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탐구수행에 대해서 잘못된 견해와 수행자세를 지적함
'자기탐구'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이 (아뜨만인) 진아를 탐구하거나 진아에 대해 탐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하는가? 누가 진아를 탐구하며, 누가 진아에 대해 탐구하는가?
탐구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런 의문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그렇지 않은가?
자기(진아)탐구나 브라만 탐구라는 용어를 듣는 순간,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몸 안에 (진아라는) 모종의 광휘나 어떤 무형의 힘이 있으며, (탐구를 하면) 그것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고, 어떻게 있는지를 우리가 알아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념은 옳바르지 않다.
왜냐하면 진아는 그것을 알려고 하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어떤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진아는 그것을 알려는 그 사람의 성품으로서 빛나기 때문에, 자기 탐구는 어떤 2인칭이나 3인칭 대상을 탐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바가반 라마나는 처음부터 자기탐구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이름을 붙혀서 우리의 주의를 1인칭으로 직접 이끌었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이물음에서 '나'는 자기를 의미하고, '누구'는 탐구를 나타낸다.
자기를 탐구하는 것은 누구인가? 누구에게 이 탐구가 필요한가? 진아에게? 아니다. 진아는 늘 성취되고, 늘 순수하며, 늘 자유롭고, 늘 지복스러운 전체이므로, 그것은 어떤 탐구도 하지 않을 것이고, 그럴 필요도 없다!
좋다, 그렇다면 그 탐구를 필요로 하는 것은 에고일 뿐이다.
이 에고가 진아를 알 수 있는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에고는 하나의 거짓된 겉모습이어서 그 자신의 존재성이 없다. 그것은 잠 속에서는 가라앉아 형상을 잃은 하나의 사소하고 극미한 '나'의 느낌이다.
그러면 진아는 에고가 알 수 있는 하나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아니, 에고는 진아를 알 수 없다 !
따라서 진아에게는 자기탐구가 불필요하고 에고에게는 진아지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날 때, 이런 의문들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자기탐구를 하는 실제적 방법은 무엇인가? 왜 경전에는 이 '진아탐구'라는 용어가 나오는가?"
우리는 이렇게 조사하여 답을 알아낼 수 있는가? 그렇게 해보자.
스리 바가반이 '탐구'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의 의미와, 경전에서 그 말을 사용하는 방식은 차이가 있다.
경전들은 다섯 껍질, 즉 육체, 생기,마음,지성,그리고 무지의 어둠을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니다' 하고 부정하는 것을 옹호한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누구이며, 어떻게 부정하는가?
만약 마음(혹은 지성)이 그것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자신이 보는 대상인 지각력없는 육신과 생기를 부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이상으로 마음이 어떻게 그 자신, 곧 자신의 형상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부정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것의 지각 범위를 넘어서 있는 다른 두 껍질, 즉 지성과 무지의 어둠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진아로서 머무르기 위해 탐구를 할 때 마음은 '나는 이 몸이 아니다, 나는 이 생기가 아니다'라고 마음 속으로 염하는 것 외에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으로 볼 때 '탐구'는 하나가 다른 하나에 대해 탐구하는 과정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스리 바가반이 가르친 '나는 누구인가?'의 탐구는 <자기주시>(즉, 1인칭인 '나'라는 느낌에 대한 주의)를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마음의 본질은 늘 그 자신 아닌 사물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즉 2인칭과 3인칭만을 아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마음이 어떤 사물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것은 마음이 그 사물에 고착된다(집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의 자체가 집착이다. 마음이 몸과 생기에 대해 생각하게 되므로- '이건 아니다,이건 아니다'를 판정할 의도로 그러는 것이기는 하나 - 그 같은 주의는 그것들에 집착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 그것들을 부정하는 수단은 될 수 없다 ! 이것은 참된 구도자라면 누구나 수행해서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인가?
우리가 알던 모르던, 지금 우리가 모른다고 잘못 알고 있는 진아는 진실로 우리의 실체이므로, 우리(지고한 진아)의 주의의 성품 자체가 은총(진아의 힘)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주시하고, 관찰하거나 바라보는 것이 무엇이든, 그 사물은 은총의 축복을 받아 길러지고 번성할 것임을 의미한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자신을 하나의 개아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의 주의력은 진아의 '아는 힘'의 한 반영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 주의력이 미치는 혹은 고정되는 대상은 은총에 의하여 길러지고 더욱 더 번성한다.
