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나 마하리쉬의 <자아탐구>에 대한 여러가지 가르침 말씀의 정리(3)
문 : 진아는 어떻게 깨달을 수 있습니까?
답 : 누구의 진아입니까? 그것을 발견하십시오.
문 : 저의 진아입니다. 그러나 저는 누구입니까?
답 : 그대 자신이 발견하십시오.
문 :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답 : 그 물음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모르겠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그대의 말에서 그 '나'는 누구입니까? 무엇을 모른다는 것입니까?
문 : 어떤 누구 아니면 제 안의 어떤 무엇입니다
답 : 그 '어떤 누구'가 누구입니까? 누구의 안에 있는 것입니까?
문 : 아마도 어떤 힘이겠지요.
답 : 찾아보십시오.
문 : 제가 왜 태어났습니까?
답 : 누가 태어났습니까? 답은 그대의 모든 질문과 동일합니다.
문 : 그러면 저는 누구입니까?
답 : (웃으며), 그대는 저를 시험하려 왔습니까? 그대가 누구인지 그대가 말해야 합니다.
문 : 아무리 애를 써도, 저는 그 '나'를 붙잡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것은 분명하게 식별해 낼 수도 없습니다.
답 : '나'가 분명하게 식별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그대에게는 두 개의 '나'가 있어서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해 식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문 : '나는 누구인가?'하고 탐구하는 대신에, 저 자신에게 '너는 누구냐?'하고 물으면 안되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럴 때에는 제 마음이, 스승의 형상을 한 신이라고 제가 생각하는 스승께 고정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저는 저 자신에게 '나는 누구인가?'하고 묻기보다는, 그러한 질문을 하는 것이 제가 탐구하는 목표에 더 가까이 갈 듯합니다.
답 : 그대의 탐구가 어떤 형태를 취하든 간에, 그대는 결국 하나인 나, 즉 진아에 도달해야 합니다.
'나'니 '너'니, 스승이니 제자니 하는 이런 모든 분별은 단지 그대의 무지의 표시일 뿐입니다. 지고의 나(참나)만이 존재합니다. 이와 달리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미혹시키는 것입니다.
뿌라나(힌두 신화집)에 나오는 진인 리부(Sage Ribhu)와 그의 제자 니다가의 이야기가 맥락에서 특히 교훈적입니다.
리부는 둘이 없는 단 하나의 브라만에 관한 지고의 진리를 제자에게 가르쳤지만, 니다가는 박식함과 이해력을 갖추었으면서도 지(知)의 길을 받아들이고 따르기에 충분한 확신을 갖지 못한 채, 그의 고향읍에서 의식(儀式) 위주의 종교를 신봉하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진인은 제자가 그를 존경하는 만큼 제자를 깊히 사랑했습니다. 연세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리부는 몸소 제자가 사는 읍으로 찾아가서 제자가 의식주의(儀式主義)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 살펴보곤 했습니다.
때때로 진인은 변장을 하고 갔는데, 그것은 나다가가 스승이 지켜보는 줄 모를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한번은 리부가 시골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갔더니, 니다가가 왕의 행차를 골똘히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읍내 거주자인 니다가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자, 시골사람이 그에게 저 시끌벅적한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고, 니다가는 왕이 행차하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오, 왕이군요. 왕이 행차하시는군요. 그러나 그는 어디 있지요?"
"저기 코끼리 위에 있다고요. 예, 둘 다 보이네요. 그런데 어느 것이 왕이고 어느 것이 코끼리인가요?"
"뭐라고요?" 니다가가 소리쳐습니다.
"둘 다 보인다면서 위에 있는 사람이 왕이고 아래에 있는 동물이 코끼리인 것을 모른다고요? 당신 같은 사람하고 이야기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겠군요."
"제발 저같은 무식한 사람한테 성화를 부리지 말아요."
시골 사람이 사정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위'와 '아래'를 말했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가요?
니다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 당신은 왕과 코끼리를 보잖아요. 하나는 위에 있고, 다른 하나는 아래에 있고, 그런데도 당신은 '우;'와 '아래'가 무슨 뜻인지 알고 싶다고요?"하고 니다가는 소리질렀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제가 하는 말이 당신에게 의미를 거의 전달하지 못한다면, 행동으로 당신을 가르칠 수 밖에 없군요. 몸을 앞으로 구부리면 너무나 잘 알 수 있을 겁니다."
시골 사람은 시키는 대로 몸을 구부렸습니다.
