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뭣고' 참선수행법 법문 발췌
ㅇ. 구산선사(九山禪師) '이뭣꼬' 참선 법문
이 몸을 지배하고 있는 주인공을 "마음이다", "넋이다", '얼이다", "본래면목이다", "자성(自性)이다"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는 모두 내게 있는 한 물건에 대한 이름이다.
그 이름을 떼어놓고, 그 자체가 어떻게 생겼는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뭣꼬?' '시심마(是甚麽)' 하고 끊임없이 참구하라.
이때에 망상이나 혼침이 들어오거든 '이 뭣꼬'라는 화두를 들게 되면 구름 걷힌 하늘처럼 자연히 사라지고 상쾌해진다.
이것은 물질이 아니라 잡을 수 없으니 허공이겠는가?
허공이 선악 시비를 판단 할 수 있는가?
그러면 소소영영하게 아는 그 한 물건이 무엇인고?
다시 말하면 이 몸을 운전하는 주인공은 무엇인고?
대명사를 떼고 나니, 마음도 아니요,
깨치지 않았으니 부처도 아니요.
주고 받지 못하니 물건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고?
그래서 '이 뭣꼬'라는 화두인 공안이 성립된다.
이 참선은 "대의지하(大疑之下) 필유대오(必有大悟)"라,
'큰 의심에 큰 깨달음이 있나니 의심없는 것이 큰 병이 된다.'
명재일식지간(命在一息之間)이라,
사람의 목숨이 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에 있으니 어찌 무상치 않은가?
어느 곳을 '나'라 하며 맡길 곳이 어디인고?
곰곰히 생각하고 진정한 안심처를 찾으려면 선(禪)의 길을 결택하라.
화두(話頭)는 팔만사천 번뇌망상을 제거하는 청룡보검(靑龍寶劍)이며 명약(名藥)이니,
마음도 부처도 허공도 아닌 한 물건,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꼬?'를 참구하라.
이와 같이 참구할 때에 머리에 불은 불을 끄듯이,
고양이가 쥐를 찾듯이,
어린애가 어머니 젖을 생각하듯이,
닭이 알을 품듯이, 간절하게 지어가면
한 번 앉으면 하루가 순간이고, 하룻밤 역시 찰나이다.
그때는 몸이 허공에 뜬 것 같고,
지구(地球)도 있는지 없는지 모를 지경이고,
몸은 허공을 날 것처럼 가벼워진다.
그런 때는 화두를 생각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화두가 성성(惺惺)하게 들리는 속에
견성성불(見性成佛)은 다가오는 것이다.
ㅇ. 송담선사의 '이뭣꼬'참선 수행법 법문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꼬?'
이것이 무엇인고? 표준말로 정확히 쓰면 "이것이 무엇인고?" 일곱 자인데 경상도 사투리로는 '이 뭣고'라고 한다.
참선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슬플 때는 슬픔에 빠져 가지고, 점점 슬픈 생각이 더 일어나도록 이 생각 저 생각 점점 묵은 생각 가지고 더 슬픔에 빠진다.
어떤 근심 걱정이 있으면 그 근심 걱정을 없애려고 하지 않고 더 치성하게 일어나도록 근심이 될 만한 사건을 더욱 더 연상을 해서 근심이 빠진다.
성이 날 때는 빨리 그 생각을 돌이켜서 성나는 생각이 가라 앉도록 해야 자기에게 유익할 텐데, 점점 성이 더 일어나도록 이 생각, 저 생각을 되살려가지고 더 깊이 그 성내는 생각에 빠져 들어가서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괴롭혀 들어간다.
이래 가지고 중생은 불이 붙은 곳에 스스로 기름을 부어 더 불을 치성하게 만들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참선(參禪)하는 사람은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지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 뭣꼬?',
기분 나쁜 생각이 일어나고 괴로운 생각이 나도 그 괴로운 생각이 다음 두 번째 생각으로 번져 나가기 이전에
바로 '이뭣고'로 돌아와 버리는 것이다.
