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내가 있음"안에 머물러 있어라.

무한진인 2017. 11. 1. 01:06


~ 전번 회에서 계속 됨 ~

질문자 : 들숨과 날숨과 연계하여 만트라를 해야 합니까?

마하리지 : (호흡과) 조화롭게, 그렇지, 그것은 항상 계속되는 호흡의 리듬에, 만트라를 자연스럽게 맞추면 되지.

자네가 지금 여기 앉아 있는데, 내가 한 동안 이야기를 하다가 자네에게 그만 나가보라고 한단말야.

이것은 엄마가 한동안 아이를 잘 보살펴주고 있다가 얼마 후에 아이에게 '너 나가  놀아라'하는 것과 같은거야.

엄마가 아이가 귀찮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지.

스승은 제자에게 깨달음의 지혜를 가르쳐 주면서, 몸-마음의 (이원적인) 감각세계에서 그를 끄집어내 준 다음, 스스로 그 순수한 존재상태를 잃어버리지 말고 지키라고 말해주거든.

이 존재성은 저 비존재성, 즉 절대성의 자식인데, 존재성이 존재성자체와 합일되면 비존재성으로 들어가게 되는거야.

그렇게만 된다면 이 존재성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간에 별로 관심이 없단말야.

우선 이 (이원화 현상의) 세계를 벗어나고, 그런 다음 존재성마저 넘어가야 하는 것이야. 

원래는 우리들 자신이 본래 절대성의 상태이지만, 우리가 이 육체에 집착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점이 시작된 것이지. 몸을 의식하지 못할 때는 아무런 욕망이나 구하는 행위가 없지만,자기가 몸이라고 집착하게 되면 자기 욕망을 충족하고 싶어 하고, 무엇인가 구하려는 행위가 이어지는데, 그렇게 해야만 평안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야. 그러나 자기가 몸이라는 자기 동일성의 착각 안에서는 어떠한 마음의 평안도 얻을 수가 없거든.


질문자 : 제 직업이 작가라면 글을 쓰는 것은 누구입니까?


마하리지 : 그 의식의 분화점(分化點, 의식의 파동성이 시작하는 점, 존재핵점), '내가 있다'는 의식인데. 그것은 모두 의식의 파동성의 유희란 말야.


질문자 :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때가 되면 마음 안에서 어떤 급격한 폭발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순수 존재의 체험에 바로 앞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마하리지 : 그것은 바로 진리의 문이 열리면서 터져 나오는 것이야. 밧줄(육체동일시 집착)을 끊고 나면 자기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는 순간이야. 가정에서는 보통 질그릇 항아리 속에 버터밀크와 버터를 보관하는데, 그 항아리는 밧줄로 천장에 매달려 있지. 그 사람이 문을 열어젖히고 그 밧줄(집착)을 끊어 껍질(항아리,육신)을 깨드린 뒤, 버터 밀크는 내버리고 버터(정수)인 '내가 있다'의 지(知)만을 삼킨다구. 그러고 나면 무엇이 남겠나? '나'도 없고 '너'도 없어.


질문자 : 선생님께서는 또, 이 깨달음 구조를 촉발시키는 어떤 특별한 기회가 있는데, 그것을 바로 알아차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그냥 무심히 지나쳐 버릴 것이고, 구도 열망자는  또 다시 그런 희유한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하리지 : 폭발 이전의 그 무슨 희한한 사건이나 그 무엇에 대해서도 신경쓰지 말게나. 자네가 자꾸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지성(知性, 분별심)의 상상력 때문이지만, 믿음을 가지고 그 '내가 있다'(존재핵점,모름) 안에 계속 머무르기만 하면 돼는 거야. 달리 별도로 할 수행이라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분별지성을 이용하려고 자꾸 시도하면 그 특별한 기회를 놓칠 위험성이 더욱 커진다구. 그냥 그것이 저절로 일어나도록 내비려 두라구. '내가 있다'는 존재핵점(모름)을 꽉 붙들고 착파할 뿐이지, 몸이 있다는 느낌을 붙드느라고 그 순수 존재성(모름)의 상태를 오염시키지 말라구 이 사람아 !


