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에 대하여(1)
<달라이 라마의 사성제 법문 일부 발췌.>
사성제(四聖諦)- 고제(苦聖諦), 집제(集聖諦),멸제(滅聖諦),도제(道聖諦)
1. 사성제 소개
이제 본격적으로 사성제(네 가지 고귀한 진리)에 대해 살펴보자.
왜 사성제를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라고 하는가, 부처님은 도데체 왜 사성제를 가르쳤는가 하는 질문이 나옴직하다.
이 질문에 대답을 하기 위해 먼저 개인의 경험과 사성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 모두는 행복을 바라고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하는 선천적 욕망을 갖고 있다.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매우 본능적인 일이라 증명할 필요도 없다.
행복은 우리 모두가 얻고 싶어 하는 것이며 그 열망을 충족시킬 권리도 당연히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고통은 모두가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며 우리는 고통을 없애려고 노력할 권리도 갖고 있다.
따라서 행복을 바라고 고통을 피하려는 이 열망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고 당연한 것이라면 문제는 과연 우리가 이 열망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이다. 이것이 우리를 사성제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끈다.
사성제는 두 쌍의 인과 - 원인과 결과 -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하나는 우리가 겪는 고통은 무(無)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조건의 결과로 발생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우리가 누리는 행복 역시 원인과 조건의 결과로 발생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은 감정의 상태에 국한되지 않는다.
고통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인 소멸이 감정의 상태는 아니나 지고한 형태의 행복이라 할 수 있다.
소멸은 고통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말하자면 소멸(滅) 또는 진정한 행복은 무(無)에서 생기거나 원인없이 생기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미묘한 문제이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소멸은 조건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멸이 어떤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다거나 발생한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개인적인 차원의 수행이나 정진으로 소멸의 상태를 실현할 수 있고, 소멸을 성취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소멸로 이끄는 수행(道)이 소멸의 원인이라 말할 수 있다.
사성제의 가르침은 두쌍의 인과 - 고통을 만드는 원인과 행복을 만드는 원인-를 명백하게 구분한다.
이를 일상에서 우리가 잘 구분하여, 행복해지고 고통을 없애고픈 큰 열망을 실현토록 하는 것이 이 가르침의 목적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사성제를 가르친 연유임을 깨닫고 나면, 사성제의 순서에 대해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왜 고통으로 시작해서, 고통의 원인, 고통의 소멸, 행복이라는 순서대로 사성제를 가르치는가?
사실 사성제를 설명하는 순서는 실제로 사물이 발생하는 순서와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사성제의 순서는 개인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하고, 그 수행을 기반으로 깨달음을 성취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마이트레야(彌勒)가 보성론(寶性論)에서 말하길 병을 치료하는 데에는 네 단계가 있다고 한다.
병을 진단하고, 병의 원인을 제거하고, 건강한 상태가 되면 치료가 완성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통도 고통의 원인을 알고,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고 고통이 사라진 상태가 되면 수행이 완성되는 것이다.
마이트레야는 환자를 치유하는 과정에 비유하며 사성제에 의거해 깨달음을 성취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환자가 건강해지려면 제일 먼저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알아야 치료를 받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아프다는 상태를 인정하면 왜 아프게 되었는지, 무엇 때문에 악화가 되었는지를 알기 위해 자연스럽게 노력할 것이다.
병의 원인과 악화된 이유를 확인한 다음에야 병을 치료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알게 된다.
그러면 병을 치료해야겠다는 의지도 생길 것이다. 단지 희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병에 걸린 이유를 알아내면 치료를 할 수 있다는 확신과 신념이 생기고, 확신이 있기 때문에 치료에 대한 의지도 더 강해질 것이다.
그 확신으로 치료를 모두 받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고통에서 벗어나겠다는 욕구가 애초에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수행하는 불자로서 가져야 하는 첫 자세는 현재 상태가 고통스럽고, 좌절을 느끼게 하는 상황이며 불만족스럽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때서야 우리는 고통을 일으킨 원인과 조건을 찾아내고 싶어질 것이다.
우리 모두가 고통스러운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불교에서 강조하는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이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불교의 세계관을 오해할 수 있다.
불교가 건강하지 못한 사고와 근본적으로 염세적인 세계관과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해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위험이 다분히 있다.
부처님이 고통의 본질에 대해 그렇게 강조한 이유는 그것에 대한 대안이 있기 때문이다. - 탈출구가 있으며, 실제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게 때문에 고통의 본성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대하다.
고통에 대한 통찰이 더 강하고 더 깊을수록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열망도 더 강해지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고통의 본성을 강조하는 까닭을 이렇게 넓은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고 인정한다.
해탈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많은 시간을 투자해 고통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앞에서 언급한 두 짝의 인과 중에서 한 짝은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겪는 과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고통의 원인과 고통의 인과 관계를 말한다.
다른 한 짝은 깨달은 사람들이 겪는 과정을 가리키며, 그것은 수행(道)과 진정한 소멸(滅諦)의 인과 관계를 말한다.
부처님은 이 두 가지 과정을 상세히 설명할 때 '열두고리의 의존적 발생(十二緣起)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니다나는 윤회의 열두고리들이며, 그것은 무지(無知)에서 시작해서 무지로 인한 의지작용(行), 의식으로 인한 작용(識) 등의 순서로 진행되어 늙음과 죽음으로 끝난다.
깨닫지 못한 중생들의 인과적 과정 - 고통과 고통의 원인들 속에서 이어지는 삶 - 을 자세하게 설명할 때, 십이연기의 순서는 무지로 시작해서 무지로 인한 의지작용, 의식으로 인한 작용 등으로 진행된다.
이 순서는 중생의 어떤 원인과 조건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지를 설명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 할지라도 정신적 수행을 한다면 그는 이 과정을 역전시킬 수 있으며 역전의 과정은 깨달음으로 이끄는 과정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무지의 연속체가 소멸하면 무지로 인한 의지 작용이라는 연속체가 소멸할 것이다.
무지로 인한 의지작용이 소멸하면 의지작용을 부추기는 의식작용도 소멸할 것이다.
나머지도 같은 과정으로 소멸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두 짝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한 사성제를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 바로 십이연기에 대한 가르침이다.
*주: 십이연기(十二緣起) : 12개의 인과적 연결을 형성하여 중생을 윤회하는 존재로 묶어 두고 고통을 영속시킨다. 이 고리들은 삶의 수레바퀴라는 유명한 불교 탱화에서 묘사되는데 여섯가지 세계(六度)와 그곳에 태어나는 다양한 원인을 예시한다. 시계방향으로 바퀴를 돌고 있는 고리들은 1) 무지(無知), 2) 무지로 인한 의지작용 또는 업의 행동(行), 3) 의식으로 인한 작용(識), 4)이름과 모습으로 인한 작용(名色), 5) 감각기관으로 인한 작용(六處,눈,귀,코,혀,몸,마음), 6)접촉으로 인해 일어나는 마음 작용(觸), 7) 감각(受), 8) 애착(愛), 9) 집착(取), 10) 업력으로 만들어진 것(有) 11) 출생(生), 12) 늙음과 죽음(老死) 등이다.
-텐진가초 지음,주민환 옮김<달라이 라마 사성제(하루헌)>에서 일부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