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선(傳統禪)이란 무엇인가?
능가선법에 대해 조목별로 기술하기 전에 먼저 그 총체적인 요의를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 무엇을 깨달으시어 영원히 생사에서 해탈하셨는가.
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 : 모든 존재가 본래 생한 바가 없다는 진리)이다.
본래 무생(無生)인데 사(死)가 어디에 있겠는가,
왜 일체법(모든 존재)이 무생(無生)인가.
오직 일심(一心)일 뿐이기 때문이다.
왜 오직 일심일 뿐인가.
능(能: 주관, 인식주체)과 소(所 : 객관, 인식대상)가 불이(不二)이며, 따로 있지 않기 까닭이다.
일체법은 오직 자심소현(自心所現: 자심이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심외무법(心外無法 : 마음 밖에 아무 것도 없음)이기 때문이다.
유식(唯識: 오직 심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무엇을 얻었다 하면 거기에 이미 능(能)과 소(所)가 있게 되니, 이것은 꿈 속이다.
본래 일심인데 무명(無明)의 바람이 문득 몰아쳐
일심에서 견분(見分: 보는 자리)을 내니
동시에 상분(相分: 보이는 대상의 자리)이 있게 됨이라,
여기서 식(識)의 전변이 이어지며 꿈 속을 헤메게 되었다.
꿈에서 일어난 것이 일어난 것인가.
꿈 속에서 생하고 멸한 것이 생하고 멸한 것인가.
내가 꿈 속에서 지리산을 갔다 한들 깨고 나면 언제 간 바가 없다.
꿈에서 왔다 갔다 하였지만 본래 내 마음 그 자리에서 벗어난 바가 없다.
본래 일심(一心)이거늘
무엇이 생(生)하였다 한들 본래 마음 그 자리가 아닌가.
무엇이 멸하였다 한들 언제 생한 바가 있었는가.
무엇이 생(生)하였다 한들 언제 멸한 바가 있었는가.
돈오(頓悟)란 곧 '얻을 바 없음을 깨달음'이다.
심(心)을 얻을 바 없다.
심(心)은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심(心)이 언제 생(生)한 바 없기 때문이다(無生)
심(心)을 얻을 바 없으니 번뇌 또한 얻을 바 없다.
그래서 번뇌를 멸함도 얻을 바 없다.
그래서 번뇌를 멸한 열반도 얻을 바 없다.
아(我)란 대상이 될 수 없거늘
아(我)가 있다고 할 것인가 없다고 할 것인가.
생각 할 수 없음이다.
마음 둘 곳이 없다.
마음 갈 곳이 끊어지고(心行處滅)
일체의 언어 분별을 떠났다(言語道斷)
마음을 어떻게 하고자 하면 이미 최상승선이 아니며
능가선(달마선)이 아니다.
그래서 무심(無心)이라 하나 무심이 있을 것인가.
無境則無心(무경칙무심) 경계없음(경계 없게 되면) 곧 무심인데
云何成唯識(운하성유식) 어찌 유식을 따로 세우리.
(대승입능가경 권 제7 게송품)
무심(無心)이고 유식(唯識)이라 말하나
무심과 유식이 어디에 따로 있을 것인가
어떻게 망상을 소멸할 것인가.
망상이 본래 생긴 바가 없음을 알면
소멸시킬 망상이 없고,
마음이 그대로 무심(無心)임을 알면
망상을 소멸할 수 있다.
대승교의의 핵심은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無作)의 삼해탈(三解脫;三三昧)이거니외
위의 요지에 함께 녹아 있다.
非以空故空(비이공고공) 공인 까닭에 공이라 한 것이 아니라
無生故說空(무생고설공) 무생인 까닭에 공이라 설하느니라.
<대승입능가경 권제5 무상품(無相品)>
또한 무생(無生)인 까닭에 유심(唯心)이며 일심(一心)이고,
유심이고 일심인 까닭에 무생이다.
또한 무생(無生)인데 무생이 있다 하면
생함이 있다는 것이 되어 모순이다.
그러니 무생을 어떻게 어디에 따로 세울 수 있을 것인가
단지 얻을 바 없음일 따름이다.
얻을 바 없음이 마음이며
무소유(無所有; 있다고 할 바가 없음)가 바로 마음이다.
또한 진여(眞如)라 하고 여여(如如)라 하되,
여(如) 또한 무여(無如)이며,
비여(非如)이되 비무여(非無如; 如함이 없지도 얺음)이다.