질문자 : 선생님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만일 우리가 필요한 깨달음 지혜에 대한 유형을 꾸준히 생각하고 있으면 모든 지혜가 거기서부터 흘러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마하리지 : 여기에 오면 그것을 증진하게 된다네.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대담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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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閑 談]

라마나 마하리쉬나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가 말씀하시는 "내가 있다"존재의식은 알고 보면 생각하거나 연구할 필요없이, 있는 그대로 아주 단순한 것으로, 항상 변함없이 우리에게 누구나 지니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볼 때에, 가을 날 무심코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는데 마침 기러기떼가 날라가고 있는데, 그것이 기러기라는 생각을 안해도 저절로 그것을 알게 됩니다. 또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서 깨어난다고 자연적으로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내가 깨어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의도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런 상태의 변화를 인지하는 것은 저절로 알게 되는데, 이 저절로 아는 상태가 '내가 있다"는 앎의 분별적 그림자(대상적인 앎)들입니다. 그러나 그 분별앎은 우리가 마음 속에 느껴지고 알려지는 것이므로 대상화된 앎의 느낌이며, 앎 그자체(앎의 원본)는 그 대상적 그림자 이전에 있는 것입니다. 즉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은 앞에 대상으로서 알려지거나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항상 느껴지는 앎의 느낌 이전에 보이지 않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표현하기 좋게 보통 "모름"이라고 말들은 하지만, 엄연히 말해서 "안다,모른다"라는  분별적인 <모름>이 아니라, 앎,모름을 넘어선 중도적인 모름입니다. 따라서 이 중도적 모름 속으로 깊히 들어가면 아는 자, 모르는 자가 사라지는 무한경지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아직 이원화 분별앎 속에 있는 보통 무지상태에서는 이 상태는 마치 분별앏을 받치고 있는 컴컴한 배경, 즉 단단하고 컴컴한 암벽같은 모름으로 밖에는 느낄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눈 앞에 있는 부처상을 보는 순간에 "부처상이구나 !"하고 마음 속으로 앎의 느낌이 생기는데, 그 앎의 느낌의 배경은 "모름"의 철벽입니다. 왜냐하면 모름의 배경 위에 앎의 느낌이 나타납니다.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느낌도 그 느낌은 인식되는 대상이므로, 그 느낌 이면에는 누구도 인식하지 못하는 무한한 철벽의 "모름"인 무지(無知)의 벽이 막혀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이 무지의 철벽을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래된 구도자는 이 거대한 무지의 철벽에만 주의를 집중합니다. 오랫동안 이 <컴컴한 무지의 철벽>에 집중을 하면, 자신이 그 무지의 벽과 일체가 되면서 그 '모름의 철벽"을 뚫고 "내가 있다"의 존재핵점에 안정됩니다. 이 점이 바로 의식이 다양한 파동성으로 분화되기 직전의 일체상태 또는 점(點)상태에 안정될 수가 있습니다. 이 점이 밖에서, 즉 이원화 분별심상태에서 볼 때는 "오직 모름"의 철벽상태같지만, 그 점 속으로 깊숙히 진입하면 전체 우주삼라만상이 오직 이 한점 속에서 분화되어 나왔음을 깨닫게 되고, 그곳은 작은 점이 아니라, 실은 이 우주 전체를 포용하는 무한한 지혜의 응축상태(우주의 불랙홀과 같은 점) 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 존재핵점이 바로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가 말씀하시는 "내가 있다"상태이며, 어느 때는 화물(化物)이라고 한글번역된 경우도 있습니다. 화물(chemidal modulate)이라고 말한 의미는 그 점에서 다양한 파동성이 변화하여 삼라만상과 온갖 망상을 만들어 낸다고 해서, 화학작용처럼 의식의 파동성 주파수 형태로 다양한 움직임의 변화(變化)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해서 화물(化物,chemical modulate)이라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이 "내가 있다"를 확실히 이해해야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나 라마나 마하리쉬가 말씀하시는 "내가 있다"에 대한 말씀들을 오해없이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분들이 말씀하시는 "내가 있다" 또는 "내가 있다"앎은 단순히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나 '내가 깨어있다'는 느낌, 또는 육체가 살아있다는 느낌 같은 것이 아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나 감각적으로 인식되는 그런 느낌은 의식의 대상으로 알려진, 내면으로 부터 비추어져 나타난 그림자들이지만, 마하리지가 말씀하시는 "내가 있다"는 마음의 대상으로 알려지는 느낌이 아니라, 마음으로는 알려지지 않는 "내가 있다"는 존재의 순수원본 또는 의식의 거친 파동성으로 분화 되지 않은 순수의식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내가 있다"를 명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라마나 마하리쉬와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의 책으로 공부하는 일반 구도열망자들은 수십년 동안 그 책들을 수십번씩 반복해 읽어보아도 읽는 순간에만 잠깐 이해하는 듯하다가도 이내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다시 또 그책을 꺼내 읽고, 또 읽어 보아도 더 이상 어떤 진전은 없고, 그 동안 배운 것은 말과 개념만 배워서 남한테 말할 때는 진짜 깨달은 도인처럼 청산유수처럼 그럴 듯합니다.

