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속세의 삶과 영적인 삶 모두의 근원이다.
진아는 항상 지복의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그 안에서는 결코 어떤 병도 없다.
진아는 언제나 안전하며 절대로 파괴되지 않고, 어떤 것도 거기에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물질과 사물은 손상되거나 증가하는 것은 당연하다.
만일 자기 소유의 어떤 물건이 망가져 못쓰게 된다면 자기가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한다.
개아는 그자신이 어떤 형태로 손상된다고 상상한다.
진아는 그 안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그 안에는 손상되거나 쇠퇴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어떤 때(티끌)도 없다. 이 말은 그 안에 어떤 물질적인 성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것은 청정하다고 불리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런 때(티끌)가 없기 때문에 파괴가 불가능하다.
쇠퇴하는 것이 때(티끌,물질적인 것)의 본래 성질이다.
그것은 쇠퇴하고 파괴될 수 밖에 없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오염이 없는 진아는 파괴 불가능하다.
그것은 비록 몸과 감각기관 안에 있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에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
진아는 탄생도 죽음도 없다. 죽음은 몸과 관련해서만 이야기될 수 있다.
진아는 결코 부패하지 않고, 부분으로 분해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여러 부분들로써 합쳐지는 것이 아니며, 여러 부분들의 합계도 아니다.
그가 누구인지를 여러분이 알고 싶다면,
이 진아는 여러분의 몸 안에 살고 있고,
그 몸을 아는 자인 것이다.
우리가 앎(知)은 일시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마음 속의 앎(知)이 일시적이라는 뜻이다.
그 언어는 끝이 나지만 의식은 남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자신을 알지 못했다면 일을 하러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 올 수 없을 것이다.
감각기관에 속하는 욕망들은 결국 죽지만, 앎(知), 곧 의식의 본질적 성품은 그대로 남는다.
유년기, 청년기, 노년기 등은 몸의 상태들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물질적 사물의 자연적인 상태 변화들이다.
이런 상태들이 올 때는 쁘라나, 즉 생기(生氣)에너지와 관련해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쁘라나 그 자체는 젊어지지도 않고 늙지도 않는다. 그것의 에너지 성질은 그대로 남아 있다.
뿌라나의 상태에 아무 변화가 없는데, 어떻게 쁘라나의 쁘라나, 즉 생명기운 중의 생명기운인 진아에 그런 상태들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난생(卵生),습생(濕生), 화생(化生), 태생(胎生)은 모든 존재가 생겨나는 네 가지 기본형태이다.
모든 존재에게서, 쁘라나는 진아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유년기 청년기 등의 상태들은 쁘라나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것들이 진아에 영향을 줄수 있겠는가?
개아는 그 자신의 그릇된 생각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속박한다.
욕망 속에 속박이 들어있다.
이것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자
여러분이 원하는 무엇인가가 어떤 장소에 있다고 하자.
만일 여러분이 그것을 취득하고자 원한다면 여러분이 그곳에 직접 가야한다.
그리고 그것을 여러분이 얻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어떤 때는 그 욕망이 바로 충족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얻었는데, 그것을 그 장소에서 가져올 수 없으면, 여러분이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
그곳에서만 그 대상을 즐기거나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가는 곳으로 함께 가지 못할 때, 우리는 그 대상 근처에서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욕망으로 인한 속박이다.
만일 속박되고 싶지 않다면 여러분의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그럴 때만 그곳을 떠날 수 있다.
욕망이 있는 곳에는 구금상태가 있고,
그것은 그곳(세상 속에)에 거처를 두고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욕망은 그 대상의 근처에 머무는 것을 수반한다.
욕망이 소멸되면 구금 상태도 풀린다.
욕망을 포기하면 자유로워지는 것은 확실하다.
욕망을 품는 것 자체가 속박되는 것이다.
모든 욕망이 영원히 놓아질 때 그 사람은 실재가 되지만,
온갖 욕망에 꽉 붙들려 있는 개아는 파멸을 향해서 추락하는 것이다.
진아는 모든 성질이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생시상태에서는 진아가 그 상태의 한계에 의해 제한된다고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꿈 상태에 대한 앎을 갖지 못할 것이고, 한 상태에만 매여 있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단 것만 계속 먹거나 쓴 것만 계속 먹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것은 그가 몸 안에 있어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꿈의 상태에서는 그가 육신이나 감각기관의 도움없이 마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꿈을 넘어서 깊은 잠 속에 있을 때는 어떤 껍질이나 몸 없이 홀로 남아 있다.
어떤 의식의 물결도 없다.
여러분은 "진아가 어디 있나?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자신이 행복하게 잠들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누구인가?
그 몸에 지어준 이름으로 누가 부르면 대답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진아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깊은 잠과 생시의 상태는 육신의 것일 뿐, 진아의 것은 아니다.
그는 세 가지상태 모두의 주시자이므로 '아무 것도 아닐 '수가 없다.
그가 지고아 빠라마트만이다.
여러분은 그가 잠에서 깨어날 때 생시 상태의 모든 환경을 어떻게 다시 기억하느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을 잘 들어 보라.
주위 환경은 지성 또는 두뇌와 관계되며, 진아와는 무관하다.
지성이 변환되면 세간적 삶은 실재하지 않게 된다.
그럴때는 무엇에 의한 속박이나 무엇으로부터 벗어남도 없다.
세간적 삶이 존재하는 것은 여러분이 그렇다고 긍정하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실재한다고 여기는 것은 여러분의 관념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나는 그것을 놓아 버렸다"고 말하면,
세간적 삶과 어떤 속박도 사라져 완전히 소멸되어 버린다.
여러분이 그것을 증대시키면 그것은 커지는 것이고, 소멸시키면 소멸된다.
마음이 세간적 삶과 영적인 삶 모두의 근원인 것이다.
-싯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