따라서 마음의 주의력이 2인칭과 3인칭 쪽으로 더욱 더 향할 때, 그 대상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힘과 무지 - 그것들에 대한 생각의 형태를 한 다섯 감각지식 - 둘 다 더 자라날 것이고, 결코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모든 생각은 2인칭과 3인칭 대상에 대한 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따라서 우리가 마음, 곧 세계의 형상들(2인칭과 3인칭 대상들)인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그것들은 몇 배로 늘어나며 번성할 것이다. 이것은 실로 하나의 장애이다.
우리의 주의 - 은총의 시선 - 를 그 위에 두면 둘수록, 마음의 동요하는 성질과 들뜸이 증가할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나는 이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무엇을 부정하기가 불가능하다.
반면에 만약 우리의(진아의) 주의가 (내면의)우리 자신에게만 향하면 우리의 존재에 대한 앎만이 길러지고 마음에는 주의가 가지 않으므로, (외부로 향하던)마음은 우리의 은총의 뒷받침이라는 힘을 빼앗긴다.
"쇠와 짓궂은 장난은 쓰지 않고 내버려 두면 녹이 슨다"는 타밀 속담처럼,
그것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은밀하고 짖굳게 일어나는 성품을 지닌 모든 원습의 씨앗들이 조용히 있을수 밖에 없고, 그래서 그것들은 물기를 빼앗긴 씨앗처럼 말라 버리고 약해져서 생각이라는 식물로 싹이 트지 못한다.
그럴 때 진아지의 불길이 솟구쳐 나오면 이 원습들은 잘 마른 땔 나무처럼 다 불타 버린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원습의 원만한 소멸을 가져오는 방법이다. -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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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이다, 나는 아무개다'라는 느낌은 하나의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있다'는 의식은 하나의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있음'의 성품 자체다.
'나는 이것이나 저것이다'라는 혼합된 의식은 우리의 '있음'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생각이다.
이 생각이 일어난 뒤에야 혼합된 의식(1인칭), 2인칭과 3인칭들에 대한 앎인 저 다른 모든 생각들이 생겨난다.
'1인칭이 존재해야만 2인칭과 3인칭이 존재한다네 !'
<실재40송,제14연>
이 혼합된 의식, 곧 1인칭을 우리의 '일어남' 혹은 에고의 일어남이라고 한다.
이것이 원초적인 사고이다 !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기는 하나의 사고 작용이지만, 있음은 사고작용이 아니라네 !
<자기탐구 11연시, 제1연>
순수한 존재-의식인 '내가 있다'는 하나의 생각이 아니다. 이 의식은 우리의 성품이다.
'나는 사람이다'는 우리의 순수한 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이와 같이 무엇보다도 우리의 '있음'과 우리의 '일어남' 간의 (즉, 존재와 사고 간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나는 누구인가?'의 탐구에 착수하는 구도자들에게 필수적이다.
바가반 스리 라마나는 자기탐구를 '나는 누구인가?'형태로 할수도 있고, '나는 어디서 오는가?' 형태로 할 수도 있다고 조언했다. 이 두 의문문을 들은 많은 구도자들은 지금까지 그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가졌고, 그 중의 어느 것을 수행하고 어떻게 수행할지에 대해 헷깔려 하고 있다.
두 문장이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은 피상적인 이해만 지닌 채 그것이 어째서 동일한지 깊히 살펴보지 않았다.
전자의 물음인 '나는 누구인가?'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단순히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하고 소리내어 혹은 마음 속으로, 마치 그것이 하나의 진언염송인양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 이런 식으로 '나는 누구인가?'의 염송을 하는 것은 '나는 브라만이다' 등과 같은 큰 말씀에 대해 명상하거나 그것을 염송하는 것만큼이나 좋지 않으며, 그리하여 그것을 가르쳐 준 목적 자체를 망치게 된다 ! 스리 바가반 자신이 "'나는 누구인가?'는 염송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라고 되풀이해서 이야기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두번째 의문형인 '나는 어디서 오는가?'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고, 가슴 오른쪽(그들이 영적인 심장으로서 어떤 곳을 상상하는 곳)에 집중하려고 애쓰면서 '나는 여기서 나온다'와 같은 어떤 답을 기대한다 ! 이것은 몸 안의 여섯 차크라 중 하나에 대해 명상하는 고대의 방법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몸 안의 어떤 곳을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2인칭 주시(대상적 주시)에 불과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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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스크리트어로 '아뜨만'이라는 말과 '아함'이라는 말은 둘 다 '나'를 뜻한다.
