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몸이 참되다고 하는 개념에 말려들지 말라.
일체의 생명기운이며, 달리 아무 것도 아니다.
생명기운 짜이타니야(意識)가 그 자신을 표현할 때, '바람'이 된다.
우리는 바람의 신에게 예배하고, 불의 신에게 예배하고, 물의 신에게 예배하고, 흙의 신에게 예배한다.
짜이타니아가 그 자신을 표현할 때, 우리는 그것에 많은 이름을 부여해 준다.
어떤 것의 결과인 것은 본질적으로 그 '어떤 것'의 성품을 갖는다.
생명기운의 현현인 것은 생명기운일 뿐이다.
아내와 자식들은 모두 생명기운일 뿐이지만, 우리는 그들을 마야, 곧 환(幻)으로 부른다.
그것은 개념적이고, 그래서 마야라고 부른다. 또 개아라고도 부른다.
그것은 이 모든 환(幻)이 거짓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 거짓된 것 안에 일부 좋은 것도 있고 일부 나쁜 것도 있다.
사람들은 심지어 어떤 금 장식구가 좋으니 나쁘니하는 말도 한다.
사물을 좋다, 나쁘다고 부르는 이러한 습은 기본적인 것에도 해당될 수가 있다.
생명기운이 기본적인 것이고, 그래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한 여자가 딸, 아내,형수,형부,누이,숙모,이모,고모,할머니, 증조할머니 등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무앗인가? 단 한가지가 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
신은 많은 형상을 취하는데,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구도자라고 한다.
신 칸도바(인도 마하라쉬트라 주에서 널리숭배되는 시바신의 한 형태) 의 황금상과 돼지의 황금상은 금이라는 면에서는 동일하다. 그 가격이 일 그램당 같기 때문이다. 가격은 기본 금속과 관계되고, 가치는 기본 금속에세 부여된다.
진정한 가치는 원물(原物)과 관계된다. 그 물건이 다양한 형상을 취하면서 전체 게임이 진행된다. 그것은 오락이다.
한가한 시간에 즐기는 상상의 유희인 것이다. 그것을 장난질하는 태도이며, 재미의 관념이다.
이익이냐 손해냐, 좋으냐 별로냐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의식의 즐김이다. 그것에 대해 서운해 하거나 즐거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냥 의식의 즐기는 기분이다.
그러나 이것을 진짜라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슬픔의 바다에 떨어진다. 사물과 숫자들은 상징적인 정서적 개념이다. 어떤 특정한 사물, 사람 혹은 장면도 실재성이 없다. 그것을 실재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바보다. 실제로 그는 완전히 미친 것이다. 그런 미침이 성자들과 친교하면 소멸된다. 그럴 때 우리는 부라만을 온전히 즐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모든 경험의 토대에 있는 상태 안에 머무르면서 변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세공인은 금의 가격에 관심이 있지, 그 금이 신의 형상이냐 돼지의 형상이냐에는 관심이 없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관점이다. 환(幻)은 사물들의 형상이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존재에서 단일한 의식을 보는 사람이 성자이다.
이것이 가톳까차(Ghatotkacha)의 환(丸)이다. 가타(ghata)는 형태를, 웃까트(utkat)는 최선 혹은 참된 것을 뜻한다.
나타나는 어떤 사물이 참되거나 실재하는 것으로 여겨질 때 그것이 환(幻)이다.
여기서 가트는 우리의 몸이다. '우리는 이 몸이고, 그것은 나 자신의 존재다. 나는 몸으로 나타나 보이는 이대로의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우리의 환(幻)이다. 그것이 마야이다. 내 몸의 유용성, 내 몸의 뚜렸한 면모, 그리고 이 몸이 나에게 유용하다는 개념은 환이다. '장래에 나는 이 몸으로 이익을 얻을 것이다. 그 장래를 위해 나는 열심히 일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쾌락을 누리고 싶다'는 개념,그리고 이런 관념으로 모든 일을 하는 사람은 가롯차카 마야(몸이 참되다고 하는 幻)에 말려든다. 이 모든 환은 가타, 즉 우리의 몸에서 일어났다.
고대의 이야기에서 주 크리슈나가 헌신자들에게 말했다.
"어떤 새로운 것도 붙들지 말라. 그대들이 가지고 있는 오래된 것들이 참되다."
여기서 오래 되었다는 것은 처음 또는 원래의 것, 즉 모든 것의 안에 거주하는 '하나'를 의미한다.
그것이 브라만이다. 그것과 함께 머무르라.
가톳까차는 사람들에게 새 옷, 새 장신구를 가지라고 하면서 낡은 옷과 낡은 장신구를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사람들은 욕심이 나서 아름다운 새옷과 새 장신구를 받고 그들의 오래된 옷과 장신구를 다 주었다.
나중에 기이하게도 그 새것을 받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들의 손과 발이 고통스럽게 옥죄었고, 많은 사람들이 미쳤으며, 많은 사람들이 기억을 상실했다.
