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반야심경 관련 법문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3

무한진인 2017. 11. 23. 21:06



공즉시색(空卽是色)

그런데 돈오를 견성하여 색즉시공을 여실히 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공의 실상에 완전히 발을 굳건히 내딛고 있지는 못합니다. 분별하는 오랜 습(習)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분별심이 계속해서 올라와 공의 세계를 다시금 머리로 분별하고 해석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자신의 성품을 보아 깨달음을 얻은 사람에게 보임(保任)이라는 본격적인 수행의 기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보임이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 '확인한 자신의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입니다.

<능엄경>에서도 '이치는 몰록 깨달을 수 있어도 깨달음에 의해 번뇌가 모두 소멸되지만, 현실에서는 오랜 습기를 문득 제거할 수 없기에 차례로 닦아야 한다' 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선에서는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합니다. 깨달음은 몰록 단박에 오지만 오랜 습기는 차차 닦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견성하여 색즉시공임을 깨닫고 나더라도 이처럼 오랜 분별심과 번뇌의 습으로 인해 완전히 불이법에 계합하지 못합니다. 즉 불이법이란 색과 공이 둘이 아니고, 주와 객이 둘이 아니고, 깨달음과 깨달음 아님이 둘이 아님을 뜻합니다. 그래서 처음 견성을 하고 나면 색즉시공이라는 진리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즉 공이라는 진여실상의 자리에 계합하는 자리가 따로 있다고 여기면서 이 참 자성의 자리, 공의 자리를 좇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깨달음의 세계, 공의 실상에 발 딛고 서 있으려고 하고, 이 깨달음에만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실제 현실생활은 조금 등안시하게 된다거나, 일상생활보다는 삶의 중심이 깨달음을 확고히 하는 공의 자리에 더 치우쳐지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불이법에 확고한 계합이 아직 안된 탓이겟지요. 즉 색즉시공은 알지만 아직 공즉시색까지는 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꾸준히 보임하며 공부해 나가다 보면 비로소 색과 공이 둘이 아니라는 불이법에 완전히 계합하게 되고, 그때 비로소 공즉시색을 확연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 전까지는 일상생활이라는 색의 대상세계보다는 깨달음의 세계인 공의 세계를 더 추구했다면 이제는 일상생활이 곧 깨달음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공이 곧 색임이 분명해지는 것이지요. 불이법에 확고히 눈뜨는 것입니다.

색이 공인 줄 알았다가, 비로소 내가 그렇게 추구해왔던 공이 그대로 색이라는 사실에 눈뜨게 되는 것입니다. 공즉시색에 눈뜬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깨달음의 세계가 따로 있고, 일상현실세계가 따로 있지 않게 됩니다.

색이 따로 있고, 공이 따로 있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저잣거리에 있으면서도 전혀 동요되지 않고, 일상생활을 다 하면서도 전혀 일상생활에 물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색즉시공만 알 때는  색은 좀 멀리하고 공만을 가까이 하고 싶었다면, 공즉시색에 계합하고 나면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인 줄 알기에 색에도 공에도 전혀 머물러 집착함이 없고,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로소 일상생활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전혀 걸림이 없고, 세간과 출세간이 전혀 둘로 나뉘어지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출세간의 공에만 발딛고 서 있으려고 혼자 고요한 곳을 찾던 삶을 멈추고, 자잣거리와 세상 곳곳으로 다시 들어가 중생들과 하나가 되어 살면서 그들을 구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심우도에서 말하는 반본환원(返本還源)과 입전수수(立廛垂手)입니다. 비로소 본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와 중생 구제를 위해 거리로 나설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을 화엄사상의 사법계(四法界)를 기준으로 본다면 사사무애법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색즉시공을 깨달은 것은 이사무애법계를 깨달은 것이고, 공즉시색을 깨달은 것은 곧 사사무애법계를 깨달은 것과 비슷합니다.

색즉시공을 깨달음으로써 이법계와 사법계 즉 진리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가 서로 다르지 않아 원융무애함을 깨닫게 되었다면, 공즉시색을 깨닫게 됩으로써 사사무애법계로로써 현실 속에 완전히 뿌리내려 현실속에서 원융무애하고 자재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 속에 살면서도 전혀 걸림이 없고, 자유자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법상지음, '반야심경과 선공부'(무한) 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