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만은 늘 현재 속에 실재로써 있다
"나는 나에게 완전히 귀의하는 사람들의 모든 욕망을 충족시킨다. 인간의 네 가지 목표는 그것을 이루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만, 그래도 성취되지 않는다. 해탈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다. 해탈이란 '나는 모든 카르마를 넘어섰다. 나는 아무 것도 필요없다. 나는 나 자신 안에 완전한 평안을 가지고 있다.' 고 말할 때의 확신이다.
그러나 나의 헌신자들, 자신이 브라만임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네 가지 목표 전부를 얻으며, 무수한 신들이 그들에게 와서 복종한다. 무수한 신들은 어느 면에서 인간들의 최고의 덕과 좋은 성질들이며, 이것들 안에는 영적인 능력들이 스며있다. 그것들은 그 자체가 신들의 화신이다. 이것은 나에게 순복하는 사람만이 성취한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순복한다. 어떤 사람들은 세간적 삶의 노예이고,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온다. 나는 나에게 그들 자신을 내 맡기는 사람들에게 욕망, 해탈, 돈 등 사실상 일체의 충족을 의미한다. 나의 헌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쾌락과 감각대상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고,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나의 헌신자들은 설사 세간의 것들을 즐긴다 할지라도 내가 그들에게 해탈을 안겨준다. 나는 나의 헌신자가 무엇을 소망하든 그것을 들려주고, 또한 그를 속박에서 벗어나게 한다. 친애하는 웃다바여, 그대의 삶의 네 가지 목표는 모두 별개가 아니다. 그대에게는 내가 그 모두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크리슈나는 크리슈나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잊어버렸고, 웃다바는 자신이 웃다바라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것은 사뭇 다른 종류의 포옹이었다. 둘 다 짜이따니야, 곧 생명기운 그 자체가 되었어도, 가르치고 배운다는 그들 마음 속의 목적이 사라졌다. 신과 헌신자가 하나가 되었다. 스승과 제자라는 이원성의 느낌이 사라졌고, 의무와 행위에 대한 모든 느낌이 상실되었다. 분리와 비분리의 느낌 둘 다 사라졌다. 확신을 얻자 이해가 사라졌다.
'나는 브라만, 곧 빠라마뜨만이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환(幻)이다. 언제 여러분이 빠라마뜨만이 아니었던 때가 있었는가? 그런데 왜 "이제 나는 그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고 말하는가? 여러분이 성취하는 것은 새로운 상태가 아니다.
사실 여러분은 이미 브라만이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당신의 가르침에 의해 환이 사라졌습니다만, 어떻게 하면 브라만의 상태에 머무릅니까?" 여러분은 그 상태 안에 머무르거나 계속 있기 위해 취해야 할 어떤 조치들을 영리하게 생각해 낼 수 없다. 여러분은 본연적으로 그것이다. 여러분은 거기에 부단히 머무는 것과 아무 관계가 없다. 무엇이 되고 안되고가 없다. 그것은 여러분이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다. 됨도 없고 안됨도 없다. 되어야 할 무엇이 있는가?
어떻게 무엇이 되려고 하는가? 진리가 되는 일은 없다. 만일 된다면 그것은 참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브라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이미 그렇게 있는 것이다. 진아의 상태가 이미 우리에게 있었는데, 어떤 미혹이 우리에게 영향을 준 것이다. '일어난 '일은 환이었을 뿐이다. 직접적인 브라만 깨달음을 갖는다는 어떤 관념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그것은 미혹된 마음의 망상일 뿐이다. 그것은 환이 벌인 구경거리요, 축제다. 모든 이른바 '브라만 깨달음'은 환이다. 브라만은 생겨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늘 있는 그대로, 그 원초적인 존재로 있다. 그것은 별개로 경험되는 것이 불가능한 '그것'이며, 여러분은 그것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늘 현재 속에 실재로써 있다.
다른 모든 노력을 그만두고, 어떤 것에 대한 어떤 욕망도 없이 나에게 순복하는 사람은 이른바 '전적인 순복'을 가지고 있다. 믿음이 나뉘지 않은 사람은 소위 '나뉨없는 헌신'을 가지고 있다. 그런 사람은 충실한 헌신자이다. 나는 그에게 나와의 합일을 안겨준다. 그의 네 가지 목표 전부를 이루어준다. 그 '해탈'은 상대적인 자유가 아니라 완전한 자유이다. 그런 사람은 설사 사회구조 속에서 자신에게 정해진 임무들을 수행한다 해도, 한 사람의 무행위자가 된다. 나는 이런 식으로 그를 무욕으로 만든다. 나는 그에게 내면으로부터 그러한 이해를 안겨 주며, 나의 여섯 가지 부(富)를 준다. 네 가지 해탈 모두가 그의 발 아래 있다. 자신이 진아 임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뜰에 자유의 나무를 심은 것이다. 그런 나무를 심은 사람은 복이 있다.
주 크리슈나는 그의 헌신자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고, 그들에게 진아성의 상태를 안겨준다. 주 크리슈나는 말한다.
"모든 노력을 그만두고 그 자신을 나에게 내맡기는 사람에게는 그가 열망하는 모든 것이 주어지며, 나는 그를 해방시킨다." 어떤 사람이 스승의 발 아래 귀의하는 날, 그것이 그의 타락을 멈추는 날이다.
나는 내 헌신자의 고통을 조금도 용납하지 못한다. 따라서 나는 나 자신을 그에게 완전히 넘겨준다. 나는 내 헌신자의 보호자이다. 그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나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나의 헌신자가 지복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어떤 사람을 바라 본다고 하면, 나는 그 사람도 해방시켜준다. 나 자신의 헌신자가 어떻게 무슨 전락을 겪을 수 있겠는가? "내 헌신자가 고통을 받았다"는 말조차도 나는 용납할 수 없다. 나는 그의 보호자이므로, 그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보살핀다.
그는 결코 나 자신의 상태에서 나를 보지 못하는 일이 없다. 나의 헌신자가 어떤 상태에 있든, 나는 그를 해방시켜준다. 물질적 세계 속의 몸, 말, 마음의 쾌락의 대상들을 버려두고 나에게 헌신하는 사람들을, 나는 잘 보살펴 준다.
몸,말, 마음을 버려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좋거나 즐거운 아무 일도 그 마음에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그 헌신자는 단 한 가지 욕망만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설령 일어나는 일 모두가 그가 좋아하는 것과 반대라 하더라도, 전능자에 대한 그의 믿음은 동요되지 않는다. 나는 이와 같이 자신의 몸, 말, 마음을 나에게 내맡겨 버린 사람만을 생각한다. '나뉨없는 헌신'의 위대함이 그와 같다.
-싯따르메쉬와르 마하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