 존재의 핵심이다.

내가 아무리 더 알려고 애를 쓴다해도, 같은 과정이 그만큼 되풀이 될 수 밖에 없다 !

나의 호기심은 끝이 난 것이다.

                                             -니사르가따마하리지의 <진아지와 진아 깨달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