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진인 2018. 6. 1. 10:27


[경-34]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 무엇을 일러 여래장의 자성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까?"


[논-34-1]

이 아래는 두 번째의 문답이다. 앞에서는 시각이 본각, 여래장의 자성과 다르지 않음을 밝혔고, 이제는 여래장의 자성이 숨어 있어 움직이지 않음을 바로 나타내었으니, 이 중에서 여래장의 뜻을 대략 설명하겠다.

여래장의 문에 두 가지 또는 세 가지가 있다. 세 가지는 <부증불감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중생계 가운데에 세 가지 법을 보이니, 모두 진실하고 여여하며, 다르지도 않고 차이나지도 않는다.

무엇을 세 가지 법이라 하는가?

첫번째는 여래장의 본제(本際,진여,절대본체)에 상응하는 체와 청정한 법이다. 이 법은 여실하여 허망하지 않으며, 떠나지도 벗어나지도 아니하여 그 지혜가 불가사의한 법이니, 무시의 본제로부터 이 청정하고 상응하는 법체가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여래장의 본제에 상응하지 않는 체와 번뇌에 묶인 청정하지 않은 법이다. 이것은 본제에서 떠나고  벗어나 상응하지 아니하고 번뇌에 묶인 청정하지 않은 법이니, 오직 여래의 보리지(菩提智)라야 끊을 수 있는 것이다.

세번째는 여래장의 평등하고 불변하며 유에 이르는 법이니, 곧 일체 모든 법의 근본으로서 일체의 법을 갖추고 있고 일체의 법을 구유하고 있어서, 세간법 중에서 떠나지도 않고 법어나지도 아니한다"


생각컨대, 이것은 세 가지 여래장의 문을 나타낸 것이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능섭 여래장으로서, 자성에 머무르고 있을 때 과지(果地)의 여래공덕을 포함하고 있으니, 여래를 포섭한다는 점에서 여래장이라고 한 것이다.

둘째는 소섭 여래장으로서, 번뇌에 결박된 청정하지 못한 법이 모두 다 여래지(如來智) 안에 있어 모두 여래에 의해 포섭됨을 말하니, 여래에 의해 포섭되기 때문에 여래장이라고 한 것이다.

셋째는 은부 여래장으로서, 법신여래가 번뇌에 덮혀 있음을 말하니, 여래가 스스로 숨어 있다는 점에서 여래장이라고 한 것이다. 진제 삼장은 이와 같이 설명하였다.


[논34-2]

그 글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미래제에 평등하고 불변하며 유에 이른다'고 한 것은 일심의 체가 삼제(三際,과거,미래,현재)에 두루한 것이다. 그러나 앞 의 두 문 중에서 이미 본체를 나타냈기 때문에 이 문 중에서는 후제 등을 밝힌 것이다. 또 '여래'의 뜻을 밝히려고 한 것이니, '미래의 때에 평등하고 불변한다'는 것은 곧 '여(如)'의 뜻이고, '유에 이른다'고 한 것은 '래(來)'의 뜻이다. 이것은 <불성론>에서 "이 진여는 여여하지 아니한 가운데서도 여여함이 있고, 여여하지 아니함이 없는 가운데서도 여여하다. 이승의 여는 여여하지 아니한 가운데서는 여여하나, 여여하지 아니함이 없는 가운데서는 여여하지 않다.

어째서 이와 같은가? 이승인은 허망관(虛妄觀)에 의하여 무상(無常) 등의 상을 진여라고 하니, 이 허망관은 오직 인 중에만 있고, 과지에는 없다. 그러므로 이 여(如)는 어떤 때는 이루어지고, 어떤 때는 무너지기도 한다. 보살의 여는 허망을 떠나 진성(眞性)에 의하여 여를 보기 때문에 인지와 과지의 두 곳에서 다름이 없어서, 오직 이루어질 뿐 무너짐이 없다"고 하고 내지 널리 말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후제에 평등하고 불변한다'는 것은 대승의 여러 뜻을 바로 나타낸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유에 이른다'는 것은 '래(來)의 뜻을 밝힌 것이라고 한 것은, 모든 법이 가는 것에 대하여 일심이 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니, 이것은 마치 모든 법이 갈 때에 오취온법(五取蘊法)이 과지(果地)에 이르지 않으므로 가서 오지 않지만, 이 일심의 여는 과지에서도 그대로 있어 영구히 지나가 버림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유에 이른다'고 한 것은 곧 '래'의 뜻을 밝힌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논에서 "자성에 머무른 것으로부터 지득(知得)에 이른다"고 한 것과 같으니,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일심은 통틀어 일체 염정의 모든 법이 의지하는 바가 되기 때문에 '곧 모든 법의 근본'이라고 하였으며, 본래의 청정한 문은 항하의 모래같은 공덕을 갖추지 않은 바가 없기 때문에 '일체의 법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고, 연을 따라 유동하는 문은 항하의 모래 같은 염법을 갖추지 않은 바가 없기 때문에 '일체의 법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염법을 들어 마음의 본체를 바라보면 두루 통할 수 없기 때문에 떠나거나 벗어나게 되지만, 만일 마음의 본체를 들어 모든 염법을 바라보면 모든 염법에 두루하여 통하지 않은 바가 없기 때문에 '세간법 중에서 떠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는다'고 하였으니, '떠나거나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은 바로 '감추어 갈무리함'의 뜻이다.

이 세번 째 문은 일심의 움직임과 고요함에 통하여 염오와 청정의 의지가 됨을 전체적으로 밝힌 것이고, 두 번째 문은 유동의 문이 염법의 소의가 됨을 따로 밝힌 것이며, 첫번째 문은 고요한 문이 정법(淨法)의 소의가 됨을 따로 밝혔다.


                                                                           -원효대사의 금강삼매경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