이에 대해서는 <금강삼매경론>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진여는 곧 분별 떠난 성품의 자리를 말하니 진(眞)은 상(相)을 떠나 진실함이요, 여(如)는 평등하여 여일(如一)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평등성인 여(如)도 얻을 수 있는 어떠한 모습으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단지 얻을 바 없다는 그 성품일 따름이다. 그래서 여(如)라 하지만 그대로 무여(無如)이고, 무여(無如)이나 여(如)인 성품이 없지 아니하다,>
달마 대사 법문에 <二入四行論(이입사행론)이 있거니와
이 이입(二入)은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을 말하고,
먼저 이입(理入)이 되어야 올바르며 원만하고 빠른 최상승선에 들어 갈 수 있다.
또한 이입(理入)이 되어야 아차 하면 외도의 길에 빠지는 잘못을 범하지 않게 된다.
<이입(理入)이란 일체가 오직 마음일 뿐이고, 그 마음 또한 얻을 바 없음을 자심(自心)에서 뚜렷이 깨달아 아는 것이다. 행입(行入)은 일상생활의 현실에서 리(理)의 뜻이 구현되도록 하는 것이다. 달마대사는 이를 보현행(普賢行), 수연행(隨緣行), 무소구행(無所求行), 칭법행(稱法行)의 사행(四行)으로 분류하고, 모든 행이 이 가운데 포함된다고 하셨다.>
소위 조사선(祖師禪)이라 하는 것이
위의 법문 외에 따로 있을 것인가.
달마대사가 부촉하여 순선시대에 심인상전(心印相傳)해 온 위의 능가선(楞伽禪) 외에 어디에 조사선이 따로 있을 것인가.
<순선(順禪)시대 : 초조 달마에서 육조(六祖)까지는 순수한 선법이 전해 왔다는 뜻에서 이 시대를 순선시대라 칭한다>
어찌 순선시대가 한참 지나 나오게 된 소위 화두선이 조사선인가.
달마대사나 육조혜능대사가 언제 화두선 이야기 한 바 있는가.
임제선사가 언제 화두 참구하라고 말한 바 있는가.
임제 선사의 법문도 위의 능가선 법문과 똑 같거늘,
대승의 이법(理法)을 제대로 알았다면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고 ,
마음을 어떻게 둘 수도 없으며,
마음이 어디에 향할 수도 없고,
마음이란 본래 사의(思議; 사량분별)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마음이 본래 사의함이 없는 것인데,
어찌 마음으로 의문을 들거나 의문에 향하거나
의문을 잡고 있을 수 있겠는가.
마음으로 무엇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인가.
인과(因果)가 둘이 아니니
이법(理法)을 요지(了知)한 인(因)이 이루어져야 묘각의 과(果)가 이루어지는 법,
묘각(圓覺)에 일치한 인(因)이 이입(理入)에서 이루어져 행(行)의 바탕이 되어야 하는 법인데,
이법(理法)의 인(因)에 이긋나는 수행법으로 어떻게 묘각의 과(果)가 열리겠는가.
마음을 일으켜 하는 억지 수행은 큰 병을 쌓는 것이라 하였으니
능가선법(楞伽禪法)의 무수지수(無修之修), 임운(任運)의 뜻을 알아야 이 잘못에서 벗어난다.
무수지수(無修之修), 임운(任運)의 선법은 곧 앞에서 말한 이법(理法)을 통하면 이루어진다.
<無修之修(무수지수)에서 무수(無修)란 생각을 일으켜 지어서 하는 행을 하지 않는 것이니 이를 무작의(無作意)라 한다. 무작의의 행이 없지 않으니 무수(無修)의 수(修)이다. 임운(任運)이란 본래 얻을 바 없고, 사량분별함이 없는 자신의 성품에 따르는 행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가지고 임운해 간다고 하면 이 또한 심성(心性)에 어긋나 잘못된 행이다.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하려 하면 이미 심성에 어긋난다. 이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선(禪)이란 이입(理入; 이법을 알아들어감)하는 것이니
이법(理法)을 모르고 어떻게 선을 한다 할 것인가.
이법을 모르고 하는 수행은 외도에도 있거늘
어찌 불교의 선이라 할 것이며,
정법(正法)이라 할 것이며,
정통선이라 할 것이며,
하물며 최상승선이라 할 것인가.
마음이란 본래 무엇을 한다고 함이 없으니
그 성품 따라 무엇을 한다고 함이 없으면 되는 것이고,
단지 지(知)하고 견(見)함이 없이 물들지 않기만 하면 된다.
이러한 가운데 무심(無心)이 되고, 마음을 잊게 되니(忘心)
마음을 잊게 되어야 온 법계(우주)가 일심(一心)이 된다.
마음이란 대상이 될 수 없고, 느껴질 수 없는 것인데,
느껴지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망령된 것이다.(妄心)
망심(妄心)은 마음을 잊어야 사라지고
마음이 방소(方所; 공간)가 없게 됨에 일심법계(一心法界)가 된다.
일심법계가 곧 원각(圓覺)이고,
원각이니 일체지(一切智)와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한다.
-박건주 저<달마선>에서 일부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