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만은 완전한 평안의 성품으로 되어 있다.
질문자 : 꿈은 생시와 어떻게 다릅니까?
마하리쉬 : 꿈 속에서는 우리가 다른 몸들을 갖지만, 우리가 감각대상과의 접촉을 꿈꿀 때는 그 몸들이 이 몸 속으로 다시 들어 옵니다.
질문자 :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뜨만에 내재합니까, 대상에 내재합니까, 아니면 주체와 대상간의 접촉에 내재합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 속에서는 우리가 행복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실제로 언제 일어납니까?
마하리쉬 : 바람직한 것이나 그에 대한 기억이 있는 것과 접촉하고 있을 때, 그리고 바람직하지 않은 접촉이나 그에 대한 기억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행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행복은 상대적이므로 쾌락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절대적이고 영구적인 행복을 원합니다. 그런 행복은 대상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과 쾌락에서 벗어난 평안- 곧 하나의 중립적 상태입니다.
질문자 : 행복이 우리의 진정한 성품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입니까?
마하리쉬 : 완전한 지복이 브라만입니다. 완전한 평안은 진아의 것입니다. 그것만이 존재하고, 그것만이 의식합니다. 형이상학적으로 판단하든 헌신의 길로써 추론하든,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는 신에게 지복을 달라고 기원하고 은총에 의해 그것을 받습니다. 지복을 하사하는 자는 지복 자체일 수 밖에 없으며, 또한 무한합니다. 따라서 이스와라는 무한한 힘과 지복을 가진 인격신입니다. 브라만은 비인격적이고 절대적인 지복입니다. 유한한 에고들은 그들의 근원을 먼저 브라만에서 끌어내고 그 다음에는 이스와라에서 끌어내지만, 그들의 영적인 성품에서는 오직 지복일 뿐입니다. 생물학적으로 유기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은 그런 활동이 행복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성장을 돕는 것은 쾌락입니다. 음식, 운동, 휴식 , 한데 어울리는 성질 등, 쾌락의 심리학(그리고 형이상학)은 아마 이렇겠지요. 우리의 성품은 1차적으로 하나이고, 전체이고, 지복스럽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의 개연성 있는 가정으로 여기십시오. 창조란 전체적인 신성(神性)이 신과 자연(마야 혹은 쁘라끄리디)으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 마야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을 지탱하는 본질과 다섯 가지 원소(地水火風空), 마음, 지성, 에고 등 여덟가지 입니다. 에고의 완전함이 어느 시점에서 문득 깨지고,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 때문에 어떤 것을 얻고 싶다거나 무엇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깁니다. 그 욕망을 이루어 부족감이 치유될 때, 에고는 행복해지고 원래의 완전함이 회복됩니다. 따라서 행복은 우리의 본래적인 상태나 성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쾌락과 고통은 상대적이며 우리의 유한한 상태를 가리키는데, 이것은 부족감의 충족에 의해 진보합니다. 만일 상대적인 진보가 멈추면 그 영혼은 브라만에 합일됩니다. 브라만은 완전한 평안의 성품으로 되어 있으므로, 그 영혼은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쾌락을 갖는 것을 그치고 완전한 평안, 곧 지복을 즐기게 됩니다. 그래서 진아 깨달음이 곧 지복인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진아)를 무한한 영적인 눈이라고 깨닫는 것이지, 천리안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최고의 자기 순복입니다. 윤회는 슬픔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질문자 : 그렇다면 윤회 - 유일한 창조와 나툼 - 는 왜 슬픔과 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마하리쉬 : 신의 의지지요 !
질문자 : 신은 왜 그렇게 의지합니까?
마하리쉬 : 그것은 알기 어렵습니다. 그 힘에는 어떤 동기도 귀속시킬 수 없습니다. 그 하나의 무한자, 전지전능한 존재에 대해서는 어떤 욕망도, 성취할 어떤 목적도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은 자신의 면전에서 일어나는 (중생들의)활동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태양과 세상의 활동들을 비교해 보십시오. 일자가 다자(多者)로 되기도 전에 그에게 책임을 귀속시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건들이 정해진 순서대로 일어나게 정해 둔 신의 의지는, 자유 의지의 문제(결론을 내기 힘든 문제)에 대한 훌륭한 해결책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닥쳐오는 일이나, 우리가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일들이 불완전하고 불만족스럽다는 느낌 때문에 마음이 동요한다면, 자신에게 책임과 자유의지가 있다는 느낌을 놓아버리고 '우리는 전지전능자의 정해진 도구로서 그가 원하는 대로 일을 하고 고통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라마나 마하리쉬 대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