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시간이란 하나의 관념일 뿐이다.

무한진인 2017. 5. 22. 10:18



: 지고의 영(靈)은 가장 미세한 것보다 더 미세하고 가장 큰 것보다 더 크다" 고하는 우파니샤드 문구가 있습니다.

마하리쉬 : 원자의 구조조차도 마음이 발견했습니다. 따라서 마음은 원자보다 더 미세합니다. 마음, 즉 개인적 영혼의 이면에 있는 것은 마음보다 더 미세합니다. 더욱이 타밀 성자인 마니까바짜가르(9세기 타밀성자)가 햇살 속에서 너울거리는 티끌들에 대해 이야기한 바로는, 만약 그 티끌 하나가 우주 하나를 나타낸다면 햇빛 전체는 지고의 존재를 낱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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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을 떠난 영혼에 관한 질문들과 관련하여 마하리쉬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자기 몸과 동일시 하는 한, 거친 현상계로 물질화 된 생각도 그에게 실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육신이 다른 물리적 존재로부터 나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저승도 그 자신의 육신만큼이나 참되게 보입니다. 여기에 한번 존재했기 때문에 그 영혼은 확실히 육신의 죽음 뒤에도 살아남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식들이 아직 살아 있으면서, 그가 저승에 태어났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저승 세계도 참됩니다. 그리고 육신을 떠난 영혼들은 (자식이나 친지들이) 그들을 위해 해주는 기도의 덕을 봅니다.

한편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 보면, 단 하나의 실체가 있을 뿐이며 이것이 진아입니다. 이 진아에서 에고가 솟아나왔는데, 이 에고는여러 전생에 습득한 성향들(原習)의 씨앗을 그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진아는 에고와 그 성향들, 그리고 거친 감각기관들을 비추는데, 그러면 그 성향들은 감각기관에게 우주로 물질화 되어 나타나고, 진아의 반영인 에고가 그것을 지각할 수 있게 됩니다. 에고는 자신을 그 육신과 동일시하면서 진아를 보지 못하게 되고, 이러한 부주의의 결과는 캄캄한 무지와 현생의 불행인 것입니다.

에고가 진아에서 일어나 그것을 잊어버린다는 이 사실이 바로 탄생입니다. 그래서 개인이 탄생하면서 어머니(진아)를 죽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자식이) 자기 어머니를 되찾고 싶은 것은 실제로는 진아를 되찾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깨닫는 것, 혹은 에고의 죽음과 같은 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어머니에 대한 순복(順伏)이며, 그래야만 어머니가 영원히 살아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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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자 : 명상을 하기에는 어느 때가 가장 좋습니까?

마하리쉬 : 시간이 무엇입니까?

방문자 :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마하리쉬 : 시간이란 하나의 관념입니다. 실재만이 존재합니다. 그것을 뭐라고 생각하든 간에 그것은 그대가 생각하는대로 보입니다. 그것을 시간이라고 하면 시간이고, 존재라고 하면 존재인 식이지요. 그대는 그것을 시간이라고 부른다음, 그것을 낮과 밤, 월,년, 시간,분 등으로 나눕니다. 시간은 지(知)의 길에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규칙과 규율(명상시간 등) 중 어떤 것은 초심자들에게 좋습니다.

방문자 : 지(知)의 길이란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 마음의 집중은 어느 면에서 지(知)와 요가에 공통됩니다. 요가는 개인이 보편자, 즉 실재와 합일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 실재는 새로운 것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도 존재할 수 밖에 없으며, 실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知)의 길은 분리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발견하려고 합니다. 분리는 실제로부터의 분리일 뿐입니다.

방문자 : 환(幻)은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 누구에게 그 환(幻)이 있습니까? 그것을 발견하십시오. 그러면 환은 사라집니다.

흔히 사람들은 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면서도 그것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알아보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일이지요. 환은 밖에 있고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찾는 자'는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안에 있습니다. 멀리 있는 모르는 것을 발견하려 하지 말고, 즉유(卽有)하고 (바로 자기에게 있고)  가장 친숙한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십시오.

                                                                                            -라마나 마하리쉬 대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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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閑] ​

위의 문장들은 라마나 마하리쉬 대담록을 보면서 명상수행에 도움이 되는 대담부분만 부분별로 발췌해서 올렸습니다.

위의 글 중에서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나오는데, 시간은 한마디로 말해서 환(幻)의 기본 요소입니다. 이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고 여겨서, 시간 때문에 "나"라는 개아가 생기고, 시간 때문에 주관과 객관이 갈라지고, 시간 때문에 온갖 번뇌망상이 일어나며, 시간 때문에 이 세상에 다양한 움직임과 온갖 다양한 형상들이 보이고, 시간 때문에 절대세계가 상대세계로 변환되어 보는자와 보는 대상으로 나누어지면서 육체동일시되는 '나'라는 개체적 자아의 환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시간이 바로 부처가 말하는 고통(苦)이고, 아드바이타 베단타에서 말하는 마야 또는 무지(無知)인 것입니다. 시간이 없으면 그것이 바로 절대진아, 무아상태, 깨어있음, 성인의 상태가 됩니다.