도인이라고 해서 생각이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되, 그 일어나는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바로 '참나'로 돌아오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으로 인해서 점점 괴로움이 빠져들어 나중에는 그 한 생각이 원인이 돼서 건강을 상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한테 그 좋지 않은 생각을 터트려 다른 사람 마음까지 괴롭혀서 (잘 되는)일까지 그르치게 만든다.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니 생사윤회에 안 떨어지고 배기겠는가?
참선은 일어나는 한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이 뮛고?'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니 백번 (망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문제가 없다.
일어나는 그 생각이 좋은 생각, 나쁜 생각, 슬픈 생각, 괴로운 생각, 성내는 생각, 과거 생각, 현재 생각 등 어느 것이나 상관없다. 무슨 생각이든 일어나자마자 바로 '이 뭣고?'를 생각하며 호흡을 길게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이 뭣고?'를 생각한다.
'이 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 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들여 "아하! 이런 것이구나 !"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도 안 된다.
공안(公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만 문헌에 오른, 과거의 고인들이 사용한 화두가 1,700인데 이 '이 뭣고?' 화두 하나 만을 열심히 해나가면 이 한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1,700공안이 일시에 타파되는 것이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보고 안 되면 또 저 화두 조금 해보고 하면 공안을 타파할 수 없다.
오로지 한 화두에만 집착하여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화두 자체가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만 철저히 해나가면 일체 공안(公案)을 타파하는 것이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가지고 어떻게 생사(生死)를 면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여러분들은 차라리 참선을 하지 않고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염불을 할지언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야 한다. 그래야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숨을 깊히 들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고 내쉴 때, '이 뭣고?' 아까 그 ' 이 뭣고?'한 그 의심의 그 여운이 올 때까지 조용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공부가 더욱 익숙해지면 아침에 눈 딱 떳을 때, '이 뭣고?' 한 번 해 놓으면 하루 종일 그 '이 뭣고?' 한번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될 때가 올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안 깨치려야 안 깨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일상생활이 바로 알 수 없는 화두 하나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 화두를 들고서 밥도 먹고, 눕고 자고, 차도 타고, 걷기도 하고, 사랑하고 대화도 하고,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뭣고?'하는 사람이 무슨 사람을 죽이며, '이 뭣고?'하는 사람이 무슨 거짓말을 하겠냐, 그 말이다.
또한 과거에 지은 죄(罪)가 산과 같이 높고 바다 같이 넓고 깊더라도 '이 뭣고?' 앞에서는 봄눈처럼 녹아버려 죄의 구렁텅이 속에서 죄(罪)에 물들지 않는 것이 '이 뭣고?'이다.
중생은 나름대로 착한 일 한다고 하는 것이 업(業)을 짓는 것이다.
그런데 '이 뭣고'한 사람은 죄 속에서 죄에 물들지 아니하니그런 최상승법(最上乘法)이 '이 뭣고?'이다.
'이 뭣고?'만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팔만사천마구니(魔軍)가 엿보지를 못하게 되는 것이다.
팔만사천 마구니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팔만사천 번뇌망상(煩惱妄想)인데 화두가 독로(獨露)한 사람한테는 와서 들러붙지 못한다.
잠깐잠깐 필요 있는 생각이 떠오르면 그 필요한 일을 '이 뭣고?'로 처리하되, 나의 이 화두 일념(一念)은 근본적으로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나를 깨닫는 길이요, 우주법계의 주인공(主人公)이 되어서 우주법계를 내가 요리해나가고 내가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운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운전을 하는 것이다.
이 법이 바로 불법(佛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팔만대장경에 그렇게 많은 법문이 있지만 그 말씀을 하나로 뭉치면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이 법(法) 밖에는
없는 것이며, " 100일 동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600만번 부르는 것보다 정성껏 '이 뭣고?' 한 번 하는 공덕(功德)이 더 수숭하며, 팔만사천대장경이 '이 뭣고?'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이다.
또한 ' 이 뭣고' 수행하던 불자가 금생에 깨치지 못하고 염라대왕 앞에 가면 "염라대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예배하며 맞이한다" 왜냐하면 '이 뭣고' 참선 수행한 불자는 이미 심전(心田)에 성불(成佛)의 나무를 심어놓았기 때문에 다음 생에는 반드시 부처를 이루는 것이 보장(保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청운스님 저 <이뭣고 수행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