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을 통해서는 쉽게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마음상태가 있다.
하나는 무욕이고, 다른 하나는 감각대상들에 대한 집착이다.
집착은 영적인 삶보다 감각대상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거나 그것을 더 좋아하는 것이다.
영적인 삶에 더 큰 가치를 두는 사람은 감각대상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예 그런 욕망이 없다.
관능적 쾌락에 탐닉할 것인지, 아니면 영적인 길을 따를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영적인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어떤 노력이든지 해서 그것과 하나가 된다.
여러분의 삶은 두 가지 방향, 즉 무욕의 방향과 감각대상에 대한 집착의 방향 중 어느 한쪽으로 갈 수 있다.
감각대상들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는 자연히 무욕이 증가한다.
욕망이 증가할 때는 육신과 감각대상에 대한 자부심이 더 중요해진다. 이렇게 되면 사람이 더 미혹된다.
가끔 어떤 사람은 "누가 한 생에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까?"하는 주장을 내놓아 진아 깨달음의 길에 장애를 만들어 내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것을 가르친다. 그의 무욕은 사라지고 그는 타락하게 된다.
그는 올라가던 길에서 등을 돌려 내려 가는 길로 향한다. 그러나 감각즐김을 완전히 혐오하는 사람은 이미 스승에게 완전히 내맡겨져 있다. 그는 충실한 신자로 머무른다. 그는 보석같은 사람이며, 영적인 지(知)와 권위를 받을 만한 그릇이 된다. 그 무욕인은 자신의 목표와 완전히 하나가 된다. 어제는 내가 많은 자격상실요건을 예를 들어 말했다.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훌륭한) 그릇이 되는 제자이다.
마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자신과 비슷한 것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사람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과 우의를 맺는 것이다. 배우는 배우들을 좋아하고, 악당은 다른 악당을 좋아한다. 성자는 다른 성자들을 좋아하고, 그래서 그런 이들과 친하게 지낸다.
많이 알고 영적으로 깨달은 사람들이 유일하게 진정한 브라민, 곧 브라만을 아는 자들이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스승에게 내맡긴 사람은 모든 존재가 본질적으로 브라만임을 알고, 그들을 평등하게 본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헌신과 감각대상들에 대해 아무 욕망이 없는 상태가 결합된다.
헌신은 사랑을 뜻한다. 무욕은 그가 아무 것도 원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마음이 곧은 사람은 일체를 단순하고 곧게 보며,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일체를 비뚤어지게 본다.
스승은 제자를 사랑하겠지만, 그 제자가 오롯한 마음으로 충실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브라만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자애로운 성품을 지녔고 헌신적인 사람만이 깨달음을 성취한다. 스승에 대한 봉사보다 돈, 아내, 자식에게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은 자유를 빨리 발견하지 못한다. 자신의 가정과 아내가 찰나적이고 거짓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상 해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스승, 곧 크리슈나가 그가 얻는 결실이다. 스승의 하인으로 불리는 것을 명예로 생각하는 사람, (스승을 위해) 온갖 잡역을 하는 사람은 참으로 위대하다. 창조주(브라마)와 같은 신들에게는 자신의 스승에게 하는 만큼의 존경을 베풀지 않는 사람이 참으로 위대한 제자이다. 그런 제자는 실은 성자이기도 하다.
브라만에 대한 깨달음은 그것을 얻고자 열렬히 소망하여,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모든 걱정을 놓아 버리고 여론을 두려워 하지 않는 헌신자만이 얻을 수 있다. 베다가 내버리는 사람들, 베다에서 제시하는 헌신을 원칙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그릇이 되는 제자들이 아니다. 정말 낮은 카스트의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탄생과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열망하여 스승의 발 아래서 배우는 사람들은 브라만에 대한 깨달음을 성취한다.
브라만에 대한 깨달음을 얻으려는 강한 욕망은 그 자체로 무욕의 다른 이름이다. 그런 강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은 무욕의 본질에 도달한다. 사람은 어떤 카스트에도 속할 수 있고, 심지어 낮은 카스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스승이 주는 가르침을 유일한 길로 믿고 충실히 따르며 그에 따라 공부한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영적인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
돈을 버는데 관심이 있고 상류층만 가르치는 사람들을 스승으로 여기면 안된다. 그들은 그런 깨달음을 전혀 갖지 못하고, 그들이 주는 가르침은 결실이 전혀 없다. 그러나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라 해도 오직 그들을 해방시키려는 욕망으로 가르치려는 이들이 있다면, 그런 이들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여자들은 보통 금욕적 생활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영적인 가르침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여지들에게 그토록 높은 가르침을 주었던 위대한 성자들을 보라. 진인 카필라는 이 지(知)를 자신의 어머니 데바후띠에게 주었다. 나라다는 이 가르침을 쁘랄라드의 어머니에게 주었고, 주 크리슈나는 이 가르침을 브린다반 근처에서 희생제의식을 행하던 브라민의 부인들에게 주었다. 도처에서 브라만을 보는 그런 마음 상태를 가졌고, 아녀자들을 포함한 모두를 평등하게 여기는, 그리고 빠라마트만이 모든 존재들에 똑같이 편재하고 있음을 보는 큰 스승들만이 여자들에게 이 가르침을 줄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세간적인 감각대상들에 대한 욕망이 없고, 믿음이 증장되어 영적인 깨달음을 얻는데 큰 관심이 있고, 신에 대한 헌신을 열망하는 그런 여자들에게는 줄 수 있다. 이 깨달음에 대한 욕망이 중요할 수 밖에 없다.