이 현상계의 주시자인 절대 진아 또는 무아는 시간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절대진아를 덮어 가리는 것이 바로 "나"라는 망상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시간이 실제하다고 여김으로써 시간을 따라 다니고,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고, 자기를 보는 주체라고 여기면서 자기 육체 이외의 다른 것은 모두 남(他)라고 여기면서 이원적 분리감이 생김으로서 원래의 절대상태의 참나를 잊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가 시간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가장 큰 죄인은 이 "시간"이라는 괴물입니다. 만일 시간이 없다고 확신하고 "지금 현재"에만 있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개인이 사라지고 전체가 된  절대진아상태이 성인이 됩니다.

그러면 이 시간이라는 것이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일까? 시간이란 바로 생각일 뿐이고 실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바로 제가 30대 초반부터 30여년 동안 끊임없이 탐구해온 가장 큰 정신적 과제 중의 하나였습니다. 결국은 베단타에서 말하는 절대진아,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상태, 여래, 아뇩다라샴막삼보리, 깨달음 ,무심(無心),무상 (無相), 무작(無作), 이런 단어들로 표현되는 비이원적인 깨달음의 절대상태가 되어야  이 시간의 영향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간이 바로 부처가 말하는 원천적인 고(苦),生老病死의 괴로움입니다. 그 생노병사의 고통을 주는 시간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불교의 사성제(四聖諦,苦集滅道) 식으로 말하면 고성제(苦聖諦)가 <시간>이라고 할 수 있고 집성제(集聖諦), 즉 시간이 생겨난 원인은 무엇일까라고 몇십년동안 추적한 결과가 바로 우리의 의식이 기본적으로 파동성을 가지고 있고, 그 의식의 파동성 속에서 만들어진 파동의 한주기(원 싸이클)가 바로 시간의 기본 씨앗 요소라는 이치를 나름대로 혼자서 사색(思索)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처음에 시간이 없던 절대상태에서 한 움직임이 불쑥 일어나서, 그 한 움직임으로 인해 진동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데, 그 처음 일어난 진동상태는 바로 무지가 처음 일어나 절대상태를 가로 막는 파동성 막(幕)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 파동 움직임의 반바퀴, 즉 파동의 반 주기가 바로  시간을 만드는 씨앗이고, 시간의 움직임에 이끌려서 나온 절대상태가 바로 공간이다라는 나름대로의 사색결과를 얻어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절대상태에서 처음으로 생긴 미세한 파동상태에서 시간과 공간의 씨앗이 생긴다는 가정을 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절대상태에서 처음 만들어진 미세한 진동상태는 우리 존재들에게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그것은 바로 인도 베단타에서는 마하마야, 즉 불교식으로 말하면 무명(無明),무지(無知)가 처음 시작되는 상태인데, 그 자체가 원천적인 (우주적)존재의식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즉 이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의 미세한 파동이 생긴 것이 바로 우리의 우주적 존재의식의 탄생이며 절대진아를 아는데 장막을 친 장본인인 무지, 무명, 마야입니다. 이 우주적 존재의식만으로는 몸이 없어서 아직 인식상태가 없는데, 이 존재의식으로부터 시간과 공간과 사람이 현상화되어 나타나 인식기관을 통해서 사람이 자기가 존재하고 있고, 세상이 있다는 인식이 비로소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요지는 시간의 흐름이 바로 부처가 말씀한 고(苦),괴로움이며, 그  고(苦)인 시간의 원인이 바로 의식의 파동움직임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파동은 절대 바탕에서 나왔으므로, 사성제(四聖諦)의 멸도(滅度), 즉 의식의 파동성을 잠재우려면 마음의 움직임을 안정시켜야 되는 것인데, 이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키는 수행, 즉 사성제의 마지막 도제(道諦)는 수행을 해서 삼매에 들어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켜서 의식의 파동성을 잠재우는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석가모니 부처가 처음 깨닫고 나서 가장 먼저 옛날에 자기와 같이 요가수련을한 오비구들에게 가르침을 펼친 내용인 사성제, 즉 고집멸도(苦集滅道)를 제가 나름대로 옛날에 사색했던 '시간의 원인'인 의식의 파동성의 비유를 들어서 한번 이야기해 본 것입니다. 제가 과거에 탐구해 왔던 정신 수행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기본적인 개념을 곁들여서 간단하게 이야기해 보았는데, 이런 이야기에 너무 원리적 개념으로 심각하게 중요성을 둘 필요가 없고, 무료한 시간 보내기 위해서 지나가는 한담(閑談) 또는 여담(餘談)으로 그냥 잠깐 이야기해 본 것이므로, 읽어보고는 머리 속에서 바로 지워버리고, 고정된 개념으로 머리속에 담겨 두시지 마시고 그냥  흘려 버리시기 바랍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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