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선사 선시,게송모음(19)
ㅇ. 설날(元旦)
소리없는 하늘에 감히 호소하노니
오색구름은 어느 곳에서 용헌(龍軒: 임금이 계시는 마루)을 침인가
설날 타향살이 나그네여 가련한 내 신세구나
또한 다행히 이산은 예절을 좋아하는 마을이로다
해는 밝은 복이 펴져 마땅히 즐겁게 지내고
질병을 도소주로 치료하니 흔적마저 없음이로다
목동들은 이 나라의 한(恨)을 알지 못하고
피리 불고 북 치고 노랫소리 온 마을에 울림이로다.
ㅇ. 공림사(空林寺)
만행을 일삼아 첩첩산중 공림사에 도착하니
산사(山寺)의 절경은 인간세상과 다른 곳이로다
옥봉(玉峰)은 층층인데 푸른 산 기운이 내리고
옛 법당 향기 그윽하니 한낮이 한가로움이로다
주장자 높히 걸었으니 내가 벌써 늙었구나
일대사를 비록 이루었으나 누구와 함께 돌아갈까
슬프도다 ! 시냇물은 유유히 흘러만 가니
돌이끼 낀 반석 위에 초연(愀然)히 앉았음이로다.
* 공림사 :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사담리 낙영산에 있음.
ㅇ. 신해년(1911) 동짓달 상순 강계 도하리 서당에서
무심히 일 없이 글방 난간에 앉아 생각하니
반평생의 영고성쇠 거울 안고 보듯 함이로다
삼월인데 꽃이 피지 않으니 봄은 아직 이르고
바위마다 눈 쌓이면 여름에도 오히려 차가움이로다
경계를 싫어하지 않으니 내가 늙었음을 알겠고
서찰이 갑자기 끊겼으니 그대의 안부가 염려됨이로다
대장부란 스스로 얽매이지 않기를 좋아하니
흥에 겨워 서로 찾음이 또한 여렵지 않을 것이로다.
ㅇ. 또,
옛추억을 알고 정자에 올라 난간에 기대어
난간 주위 경치 수승하여 앞을 바라봄이로다.
비에 젖은 붉은 장미 타는 듯 수줖고
바람에 흔들리는 푸른 버들가지 차갑게 감쌈이로다
술 취하니 시(詩)가 있고 다시 한 수 읊조리니
한가하여 일 없음이 공연히 편안하지 않음이로다.
강성(江城)의 즐거움 글로써 말하지 말라
호탕한 그대들이여 ! 마음 속 감당하기 어려움이로다.
ㅇ. 갑산(甲山) 아득포고개에서 수비대행군을 만나
세간은 어찌 남금(南金)을 귀하다고 쌓아놓는가
좋은 것은 맑고 한가로우니 물질 밖의 마음만 못함이로다
소나무 잦나무 천 길 깊은 골짜기 자세히 바라보니
온 천지가 그림 속에 있는 것 같음이로다
여기저기 구름 낀 곳 영겁토록 밝게 하고
오랜 세월 내린 꽃비에 누각 위는 붉음이로다
어찌 장차 덧없는 바다를 헤메는 나그네가
불문에 모두 들어와 색이 공함을 개달을 것인가.
ㅇ. 여러벗과 자북사(子北寺)에 올라
견고한 사찰 문 깊숙이 꽃은 비 오듯 떨어지고
나무꾼 바위에 걸어둔 지팡이로 범을 능히 물리치고
연꽃 장막에 옷을 걸어두니 새들이 깃드는 봄이로다.
청정한 세계에 천진한 마음달이 비추는데
인생의 갈림길에 어찌하여 백발이 침노하는가
그대와 내가 고통의 바다에 빠져 있으니
어느 날이나 영산회상에서 법음을 깨달을 것인가.
*자북사 : 함경북도 강계 천마산 아래 있는 절
ㅇ. 또,
노쇠한 몸으로 산에 힘들게 오르는 것은
다만 옥난간에 노는 객이 신선과 인연을 맺고자 함이로다
변방에서 머물러 시를 읊는 그대는 학(鶴)인가 의심케 하고
묘향산을 찾아 결사함은 내가 또한 승려이기 때문이로다.
사바세계 미혹한 중생들이여 누가 꿈을 깨게 하였는가
천강에 달이 비치니 가히 부처님 등불 전해짐이로다
지금 이 나라가 불(炎)과 같은 여름이니
오직 원하건대 자비의 구름 곳곳마다 펼쳐짐이로다.
-경허선사 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