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무명번뇌(無明煩惱)의 자체가 그대로 청정한 마음인가?
질문 : 중생의 경우 옛날부터 무명염법(無明染法,번뇌)으로 훈습해온 인연 때문에 마음이 무명염법으로 작용한다면, 앞(과거)에 일어난 무명염법이 훈습하는 주체가 되어 뒤(현재) 무명의 자체를 말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무명염법의 자체를 청정한 마음이라고 했습니까?
혜사스님 답변 : 번뇌를 훈습하는 주체인 앞에 일어난 무명이 비록 뒤 무명을 일으키게 할 수 있지만 무명을 일으키는 순간 앞 무명은 그 자리에서 스스로 사라져 버린다. 그런데 어떻게 앞에 일어난 무명이 뒤에 일어난 무명의 자체가 될 수 있겠는가. 마치 보리씨가 새로운 열매를 맺으려면 앞에 뿌린 보리씨 자체는 스스로 썪어서 미진(微塵)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어찌 봄에 거두는 보리가 가을에 뿌린 보리씨와 똑같은 것이겠는가. 만약 가을에 뿌린 보리씨가 그대로 봄날 보리로 결실을 맺을 수 있다면 최초의 보리씨 종자는 썩지 않고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야 한다.
무명(無明)도 보리씨의 경우처럼 비록 앞에 일어났던 무명이 뒤 무명을 일으키더라도 앞에 일어난 무명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뒤 무명이 나타나게 할 수는 없다.
만일 이와 같은 가정이 가능하다면 무명염법은 상주(常住)하는 법이 된다. 즉 순간순간 그러한 망상들이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미 무명염법은 상주불변한 법이 아니다. 마치 등불의 타는 불꽃과 같이 앞에 일어난 불꽃이 뒤의 불꽃으로 계속 이어지면서 피어오르는 것과 같다.
(무한진인 註 : 번뇌, 즉 무명으로 인하여 일어난 번뇌의식은 모두가 순간적으로 생(生)과 멸(滅)이 교번적으로깜빡거리는 파동성을 가지고 있다. 파동성은 순간순간마다 찰나간에 생과 멸이 교번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므로,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닌 그림자와 같아서 실체성이 있을 수가 없다.따라서 무명번뇌는 파동의 움직이는 그림자의 지나간 괴적만 순간적으로 깜빡거리며 보이는 것일 뿐, 실체는 아무 것도 없다. 그 자체는 실체가 없는 빈 것이므로, 그 없는 빈 것 자체가 바로 마음바탕, 청정한 마음인 실제이다. 또한 생과 멸이 깜빡거리는 그 자체는 바로 움직임없는 청정한 마음바탕의 그림자가 순시적으로 생멸의 파동운동성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명의 자체는 오직 우리의 청정한 마음일 뿐이다. 우리의 마음이 인연에 따라 무명염법으로 작용하더라도 그 무명염법은 있는 듯 하지만 실체로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무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의 청정한 마음 자체에는 무명의 모습이 전혀 없다는 뜻에서 공여래장이라고 한다.
- 남악혜사 지음 <대승지관법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