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대사의 선가귀감(77)
77.
본분종사(本分宗師)는 법을 온전히 들어 보인다.
마치 장승이 노래하고 붙붙은 화로에 눈이 떨어지듯 하며,
또한 번갯불이 번쩍이듯 하여,
공부하는 이가 어떻다고 헤아려 보거나 더듬을 수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옛 어른이 그 스승의 은혜를 알고 말하기를,
" 스승의 도덕을 장하게 여김이 아니라,
오직 스승이 내게 해설해 주지 않은 것에 감격한다"고 했다.
[註解]
말하지 말라, 말하지 말라.
붓 끝에 오를라 !
[頌]
화살이 강물에 잠긴 달을 꿰뚫으니
그가 바로 수리를 잡는 이로구나
[월호스님 蛇足]
본분종사는 법을 온전히 들어 보여서 마치 장승이 노래하듯, 또는 불붙은 화로에 눈이 떨어지듯,
또는 번갯불이 번쩍이듯 한다.
이는 어떻게 좀 헤아려 보거나 더듬어 볼 수 없게, 사량분별(思量分別)로써 답을 찾을 수 없게 만든다고 하는 것이다.
법문(法門)과 강의(講義)에는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
강의는 대학이나 중고등학교에서 많이 한다. 강의는 되도록 알아듣기 쉽게 하면 잘 하는 강의다.
그러나 법문은 못 알아듣게 해야 잘 하는 법문이다.
이게 도데체 무슨 소리인가? 모르는 것을 스스로 깨치게 해야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법문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얼 모르는지 그 부분을 탁 짚어주고, 그것을 스스로 깨우치게 만드는 것, 그래서 법문을 하는 선사들을 산파에 비유한다. 산파는 본인이 애를 낳는 것은 아니지만, 산모로 하여금 해산을 잘 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런 점에서는 본분종사도 마찬가지이다. 남을 대신해서 깨달아 줄 수는 없다.
그러나 법문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활을 할 수 있다.
그래서 깨달음의 세계는 설(說)하려야 설할 수가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야 되는 그런 부분이 있다.
동산스님이 물었다.
"훗날 스승의 그림자를 묻는 사람에게 무어라고 해야 되겠습니까?"
운암스님이 답했다.
"바로 이것이라고 이르거라"
바로 이것이 도데체 무엇인가? 그런데 나중에 동산스님이 다리를 건너가다가 자신의 그림자가 강에 비친 것을 보고 "바로 이것"을 깨우쳤다. 그리고 나서 재를 지내면서 이런 말을 했다.
"스승의 도덕을 장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일러주지 않은 것을 장하게 생각한다."
이를 수 없는 도리를 억지로 일러주는 것보다 차라리 찔러서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것, 이것이 본분종사의 역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