니가다는 그의 어깨 위로 올라타고 말했습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나는 왕으로 위에 있고, 당신은 코기리로 아래에 있습니다. 이제 충분합니까?"
"아니요, 아직 아닙니다" 시골 사람이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왕처럼 위에 있고, 나는 코끼리처럼 아래에 있다고 말합니다. '왕'이다, '코끼리'다, 위'다, '아래'다 하는 말을 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나'니 '당신'이니 할 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어떻게 니다가가 '나'와 별도로 '당신'을 정의해야 할 난감한 문제에 직면하자, 마음에 언뜻 스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즉시 뛰어내려 스승의 발 아래 몸을 던지며 말했습니다. "저의 존경하는 리부 스승님 말고 누가 이렇게 물리적 존재의 겉모습에서 진아의 참된 존재로 제 마음을 이끌어내 주시겠습니까? 오 ! 자비로운 스승님, 당신의 은총을 간구합니다."
따라서 그대의 목표는 지금 여기서 자기탐구를 통해 물리적 존재의 이러한 겉모습을 초월하려는 것인데, 단지 육체에 속할 뿐인 '너'와 '나'의 구별을 할 여지가 어디 있습니까? 그대가 마음을 내면으로 돌려서 생각의 근원을 탐구한다면, '너'가 어디 있고, '나'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대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진아를 찾고 진아가 되어야 합니다.
문 : 그러나 '나'가 '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는 누구인가?'하는 탐구는 결국 하나의 공허한 공식으로 귀결되지 않을까요? 아니면, 제가 스스로에게 이 물음을 끝없이 던지면서, 마치 어떤 진언(만트라)을 암송하듯이 해야 됩니까?
답 : 자기탐구는 절대로 공허한 공식이 아니며, 그것은 어떤 진언을 염송하는 그 이상의 것입니다. 만약 '나는 누구인가?'하는 탐구가 단순히 마음 속으로 하는 질문일 뿐이라면, 그것은 큰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자기탐구의 목적은 온 마음을 그 근원에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나'가 또 다른 '나'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탐구는 더더욱 공허한 공식이 아닌 것이, 이 탐구는 마음을 순수한 진아자각에 꾸준히 맞추어 가는 온 마음의 강렬한 활동(집중)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탐구야말로 조건지워지지 않은 절대적 존재로서의 진정한 그대 자신을 깨달을 수 있는, 단 하나의 확실한 수단이며 유일한 직접적인 수단입니다.
문 : 왜 자기탐구만이 진지에 이르는 직접적인 수단이라고 보아야 합니까?
답 : 자기 탐구 외의 다른 모든 수행법에서는 그 수행을 해 나가는 도구로서의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전제가 되며, 그 마음이 없이는 수행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에고는 수행의 여러 단계에서 보다 미묘한 여러 가지 형태로 계속 남게 되며, 결코 그 자체로 소멸되지 않습니다.
자나까 왕(고대 인도의 왕)이 '그 동안 내 살림을 망치던 도둑을 이제 찾아냈다. 내 이놈을 즉결처분 하리라'고 한 것은 실제로는 에고 또는 마음을 가리켜 한 말이었습니다.
문 : 그러나 그 도둑은 다른 수행법으로 거뜬히 체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답 : 자기탐구 아닌 다른 수행법으로 에고나 마음을 없애려고 하는 것은 마치 도둑이 경찰관을 가장해서 도둑, 즉 자기 자신을 체포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탐구만이 에고도 마음도 실제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드러낼 수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절대인 진아의 순수하고 무차별한 존재를 깨닫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진아를 깨닫고 나면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아는 완전한 지복이자 전체이기 때문입니다.
문 : 많은 한계들로 둘러싸인 이 삶 속에서 제가 과연 진아의 지복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답 : 그 진아의 지복은 항상 그대와 함께 하며, 만약 열심히 추구하면 그대 스스로 그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대의 불행의 원인은 그대 바깥의 삶에 있지 않고, 에고로서의 그대 안에 있습니다. 그대는 자기 자신에게 제한을 가해놓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헛된 애를 쓰고 있습니다. 모든 불행은 에고 때문이며, 에고와 함께 모든 괴로움이 찾아 옵니다. 사실은 그대의 안에 있는 불행의 원인을, 삶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두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설사 얻는다 해도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만약 그대가 에고를 부인하고 무시하여 그것을 고사(枯死)시켜 버리면, 그대는 자유로워 질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에고를 받아들이면, 그것은 그대에게 온갖 제한을 가하고 그대로 하여금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헛된 노력을 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도둑이 자나까 왕을 '망치려고'했던 일입니다.