'아뜨마-비짜라(자기탐구)'는 '이 나는 누구인가?'를 추구하는 하나의 주의 집중을 의미한다.
그것을 '나-주시', '자기주시' 혹은 '진아안주'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여기서 말하는 '나'라는 의식은 1인칭 느낌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나는 이것이다'나 '나는 저것이다'와 같은 부가물들과 혼합된 그 의식은 에고 혹은 개아인 반면, 부가물들이 없이 '나-나(혹은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이다')로서만 빛나는 순일 무잡한 의식은 진아, 절대자 혹은 신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1인칭 의식인 '나'가 에고일 수도 있고 진아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모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에고의 느낌(나는 몸이다)을 '나'라고 여기기 때문에 에고에 '자아'라는 이름도 붙고, 일부 경전에서는 지금도 이를 개별적 자아로 부르기도 한다. 경전들이 에고에 대한 주시인 '그것은 무엇인가?'나 '그것은 누구인가?'에도 '진아탐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오직 이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진아, 곧 존재-의식은 어떤 탐구도 필요로 하지 않고, 어떤 탐구의 대상도 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바가반 라마나가 고대이 용어인 '진아탐구'를 사용하기 보다는 그것을 '나는 누구인가?'로 이름 붙인 것은 이러한 결함을 시정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에고, 즉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1인칭 의식으로 여기는 '나'라는 느낌은 진정한 1인칭 의식이 아니며, 진아만이 진정한 1인칭의식이다. 그것의 한 그림자에 불과한 에고의 느낌은 하나의 거짓된 1인칭 의식이다.
우리가 이 에고에 대하여 그것이 무엇인지, 혹은 누구인지 탐구해 들어가면 그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라져 버리고,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탐구자는 진아로서 진아 안에 자리 잡는다.
위에서 말한 이 거짓된 1인칭 의식은 진아에서 솟아나 일어나기 때문에, 일어나는 어떤 장소와 시간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나는 어디서 오는가?'라는 물음은 '에고는 어디서 일어나는가?'를 의미할 뿐이다.
일어나는 장소는 에고에게만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어남도 저묾도 없는 진아에게는 어떤 특정한 장소나 시간이 있을 수 없다.
자세히 살펴보면 항상 알려지는 존재자인 우리만이 있는데, 시간이 어디 있고 공간이 어디 있는가?
우리가 몸이라면 시간과 공간에 말려들겠지만, 우리가 몸인가?
우리는 지금, 그때, 늘 하나이고 여기,저기,도처에서 하나이므로, 무시간 무공간의 우리만이 있다네.
- <실재사십송 제16연>
라고 스리 바가반은 말한다. 따라서 '나는 어디서 오는가?'라고 묻는 것은 '에고는 어디서 오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에 의해 조건 지워지는 에고의 일어남에 대해서만 '나는 어디서 오는가?'하는 질문이 해당될 수 있다.
스리 바가반이 '어디서?' 혹은 '어디로부터'라는 단어의미로 이해될 때는, 어떤 공간이나 시간이 답으로 나오기 보다는 자기 존재, '우리', 실재만이 그 답으로서 체험될 것이다.
따라서 에고가 일어나는 곳을 추구할 때 목표의 결과는 그 에고의 절멸이지, 몸 안의 어떤 장소에 대한 체험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어디서 오는가?'의 형태로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에고, 즉 '일어나는 나'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할 때 '나'라는 느낌을 그들의 '일어남'이 아니라, 그들의 '있음'(존재)으로 여기는 구도자들이 있다 !
만일 그렇게 여긴다면 그것은 진아에 대한 주시이다.
우리의 '일어남'과 우리의 '있음' 간의 차이를 앞에서 설명했던 것은 이러한 두 가지 탐구형태 간의 차이점을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 일 뿐이다.
-<스리 라마나의 길>에서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