위의 제목처럼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가 말씀하시는 "'내가 있다"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은 말 그대로 "내가 있다"는 알려진 느낌에 머물러 있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있다"는 모든 생각이 나오기 이전상태를 말하는데, 그것은 보통 분별마음상태에서 바라볼 때는 "모름"의 상태입니다. 그 "모름"이라는 것이 "앎"에 반대되는 이원적인 "모름"이 아니라, 자기 존재조차 느끼지 못하는  "앎"과 "모름"의 공통바탕(중도적 모름) 또는 전체배경을 말합니다.


그럼 처음부터 보통 무지한 사람이 이 분별의식을 초월한 "모름" 속에 어떻게 머무를 수가 있겠는가? 처음엔 어렵죠. 그래서 처음에는 집중수행같은 분별망념을 차단하는 수행을 합니다. 그런 것들이 만트라,호흡집중수행같은 것입니다. 만트라나 호흡집중,위바사나,염불수행을 오랫동안 꾸준히 하다보면 마음을 한 곳에 의식의 집중을 뫃을 수 있는 힘이 생기고, 그 집중의 힘으로 쓸데없는 망념과 업습들을 정화하고 차단하고 나면 저절로 내면으로부터 주시하는 빛이 밝아져서, 비추는 지혜의 힘이 나타납니다. 이 비춰보는 지혜 힘이 점점 밝아지면 모든 생각과 사물에 대해서 주시하는 지혜가 계발되고 그 밝은 지혜의 힘으로 회광반조(廻光返照)하여 되비쳐보는 자각(自覺)능력이 강해집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회광반조하는 능력이 강해지고 안정되면 모든 삼라만상과 자기 육체,마음이 대낯의 달빛처럼 희미해지고, 저절로 깊고 푸른 빛의 절대바탕, 즉 참나의 바탕이 바로 본래의 참된 자신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것을 간단하게 비유해 보자면, 연못에 비친 달 또는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볼 때에, 개별적인 경계상, 즉 연못에 비친 달 그림자만, 거울 비친 자기 얼굴 모습만 볼 줄 알지, 달 그림자 자체가 물 위에 비친 대상경계라는 사실과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모습이 사실은 거울 자체라는 것을 모르는 무지한 중생마음상태인데, 이때를 보통 이원화 분별마음상태라고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이때는 진짜 달인 줄 알고 달을 건지러 연못물 속으로 들어가거나  거울 속의 얼굴을 자기 자신이라고 굳게 믿고 자만감에 푹 젖어있는 착각상태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 연못에 비친 달이 단순히 반사되어 비쳐진 달 그림자라는 사실을 알고,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이 반사된 얼굴이 단순히 거울의 반사상(像)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가 바로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때는 거울면이나 연못물에 반사된다는 자각을 하고 있을 때이며, 말하자면 이 세상 삼라만상이 바로 하나의 의식에 비친 그림자들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깨닫게 되는 때라고 비유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 다음 마지막 단계는 물도 없고 달도 없고, 거울도 없고 자기얼굴도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때라고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삼라만상이나 자기 육체 마음, 남의 육체 마음 , 의식, 그런 것들은 모두가 헛된 환상의 그림자이고 , 그저 있는 것은 오직 절대 공(空)이라는 무심(無心)상태에 안정되 있는 것으로 비유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 다음 단계는 그 절대 진아의 깨달음을 다시 세상으로 회향을 하는데 다시 이 무지한 중생세계로 내려와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보통 사람들을 깨달음 세계로 인도하는 자비심을 활용해서 세상에 깨달음의 광명을 남모르게 비춰주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