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나오는 근원을 탐구하시오
질문1 : 제가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면, 그 답은 '나는 이 죽어 없어질 육신이 아니라 의식, 진아 혹은 지고아이다'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다른 질문이 일어납니다. '진아가 왜 마야 속으로 들어 왔나?'. 즉 바꾸어 말해서 '신은 이 세계를 왜 창조했나?'는 것입니다.
마하리쉬 :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그 에고, 곧 '나'라는 생각의 근원을 찾아내려고 애쓴다는 것을 뜻합니다. '나는 이 육신이 아니다'같은 다른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나'의 근원을 추구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제거하는 수단이 됩니다. 그대가 말하는 그런 생각들이 일어날 여지를 주지 말고 그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나는지 물어서, 만일 그 답이 '내가 그 생각을 한다'이면 더 나아가 이 '나'는 누구이며, 그 근원은 어디냐고 물으면서 주의를 그'나'라는 생각의 근원을 찾아내는 데 고정해야 합니다.
질문2 : 진아는 깨달음의 한 주체입니까?
마하리쉬 : 진아는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것이 바로 항상 깨달음입니다. 아는 진아와 알아지는 진아의 두 진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그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어떤 것을 의식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의식 그 자체입니다.
질문3 : 저는 '브라만은 실재하고 세계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 세계는 실제적 존재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진인은 세계를 보지 않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어떤 다른 형상으로 봅니까?
마하리쉬 : 세계의 실재성이나 허위성에 대해서는 세계더러 신경쓰라 하십시오. 먼저 그대 자신의 실재성을 찾아 보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진인이 세계를 어떻게 보든 그대가 왜 걱정을 합니까? 그대 자신을 깨달으면 그대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진인은 이름과 형상들의 세계가 진아를 한계지우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진아는 그런 것들을 넘어서 있다는 것을 봅니다.
질문4 : 저는 숭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에게 숭배하는 길을 일러 주십시오.
마하리쉬 : '숭배하는 자'와 '숭배받는 자가'가 있습니까? 그 '나', 그 숭배자를 찾아내십시오, 그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항상 그 '보는 자'를 추적해야 합니다.
질문 5 : 마음의 일념집중을 성취하는 가장 쉬운 길은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 최선의 길은 마음의 근원을 보는 것입니다. 마음 같은 것이 과연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그것을 일념이 되게 한다는 그런 문제는 마음이 있을 때만 일어나겠지요. 내면으로 돌아서서 탐구하면 마음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 바가반의 아쉬람 상주제자인 데상이씨가 바가반의 <가르침의 핵심>의 일부를 인용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지속적으로 혹은 끊임없이 마음의 성품을 탐구하면, 마음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모두에게 직접적인 길이다."
질문 6: '나는 누구인가?'하는 물음을 자기 자신에게 던진 뒤에는 침묵하고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나는 이 몸이 아니고, 감각기관이 아니고,- -'하는 식으로 답변을 계속 제시해야 하는지, 또 아니면 '나는 누구인가?'하고 계속 반복해야 하는지요?
마하리쉬 : 왜 '나는 누구인가?'하고 진언처럼 계속 반복해야 합니까? 만일 다른 생각들이 일어나면 '이 생각들은 누구에게 일어나는가?', '이 생각들이 찾아오는 나는 어디서 일어나는가?'하고 물어서 다른 생각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진언염송에서도 그 진언을 계속 염하지 못하면, 즉 다른 생각들이 마음을 점령해 오면 스스로에게 '진언을 놓쳤구나' 하고 상기시키면서 다시 염하기 시작합니다. 모든 길들의 목적은 신 또는 진아에 대한 생각을 제외한 다른 모든 생각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질문 7 : "잠 없는 잠 속에 있다" 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마하리쉬 : 그것이 바로 깨달은 성인의 상태입니다. 잠 속에서 우리의 에고는 가라앉고 감각기관들은 활동하지 않습니다. 진인의 에고는 죽임을 당했으므로 그는 자기 스스로 곧 자신이 행위자라는 관념을 가지고 어떤 감각활동에 빠지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잠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잠 속에서처럼 의식이 없는 것이 아니고 진아 속에서 완전히 깨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상태는 잠이 없는 것입니다. 이 잠 없는 잠, 깨어 있는 잠 - 혹은 그것을 뭐라고 부르든 - 이 진아라는 네 번째 상태입니다. 화막(畵幕,스크린)인 그것 위에서 생시, 꿈, 잠의 세 가지 상태 모두가 지나가지만, 그 화막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을 붙들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현재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를 걱정합니다. 우리는 '처음'이나 '끝'을 모릅니다. 그러나 중간을 압니다. 만약 우리가 이 중간(현재)의 진리를 발견하면, 시작과 끝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바가바트 기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 나는 모든 존재들의 심장 안에 있는 자이며, 그들의 처음이자 중간이며 끝이다'
실재는 침묵일 뿐입니다.
따유마나바르에 다음과 같은 시구가 있습니다.
그토록 판이하게 달라 보이는 모든 종교를 정밀히 살펴본다면
그것들 간에 다른 점은 전혀 없고, 당신(主)의 유희일 뿐임을 알게 됩니다.
그것들은 마치 강들이 바다에서 하나가 되듯이,
모두 고요함(靜寂) 내지는 침묵 속에서 끝이 납니다.
질문 8 : 에고를 죽이는 최선의 방법 좀 알려 주십시오.
마하리쉬 : 마음에게 마음을 죽이라는 것은 도둑을 경찰관으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그대와 동행하여 도둑을 잡는 척 하겠지만, 아무 소득이 없겠지요. 따라서 그대는 내면으로 돌아서서 마음이 어디서 일어나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사라질 것입니다.
질문 9 : 마음을 내면으로 돌려서 그 근원을 찾는 것도 마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요?
마하리쉬 : 물론 우리는 마음을 사용합니다. 마음의 도움을 받아서만 마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고 인정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이 있는데 내가 이것을 죽이고 싶다고 말하기보다는, 그것의 근원을 찾아들어가십시오. 그러면 마음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마음이 바깥으로 향하면 생각과 대상들을 낳습니다. 안으로 향하면 그것은 그 자세로 진아가 됩니다. 그런 마음을 때로는 '형상없는 마음(無相心)' 혹은 '순수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바가반과 함께 한 나날(탐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