진정으로 그대 자신인 진아가 되는 것만이, 항상 그대의 것인 그 지복을 깨닫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문 : 저는 진아만이 존재한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으니, 탐구의 길보다는 헌신과 요가의 길을 택하는 것이 수행의 목적을 위해 더 적합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절대적 존재, 즉 범지(지고의 실재인 브라만에 대한 참된 지)를 깨닫는 것은 저 같은 속인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답 : 범지(梵知)는 얻을 수 있는 지식, 즉 그것을 얻음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지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미리 포기한다는 것은 무지의 소치입니다. 그대가 알고자 하는 진아는 진정 그대 자신입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무지로 인해 그대가 까닭없이 슬퍼하는 것은, 마치 바보 열 사람이 한 사람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면서 슬퍼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우화에서 바보 열 사람이 작은 강을 건너갔습니다. 그들은 건너편에 도착하자 전원이 무사히 건너왔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인원을 세었는데 다른 사람들만 세고 자기는 세지 않았습니다. "아홉 사람 뿐이야, 분명히 한 사람이 없어졌어. 그게 누구지?" 그가 말하자, 다른 사람이 "정확히 세었나?"하고는 이번에는 자기가 세어 보았으나 역시 아홉사람 뿐이었습니다. 결국 열 사람이 다 세어 보았지만, 자기를 빼고 세었기 때문에 누가 세어도 아홉사람 뿐입니다. "우리는 아홉사람뿐이야, 그런데 없어진 사람이 누구지?" 그들은 서로 물어 보았지만, 없어진 사람이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마음 여린 사람이, " 물에 떠내려간 것이 누구든, 우리는 그를 잃어버렸어"하면서 울음을 터드리자,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울었습니다.
지나가는 행인이 이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바보들이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며 자기들이 몇변을 세어도 아홉사람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자기 눈으로 그들이 열 사람임을 확인한 행인은 상황을 이해했습니다. 그는 그들이 모두 강을 건너왔으며, 열 사람이 맞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이제 내가 한 사람을 한 번씩 때릴 테니까 그때마다 한 사람씩 순서대로 하나, 둘, 셋, 이렇게 소리내서 세도록 하시오. 그러면 잃어버린 한 사람을 찾을 수 있을거요." 이 말을 듣자 바보들은 '잃어버린' 동료한 사람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모두 기뻐하면서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행인이 바보 열 사람을 차례로 한 사람씩 때리는 동안 맞는 사람은 큰 소리로 숫자를 세었고, 마침내 마지막 사람이 "열"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바보들은 놀라서 서로 쳐다보며 이구동성으로 '열 사람이 맞구나"하면서 기뻐하고, 그들의 슬픔을 가시게 해 준 행인에게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이 우화의 내용입니다. 열 번째 사람을 어디서 데려왔습니까? 그를 정말 잃어버렸던가요?
열 번째 사람이 실제로는 거기 계속 있었다는 사실을 앎으로서 그들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슬퍼하게 된 원인은 진짜로 한 사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나라 그들의 무지 때문이었으며, 더 정확하게는 그들이 아홉사람 밖에 세지 못했기 때문에 한 사람을 잃어버렸다고 - (비록 그것이 누구인지 그들이 알아내지 못햇지만) - 단지 상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실로 그대가 비참해 하거나 불행을 느껴야 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무한한 존재라는 그대의 참된 성품에 스스로 한계를 설정한 다음, 그대가 하나의 유한한 중생이라고 생각하여 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는 그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이런 저런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고 전제하고 수행한다면, 그 수행이 그대로 하여금 그 한계를 벗어나게 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대가 실로 무한한 순수 존재, 즉 절대적 진아임을 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항상 진아이며, 오직 진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진아에 대해 정말로 무지한 것은 아닙니다. 그대의 무지는 저 바보 열 사람의 '잃어버린' 한 사람에 대한 무지와 같은 상상적인 무지일 뿐입니다. 그들을 슬프게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무지입니다.
참된 지(知)란 그대를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대의 '무지한 무지'를 제거해 줄 뿐이라는 사실을 아십시오. 또한 그대의 성품에 지복이 더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그대의 진정한 본래의 상태로서 저절로 드러날 뿐입니다. 그대가 슬픔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진아를 알고 진아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대에게 이것이 불가능하겠습니까?
-마하르쉬의 복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