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진인 2018. 6. 5. 09:48


[본문]

不被善惡所拘(불피선악소구) 不被靜亂所攝(불피정란소섭0

不厭生死(불염생사) 不樂涅槃(불락열반)

無不能無(무불능무) 有不能有(유부능유)

行住坐臥(행주좌와) 心不動搖(심부동요)


선악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고요함과 산란함에 영향받지 않으며,

생사를 꺼려하지 아니하고, 열반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無)가 무일 수 없고, 유(有)가 유일 수 없다.

행주좌와 어느 때나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다.

[해설]

선악에 따라 취하고 버리는 행을 넘어서야 한다.

만약 취하고 버림이 있다면 이는 앞에서 말한 심성에 어긋난다.

심성은 본래 선악 등 일체의 분별을 떠나 있다.

수행자는 자칫 고요함에만 끌리고 염착되기 싶다.

그러나 진정한 청정과 선정은 고요함과 산만함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다.

산란함을 막기 위해 고요함만 지키고 있으면 이미 여기에 분별이 있고, 고요함에 물들어 있어서 그 고요함은 원만하지 못하고, 영원하지 못한다.

생사는 싫어하여 떠나려 하고, 열반은 좋아하여 향하려 함도 심성(心性)에 어긋난다.

생사 그 자리가 그대로 열반임을 요지(了知)하여야 한다.

생사를 떠나 따로 열반의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본래 심성은 생사(生死)에 물든 바가 없다.

그런데 어찌 생사를 벗어남(涅槃)이 있겠는가.

무(無)에서 무(無)를 얻을 수 없다. 무에서 무를 얻는다면 이미 무가 아니다.

무(無)라는 유(有)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무(無)에서 능(能)과 소(所)의 자리가 따로 없는데 어떻게 무일 수 있겠는가.

단지 유(有)에 상대(相待)되고 상대(相對) 되어 있는 상(相 : 개념)일 뿐이다.

즉 의타성(依他性 : 다른 것에 의지하여 있게 되는 성질)의 것인지라 그 실성(實性)을 얻을 수 없다.

유(有)를 떠나 무(無)의 자리가 따로 있지 아니하고, 무를 떠나 유의 자리가 따로 있지 아니하다.

유(有)에서 유(有)를 얻을 수 없음도 마찬가지다.

유(有)와 무(無)의 분별을 떠나게 되면 행주좌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마음이 동요됨이 없다.

유와 무의 분별을 떠나면 일체의 분별을 떠남이 되는 까닭이다.

[본문]

一切時中(일체시중) 獲無所得(획무소득)

三世諸佛(삼세제불) 敎旨如斯(교지여사)

卽菩薩慈悲(즉보살자비) 西天二十八祖(서천이십팔조)

共傳無住之心(공전무주지심) 同說如來之見(동성여래지견)

일체 어느 때나 얻을 바 없음을 증(證)하나니

삼세제불의 가르침의 요지가 이와 같다.

보살의 자비로 여러 대에 걸쳐 전수되어 왔으니

세존께서 멸도하신 이래로 서천(西天 :인도)에서 28조(祖)께서

모두 무주(無住)의 심(心)을 전하시고,

똑 같이 여래지견(如來之見)을 설하심이로다.

[해설]

대승교의의 요의(要義)가 곧 일체법(一切法)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때 어느 자리에서나 바로 얻을 바 없음을 요지(了知)하여 뚜렷이 증(證)함이 곧 삼세제불께서 가르치신 요지이다.  이 심지법문(心地法門)이 보살의 자비심으로 세존께서 멸도하신 이래 지금까지 인도에서 28대 조사들께서 상전(相傳)하여 지(知)함도 없으며, 견(見)함도 없고, 분별함도 없음을 요지(了知)한지라 언어도단(言語道斷 : 말의 길이 끊어지고), 심행처멸(心行處滅: 마음 갈 길이 끊어져)하여 한 찰나도 머무름이 없게 됨이니 능(能)과 소(所)를 떠나 일심(一心)이며 각(覺)이 된다. 바로 이것이 여래지견(如來之見)이고, 모든 조사들께서 전하신 심지법문(心地法門)의 요체이다.

                                                          -박건주님 번역,해설<顯宗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