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한 마음(止)를 의지하여 지관(止觀)수행을 닦으시오
ㅇ. 소승인의 집착타파
1.직접타파
다음은 스승인(小乘人)의 집착하는 편견을 타파하는 내용을 설명하겠다.
이때 외인이 질문했다.
"단지 '의식'에 의지하여 지관을 닦더라도 수행이 성취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반드시 청정한 우리의 마음(여래장)을 의지해야만 합니까?
이에 혜사스님이 대답했다.
"우리의 의식은 실체가 없으므로 오직 우리의 청정한 마음을 자체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수행할 때에는 의식이>반드시 우리의 청정한 마음을 의지해야 한다. 또한 의식은 순간 순간 변화생멸하므로 앞에 일어났던 생각(生相)은 이미 뒤에 나타나는 생각(滅相)이 아니다.
만약 청정한 마음에 의지하지 않으면 비록 갖가지 수행을 한다하더라도 조금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 생각한 것(前念)은 뒤에 생각한 것(後念)과 다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가'라는 사람(前人)이 먼저 법(法)을 듣고, '나'라는 사람(後人)이 <앞에 설한> 법을 듣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어떤 법을 듣더라도 앞에 법을 들은 사람을 능가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모두 한번씩 밖에 법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식도 이와 같아서 앞의 생각과 뒤에 일어날 생각은 서로 다르다. 비록 앞의 생각이 법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망상을 따라서 법은 바로 사라져 버릴 것이고, 뒤에 다시 법을 들었다 하더라도 법을 이해하는 힘이 증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앞의 생각과 뒤의 생각은 모두 각각 한 번씩만 법을 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비유하자면 '가'라는 사람(前人)이 '갑(甲)'자를 배우고 나서 죽었다. 그리고 '나'라는 사람(後人)이 다시 '을(乙)'자를 배웠다면 오직 '을(乙)'자 만을 알뿐 '갑(甲)'자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가'라는 사람과 '나'라는 사람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의식은 이상의 비유와 같아서 앞에 사라진 생각과 뒤에 일어날 생각은 서로 하나로 융합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의식만을 의지하여 수행한다면> 수행력은 더 깊어지지 않고 증대될 수 없다.
한편 우리의 청정한 마음(여래장,止)을 자체로 하면 의식의 순간순간 생각하고 수행한 것을 모두 받아들여 청정한 마음의 성품을 익히게 된다. 다시 그 청정한 지혜의 성품이 의식으로 닦은 수행력을 따라서 종자를 형성한다.
비록 앞에 일어났던 생각이 사라지고 난 뒤 즉시 뒤에 한 생각이 일어났을 경우라도 이전에 닦았던 종자와 화합하여 계속 이어서 익히게 된다.
그러므로 수행함에 따라 전(前)보다도 저욱 더 지혜가 증가하게 된다.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에 의지하여 수행하면 수행력이 점점 깊어져 지관수행을 완성할 수 있다.
만약 계속하여 꾸준히 수행하지 않으면 오히려 공덕의 종자가 세력이 약해져 이제까지 수행해 온 공덕까지도 잃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수행을 성취할 수 없는데, <의식만을 고집하여> 전혀 우리의 청정한 마음을 의지하지 않아 앞에 일어난 생각과 뒤에 일어날 생각이 서로 연결되지 못한다면 어찌 수행을 완성할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오식 의식만 사용하여 수행하고 우리의 청정한 마음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올바른 것이라고 긍정할 수 없다"
2. 의문 해결
외인이 질문했다. "소승법에서는 근본식이라는 개념을 밝히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들이 법을 듣고 사유함으로써 모두 수행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까? "
이에 혜사스님이 대답했다.
"모든 범부와 심지어는 짐승들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자기가 수행한 만큼 공덕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근본식을 자체로서 의지하여 수행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승(二乘)인 소승들에게 있어서랴, 단지 소승인은 청정한 마음의 개념을 몰랐을 뿐 우리의 청정한 마음을 의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외인이 질문했다.
"<위와 같은 논리대로 라면> 아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지 못한 짐승들일지라도 어찌 청정한 마음을 자체로써 의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혜사스님이 대답했다.
