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진인 2019. 9. 26. 09:36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 때, 우리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며, 오직 모든 것을 주시하는 진아만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자기순복이다. 부마(Bhooma)라는 단어는 지지(support)를 의미한다.

진아가 이 부마이며, 이것은 체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자신을 개인들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그 환(幻)이 제거되어야 한다.

밧줄은 처음부터 밧줄이었을 뿐이지만, 그 위에 뱀이라는 환상이 있었다.

지(知)가 무지(無知)릃 소멸한다.

'밧줄'이라는 지(知)가 '뱀'이라는 무지를 소멸했다.

지(知)는 아무 한 일이 없고, 단지 무지만 제거했을 뿐이다. 

여행하던 열 명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도중에 그 중 한명이 자기들이 모두 몇명인지 세어 보았는데, 자신을 세는 것을 잊어 버렸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세워보았지만, 그들도 계속 자신을 세는 것을 잊어버렸다.

마침 어떤 지혜로운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들이 잘 못 세었음을 지적해 주고 열 명임을 확인해 주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실은 자기가 진아임에도 자신을 한 개인으로 부르는 환(幻)이 있다.

지(知)는 '참된 사실'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의 환이 사라지고 나면 우파니샤드나, 자연의 원리에 대한 다섯 가지 분류(5대원소)나, 그 밖의 모든 지식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전쟁이 끝나면 갑옷, 칼, 방패 등 일체를 놓아두고 승리를 경축한다.

지(知)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목표를 성취하면 도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힌 글자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많은 책을 저술해야 한다.

스승은 여러분을 만나자 마자 '그대가 그것이다(Tat Tvam Asi)라는 한 문장이나 언구로 가르침을 주지만, 여러분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 설명을 더해 주게 된다.

브라만을 깨달은 사람에게 온갖 학문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스승의 은총으로 순수한 지(知)를 깨달은 사람은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

완전지(Vijnana), 곧 위없는 지(知)는 순수한 불가사의다.

어떤 이들은 주의의 흐름이 마치 기름을 따르는 가는 줄기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태도로 브라만을 깨닫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공부로 포착할 수 없고 지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부라만이 어떻게 무슨 태도로 발견될 수가 있겠는가?

에고 중심적인 사고가 사라진 사람만이 이것을 깨달을 수 있다.

자기 순복이 일어났을 때 그 상태를 전적인 해탈이라고 한다.

'분별'을 사용하여 얻는 환(幻)의 절멸 혹은 분별해체라고 한다.

이 해체가 일어나면, 오직 하나인 신만이 남는다.

성자들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은 그들이 주는 가르침을 통해 '단일성'을 성취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모두가 오직 하나이고, 어떤 두 번째도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세계를 브라만으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브라만이며, 세계를 세계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세계가 된다. 세계가 있다거나 없다는 것이 아니다.

무지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세계로 보이고, 명민한 사람에게는 브라만으로 보인다.

개아인 그 사람이 존재하지 않은 때는 ​한 번도 없었고, 그 개아가 존재하는 어떤 때도 없었다.

이것을 이해하는 복받은 것이다.

진정으로 교양이 있다는 것은 일체를 하나의 빠라마뜨만으로 보는 것이다.

'모두가 나 자신'이라는 깨달음이 있을 때는, 설사 애를 쓴다 해도 우리가 별개로 될 수 없다.

요컨대 세계와 하나인 자가 어떻게 그것과 분리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단순히 자신을 비슈와암바라(만물에 편재하는 신)라고 부른다고 해서 비슈와 암바라가 될 수가 있겠는가? 더욱이 그가 실제로 비슈와암바라라면, 아무도 그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는다 해도 그가 비슈오암바라이기를 그치겠는가? 만물에 편재하는 자는 늘 그러할 것이다.

누구도 그를 그의 전체성에서 분리할 수 없다.

설사 여러분이 그가 별개라고 말해도 그는 별개가 아닐 것이다.

어떤 사람이 베나레스에 갔다가 돌아온다고 하자.

그가 베나레스에 가지 않았다고 누가 말하면 그 사실이 없던 것으로 되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브라만과 일단 결합한 사람은 개아의 상태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환(幻)의 그물은 다시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림 속에 그려진 등불은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다.

브라만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는다.

그것은 환(幻)도 개아도 시바도 브라마도 아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있지만, 그것은 어떤 식으로도 한정되지 않는다.

'그대가 그것이다'라는 말에서 '그대'와 '그것'이라는 두 단어 모두 사라졌어도, '이다'라는 단어로 알려지는 어떤 것이 '있다'. 그 존재의 상태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있다'와 '없다'의 두 상태가 있다.

이것들 중 어느 것이 먼저 생겼났을까?

'없다'의 상태는 어떻게 해서 있게 되었을까?

먼저 '있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없다'가 생겨날 수가 있다.

한 사람이 있어야 그가 어떤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가 있다.

만일 아무도 없다면 다른 사람이 없다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현존하는 사람만 무슨 말을 할 수 있고, 그래서 '있다'는 말이 유효해진다.

'존재하는'사람만이 '없다'고 말할 수 있고, 그래서 그 있는사람의 존재가 하나의 사실로 입증된다.

자신이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금이 자신이 쇠라고 말해도 금으로서의 가치는 줄어들지 않는다.

그것의 가치는 고정되어 있다.

'깨달은'사람은 세상 속으로 얼마든지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진아에 대한 완전한 지(知)를 성취한 뒤에 세간의 삶을 영위하느라고 바쁜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실수없이 적절하게 행위해야 한다.

우리는 다시 깨닫기 이전의 사람이 된다.

그는 ' 자신이 이미 그것이었던 존재'가 되고 나서 다시 돌아왔다.

이제 그는 세상에서 자유자재하게 행위한다.

그곳(실재)에 갔다가 자유롭게 돌아온 사람에게는 반대할 수 없다.

깨달은 사람은 '나'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나'가 거짓이라는 것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다.

그는 그곳에 갔다가 이제는 돌어왔다.

순수한 지(知)를 성취한 뒤에는 그 사람이 다른 언어를 써야 한다는 그런 규칙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진아지를 얻고 난 뒤에도 일부러 정신 나간 어리석은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일부러 초라하게 사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에게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그들은 그들 자신의 나쁜 업으로 인해 고생한다는 것 뿐이다.

좋거나 나쁜 것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순수하다.

이상한 행동을 할 필요가 없지만 그들은 그렇게 한다. 이것은 지혜를 파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스승이 가르친 것을 되풀이 하겠지만, 그들 자신의 체험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없을 것이다.     

브라만에 대한 참된 이해를 말해주는 유일한 표지는 '나'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나'가 제거 된다.

이 순수한 지(知)를 가진 사람에게는 환(幻)이 없다.

신이 되고 나면 그는 신이다.

그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실재 위에 있던 거짓된 겉모습이 사라진다.

거짓된 겉모습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리고 실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실재는 사라지지 않고, 허망한 모습은 지속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의 성품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된다.

이제 까르마는 완성되었고, 자기 순복이 일어난 것이다.


                                                    -싯따르메쉬와르 마하리지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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