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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명상서적 잠깐 들여다 보기] 알을 품고 있는 닭은 때를 안다.

무한진인 2018. 7. 9. 09:26


줄탁동시(茁啄同時)

깨달음은 미리 알고 있는 곳에서 오지 않는다.

믿음이 있는 곳에서 예기치 않게 온다.

이 믿음은 마치 알을 품고 있는 닭의 몸과 마음이 온통 품고 있는 알에 가 있는 것과 같다.

몸이 움직이는 가운데 몸이 아닌 무형의 그 무엇이 있다.

왜냐하면 똑같은 몸인데 숨이 끊어지면 끊어지자마자 그 같은 몸이 작용을 멈추니 말이다.

있지만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곳에 마음이 있다.

이를 두고 공자는 "사람이 숨 쉬고 살아 있는 생명이 하늘의 목숨에 닿아 있다"고 한다.

그것이 보이는 음양으로 나타나 온다. 그렇지만 이는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니다.

그리고 아무 이름도 갖고 있지 않지만 스스로 밝다. 이것이 세상 언어로는 신의 얼굴, 또는 부처라고 한다.

둘 다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우리가 아는 것 속에도 있다. 그러나 그 아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아는 것에 머문즉 상이 생겨 중생의 어둠이 생긴다. 그늘이 생긴다.

세상은 이 상을 취한다. 그리고 불(佛)을 가리고 신(神)을 멀리한다.

이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만 사람이 스스로 멀리한다.

우리가 대개 안다는 것은 부모로부터 태어난 뒤에 온 것들이다.

그러나 나는 알기 전에도 있었다.

프랑스 사상가 데카르트는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생각하지 않아도 존재한다.

이 언어는 현대인들의 의식을 잘 말해준다.

선은 옛말을 살려 낸다. 그리고 우리를 더 밝게 한다.

데카르트는 사람은 생각해야만 존재한다고 생각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을 안 할 때도 존재한다.

잠자고 있는 동안 생각하고 있는 자는 없다. 그러나 나는 존재하고 있다.

이 나는 성인이나 범부와 같은 존재이다.

우리는 보통 생각을 해야 내가 있는 줄 안다.

그러나 생각을 안 할 때도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

이것을 알면 자각이 온다. 생각은 저절로 놔진다. 생각이 놔지는 곳에 내가 밝아진다.

내게 있는 지혜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부러 생각을 놓으려고 하면 놔지지 않는다.

생각을 안 할 때도 나는 존재한다고 알고 있으면 생각이 저절로 놔진다.

데카르트는 관념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다.

불교 또한 관념 속에 든 불교는 긴장을 불러오고 지혜가 나오지 못한다.

부처 말이라도 그의 말이 내게 와 관념 속에 숨어 버린다.

그것은 비록 불(佛)의 말일지라도 불의 말이 못된다.

중생의 것으로 바뀌어 나와 버린다. 말은 불의 말이지만 그 말하는 자의 언어는 중생의 말이 되고 만다.

그래서 살아있는 불의 언어를 알기 위해서는 나를 깨닫는 화두를 든다.

"나는 생각을 안 할 때도 존재한다"

화두가 곧바로 들어온다.

"마음도 아니고 몸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다."라고 하는 그 먼 옛날의 화두가 지금에 된다.

화두는 살아 있는 사람을 떠나 있지 않은 것이다. 살아 있는 생명이 있는 곳에 같이 있다.

지금 여기에 있다.

화두 공부는 동양, 서양을 가르지 않는다.

우리의 생각이 그치는 곳이면 어디든지 된다.

거기에 가면 나도 너도 선공부가 되어 나온다.

생각으로 알 수 없는 해탈의 힘은 생각이라는 사량 분별이 그치는 곳에서 된다.

생각은 생명에 붙어 있는 나뭇잎과 같은 것이다. 부분이다. 전부가 아니다.

앉아 좌선하고 있는 것도 품는 것이다.

닭이 병아리를 갖기 위해 알을 품을 때는 고요하고 조용한 곳에 바리를 잡는다.

좌선이 곧 그것이다.

틀에 얽매여 형식만 갖추는 것이 좌선이 아니다.

도를 닦는 것은 닭이 알을 품 듯 나에게 이미 존재하고 있는 알을 안아 품는 것이다.

품지 않으면 깨달음도 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품는 생활을 하지 않고 머리로 아는 것으로 기다린다.

그렇게 때문에 부처인 나의 본 얼굴을 만나지 못한다. 알 속에 생명의 눈이 있다.

이 있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품는다.

이것 저것 될까 말까 둘러보지 않고 앉는다. 머리엔 생각이 없다.

오직 내 생명 바탕에 마음이 가 있다.

알이 있는 줄 모르고 앉아 있는 것은 망상을 보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앉은 좌선은 망상선이다. 이익이 없다.

틀에서 벗어난 고요함

옛사람의 경험 이야기가 있다.

남악 선사와 마조 선사의 대화는 무엇을 품고 앉아야 하는지를 간명하게 보여준다.

남악선사는 좌선만하고 있는 마조에게 간다.

"앉아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마조는 답한다.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다음 날 마조가 앉아 있는 앞에서 남악 선사가 기와 조각을 돌 위에다 갈고 있는 것이다.