"어리석은 행위를 하면 할수록 그 업(業)은 점점 무거워지고 나아가 그 마음을 익히기 때문에 과보는 차차 무거워서 더 어리석은 존재로 전락된다. 비록 얄팍한 지혜의 성품과 과거생애에서부터 익힌 천박한 지혜의 종자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만 현재의 과보인 그릇된 행동에 의해 <지혜의 성품이> 가리어져 있기 때문에 의식을 사용하여 청정한 수행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다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지 못했을 뿐 청정한 마음이 아닌 것이 아니다" (譯註 : 만일 짐승들이 청정한 마음을 바탕으로 삼지 않았다면 아무리 불보살님이 대비원력이 크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제도할 수 없을 것이다.)
ㅇ. 대승인의 집착타파
1. 명칭과 의미에 대한 집착
1) 의식의 사용문제
다음은 대승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집착을 타파하는 문제를 밝히겠다.
외인이 질문했다.
"단지 청정한 마음을 의지하여 지관을 수행하면 될 터인데, 무엇 때문에 굳이 '의식'을 샤용해야 합니까?"
이에 혜사스님이 대답했다.
"위에서 이미 설명한 것처럼 '의식'을 의지해야만 마음의 명칭과 의미를 알 수 있으며, <현상세계에 있는 대상사물은 실체가 없는 허상이라는 사실을 알아> 6진(六塵)의 대상 경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 하여 근본식을 훈습해야 미혹이 점점 사라지고, 지혜의 성품이 날카로워져 수행이 완성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처음에는> 의식을 사용해야 한다."
2) 의식과 경계의 문제
외인이 질문했다.
" 청정한 마음은 그 자성이 본래 고요하고 안정된 것을 '지(止)'라 하고, 자체에서 분명하게 사물을 관조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관(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의식과 사물의 명칭과 의미들, 그리고 대상(境界)들은 모두 그 자체의 성품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굳이 의식을 사용하여 명칭을 깊히 연구하고 의미를 알아서 자기 마음의 모습으로 떠오른 대상 사물(境界)들을 소멸시켜야 합니까?"
이에 혜사 스님이 대답했다.
"만약 우리 마음 자체의 측면에서 설명한다면 그대의 말이 옳다. 다만 무시이래로 우리의 마음을 무명(根本無明), 망상(支末無明)으로 익혀왔기 때문에 (최초의) 무명불각(無明不覺)이 스스로 요동하여 모든 대상이 우리의 눈앞에 전개되었다. 만약 사물의 명칭을 연구 분석하고 그 의미를 잘 파악하여 이러한 이치에 따라 관수행을 하며, 현상사물이란 있는 듯도 하지만 어떤 실체가 없으므로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방법(方便)이 없다면, 무엇을 사용하여 <우리의 마음이> 본래 적정(止)하며 분명하게 관조(觀)하는 작용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겠는가"
(譯註 : 반드시 의식을 사용하여 사물의 명칭과 의미를 관찰분석하고 분별하여 우리의 마음이고요하지만 고요한 가운데 현실적인 응용의 측면에서는 모든 대상을 관조하는 성품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의식을 사용한 수행을 통하여 마음이 지닌 공덕을 체득해야 한다)
3) 망상의 소멸문제
이때 외인이 질문했다.
"청정한 마음이 스스로 마음의 성품이 본래 고요하다는 이치를 안다면 바로 망상이 쉬어질 텐데, 무엇때문에 굳이 의식을 사용합니까?"
이에 혜사스님이 대답했다.
"우리의 청정한 모습은 두 모습이 없다. <중생의 마음은>무명불각에 싸여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본래 고요하다는 이치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반드시 <수행을 통해 제6식을> 무진지(無塵智)로 전환하여 고요한 성품을 익힐 때 무명이 모두 사라져 비로소 망상이 쉬어진다."
4) 무진지의 성취문제
외인이 질문했다.
"단지 망상이 사라지면 마음은 바로 고요한 가운데 관조하는 작용이 나타날텐데, 무엇때문에 '반드시 의식을 사용하여 무진지를 성취하고 <그 지혜로써> 마음을 익혀야 고요한 가운데 관조하는 능력이 비로소 나타난다'고 하십니까?
이에 혜사스님이 대답했다.
"무진지로써 우리의 마음을 익히지 않는다면 근본무명은 끝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무명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망상이 쉬어지겠는가."
-남악혜사스님 지음 <대승지관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