사람은 어느 카스트에도 속할 수 있고,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다. 이 가르침은 영적인 깨달음에 대한 진정한 갈증이 있는 곳에 주어야 한다. 만일 가르치는 사람이 없다면 그 가르침을 받고 싶은 사람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그릇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가르침을 주면 안된다.
의심은 하나의 결함이다. 결함은 여러분에게 있고, 결함이 없음도 여러분에게 있는 것이다.
'대상적 사물'이 없는 곳에서만 일체가 결함이 없다. 물질이 없으니 형태가 없고, 형태나 형상이 없으니 좋거나 나쁜 성질도 없고, 성질이 없기 때문에 어떤 결함이 있을 여지도 없다. 실재에는 어떤 결함이나 오점도 없다. 그것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심과 아무 관계가 없다. 조언을 주는 것이 적절한지 혹은 올바른지에 대한 스승의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조언을 주면 안된다.
깨달은 진인이 남들을 가르쳐야 하느냐 여부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진아와 실재에 대해 완전히 맹목저이지 않는다면 그런 질문은 하지 않을 것이다. 죄인과 무지한 이들의 문제들은 결코 해결되지 않으며, 앞으로도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릇이 안되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준 지(知)를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 이해가 있으면 이 지(知)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고, 지(知) 자체가 사라진다. 세간적 삶이 완전히 놓아진다면, 무엇이 적절하지 않은지에 대해 왜 신경을 써야 하나? 해탈한 자에게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없다. 비난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없다.
웃다바가 질문 했다. "의무,재물,욕망,해탈의 네 가지 목표를 이루는 다양한 길이 있는데, 왜 한 가지 길만 조언하십니까? " 그 말을 듣자 주 크리슈나가 말했다. " 새가 날아가는 길은 어디를 나느냐에 달려 있다.(註; 새는 나무나 숲을 떠나 공중을 날 때 가장 빠른 길로 날아간다는 뜻) 그와 마찬가지로 깨달음은 생사의 연쇄고리를 끊는 가장 빠른 길이다." 개아를 정복하는 네 가지 전통적인 접근 방법이 있다.
이성에 호소하는 것, 모종의 희생을 하는 것, 신체적 벌, 그리고 모든 관계의 단절이 그것이다.
(註; 이 네 가지는 원래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일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취할 수 있는 단계적 수단으로, 화합, 양보, 위협, 싸움이다. <마하바라타>에서 빤다바 일족은 세 간계가 실패하자 전쟁을 시작했다. 여기에서는 에고를 이런 수단으로써 정복한다는 내면적 의미로 쓰이고 있음)
헌신의 길을 걷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요가의 길과 의식(儀式)이 있다. 이런 것들은 세간적 지위, 권력, 더 나은 생활조건, 더 높은 자격을 성취하려는 욕망, 한 단계씩 더 높이 올라가고 남들을 능가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하는 활동이다. 이런 활동은 에고와 욕망으로 가득 차 있고, 어떤 목표를 이루었다는 자부심, 그리고 그 이후의 목표를 이루고 싶다는 욕망과 연관된다. 이 모든 것은 거짓된 에고 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목표들을 모두 성취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없고, 결코 완전히 얻지도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에고가 그 열망, 그 변덕스러운 성품을 놓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부심에 가득 차서, 사실은 실재하지 않는 많은 환상적 성취들을 이루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이것이 바로 환(幻)의 뿌리가 가진 성품이다. 이것을 인식하는 사람은 이런 상상적 성취들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최고의 인간이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앞에서 말한 네 가지 목표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른 추구의 길에는 많은 결함이 널려 있고 결과도 낭패일 뿐이다. 나(진아)에 대한 헌신을 통해서만 삶의 목표들 전부가 자동적으로 실현된다.
-싯따르메쉬와르 마하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