스님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한 마조가 묻는다.

"스님, 무엇에 쓰려고 기와 조각을 갈고 계십니까?"

남악선사는 말한다.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

이 말을 들은 마조 선사는 '말도 안되는 소리'다 싶어 재차 물었다.

"어떻게 기와 조각으로 거울을 만듭니까?"

남악 선사는 마조에게 되묻는다.

"그러면 어떻게 앉아 있으면 부처가 되는가?"

마조는 거기서 깨달음을 얻는다. 헛된 노력을 그친다.

그런데 간혹 어떤 알닭은 알이 없어도 알을 품듯이 앉기도 한다.

그때는 알도 낳지 않고 말도 안 듣고 자꾸 앉으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 닭은 망나니 닭이다.

여기 옛 어른들이 남긴 "선객들의 산중오입(山中誤入)"이 그것이다.

봄에는 동쪽으로 가고, 남쪽으로 작대기 날리고

가을 돌아오면 서쪽, 북방으로 들어가서

풍경 구경하고 참 좋다.

삼백 육순을 이렇게 도는구나

그 우리 선객들 참 좋다 그 말이여

이렇게 지내 가지고는 어느 날에 제가

저기 고향에 도착할 것이냐 그 말이여

이게 모두 우리 선배들의 산중오입이여.

오입 중에 이것이 제일 무서운 오입이여.

미남미녀에 빠진 것보다

선객이 경치구경에나 즐기고 빠지는 것이

더 무서운 오입이여,

                -전강 조실 스님-   

닭은 알만 보면 품으려 하고 알을 치워도 알을 그리워 한다.

이렇게 알을 보고 앉으려고 하는 그 마음이 궁구하는 마음인 것이다.

그러면 닿는다. 이 닿는 곳에 살아 있는 의심의 눈이 있다.

나에게 이미 있는 것을 아직 안 봤으니 이것이 '이 뭣고, 판치생모, 무(無)자'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에게 있는 것을 팽개쳐 놓고 화두를 타거나, 어느 책에서 보고 들은 것을 가지고 들어간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미 존재하고 있는 마음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신 분이다.

그래서 우리의 스승이고 부처님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부처 마음이 있다. 다만 우리가 가려 놓고 있는 것이다. 가려 놓았지만 내 안에 있다.

믿음이 가면 궁구가 된다.

마음이 있는 곳에는 어디서든지 있는 알을 품을 수 있다. 걸으면서도 품을 수 있다.

앉아만 있다고 해서 품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경험이 오면 지금 우리가 아는 세상처럼 경쟁을 하는 세상이 아니라, 하는 것마다 다 슬기로움 속에서 진리로 보게 된다. 서로가 사는 상생의 길에 들어 선다. 자비심이 자라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커 간다.

이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 몸을 버리지 않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있는 것을 품는 것이다. 암닭의 품 속에 알의 눈이 생겨 온 것이다. 생명을 가진 눈으로 변하여 오고 있다가 때가 되어 암닭은 주둥이로 알을 쫀다. 병아리와 쪼는 것이 서로 맞아 떨어진다. 깨고 나온다.

이것을 옛사람들은 "줄탁동시(茁琢同時)"라 하고 내놨다.

이미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있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이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알기 전'이다.

이것을 '부모미생전', '천지미분전'이라 한다.

알기 전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는 것은 놔두어야 한다.

여기에 화두 공부의 생명이 있다.

그러나 마음이 있는 줄만 알아도 잡생각이 적어지고 편안하다.

그리고 나는 곧 싱싱해진다.

생각이 일어난 것이 나쁜 게 아니다. 그 생각 위에 또 생각을 얹어놓는 습관이 나쁜 것이다.

내 마음을 놔두고 왜 그렇게 오랫동안 생각에 묶여 있는가 !

생각으로 마음을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이때는 마음은 있지만 구름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먼저 하고 생각을 뒤로 하면 그 생각은 되레 싱싱해진다.

그 생각은 마음을 더 돋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 생각이 되레 싱싱해진다.

그 생각은 마음을 더 돋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 생각이 마음을 잃으면 생각은 구름이 된다.

사람이 이 말 위에 저 말, 저 말 위에 이 말을 얹어 놓는다. 스스로가 밝지 못한 사람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불교를 많이 알면 그 아는 것이 마음에 앞서 있다.

불교인은 이런 것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는 불교를 놓고 다시 눈뜰 줄 알아야 삶 속에서 불교가 살아난다.

神光不昧(신광불매) 萬古輝猶(만고휘유) 入此門來(입차문래) 莫存知解(막존지해)라.

즉 '신묘한 빛은 어둡지 않고 만고에 빛나노니, 이 문 안으로 들어오려면 아는 것을 가지고 들어오지 말라'는 말이다.

사람이 공부를 하는 것이지, 사람을 떠나서 다른 물건이 어디로부터 와서 하는 공부가 아니다.

공부는 사람에게 이미 있는 것을 다시 나오게 하는 공부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워들은 것을 가지고 들어가 스스로를 막아 놓는다.

성인의 말을 임의로 해석해 믿으면 삿되기 쉽다.

                          -현웅스님 저 <번뇌를 끊는 이야기-간화선의 길>(운주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