어떤 경우에는 그들의 입고 있던 옷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되어 벌거숭이가 되었다. 머리쓰개들이 사라졌고, 어떤 사람은 상의를 잃어버렸으며, 장신구들의 절반이 사라졌다.
어떤 사람들은 벌거숭이였기에 몸을 숨기기 시작했고, 숨을 곳을 찾아 여기 저기 뛰어다녔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수모를 당했다. 그 사람들이 새 옷을 받기 위해 옷을 교환할 때, 주 크리슈나가 좀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몸을 보이지 않게 한 채 사람들에게 그 새 옷을 받으면 안 되며, 그것은 모두 가톳까차의 요술이라고 경고해 주었다.
그들에게 자기 물건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고, 가톳까차가 그들을 속이면서 그들에게 사악한 마법을 걸고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크리슈나의 조언을 귀담아 듣지 않았고, 그래서 웃음꺼리가 되었다.
실로 가장 오래된 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 곧 진아이며, 이것은 어떤 새로운 경험보다도 이전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포기하면 안되는 금(金)이다. 오래된 것이든 새 것이든 일체는 의심할 바 없이 생명기운일 뿐이지만, 그것이 새롭다고 해서 새 것에 속으면 안된다.
형성된 것은 멸한다. 주(主) 시바가 악마인 바스마아수라에게 매일 재를 좀 가져 오라고 했다. 그 말의 의미는, 시바는 모든 것이 불에 타서 신성한 생명기운으로 돌아가는 것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눈에 보이는 전 세계는 결국 큰 신인 마하데바(시바) 속으로 들어간다. 현대 과학은 공기가 모든 생명체의 기원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그 넘어를 탐색하지 못했다. 그 넘어에는 브라만이 있지만, 화학을 통해서는 과학이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한다. 두 가지가 한데 모이면 제3의 어떤 것이 형성된다 목수와 목재가 한데 모이면 의자가 만들어진다.
인간의 힘을 바지가리(Bajigari), 곧 새로운 사물을 만들어내는 힘이라고 한다. 악마들이 계발하는 창조력은 워둠바리(Wodumbari)라 하고, 세계를 창조하는 신의 힘은 창조력이라고 한다.
이 세 가지 모두를 패배시키는 자를 브라만을 아는 자라고 한다.
새로운 것들을 건립하거나 창조하는 힘 모두가 어느 면에서는 최면술의 힘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미혹을 창조하는 기술이다. 이 창조된 형상들이 실재하며 영원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바보이다. 그는 거듭 거듭 태어나고 죽을 수 밖에 없다. 세 가지 창조 유형 모두에 매혹되지 않는 사람은 전능한 신과 같다. 창조의 세 과정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넘어서서 빠라마트만의 옥좌에 앉는다. 브하바(Bhava = 존재계)는 창조된 바다를 의미하고, 여러분은 그 바다 속의 고기다. 미끼를 물지 않음으로써 이 바다를 넘어서야 한다. 만일 그 고기가 자신이 바다라고 생각하면 그는 바다이다. 그는 물로 만들어졌다. 눈에 보이는 일체가 빠라마트만에서 생겨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 환에서 벗어나 있다. 이것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지(知)이다. 자나까 왕은 이 올바른 지(知)를 이해하고 기뻐했다.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 올바른 질문을 하고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영리한 사람이다.
자나까 왕이 물었다. "부디 저에게 브라만이 무엇인지, 누가 브라만, 바수데바, 빠라마트만, 나라야나로 불리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거기서부터 이 모든 것이 창조된 그것을 브라만이라고 한다. 산스크리트어로 빠다르타(Padartha)라는 단어는 한 가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빠다((Pada)는 용어 혹은 말이고, 아르타(artha)는 그 용어의 의미를 뜻한다.
자나까가 던진 이 모든 질문은 브라만과 관계가 된다. 그것이 아르타, 즉 그 용어의 의미이다.
우리가 '원초적인 것'이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단어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브라만이라고 불렸고, 인간은 이 브라만이라는 하나의 단어에 만족했다. 말하려고 한 모든 것을 그것이 다 갖추었기 때문이다. 크리슈나, 바가반, 비슈누 등은 모두 이 한 물건(One Thing)의 이름이다.
이제 이 한 물건의 성품을 들어보라.
만물의 토대로서 우주 안의 일체를 완전히 채우고 있는 것을 나라야나(Narayana)라고 한다.
베다에 통달한 리쉬들이 이를 나라야나라고 불렀다. 현자 삐빨라얀은 이렇게 말했다.
"오 왕이시여, 이 우주의 태초의 원인은 나라야나입니다. 그가 존재하지 않을 때는 우주가 해체됩니다. 그리고 존재하고 움직이며, 몸 안에서 기쁨에 가득 차 있는 자가 나라야나입니다. 몸을 창조하는, 그리고 그에 영향받지 않고 그 안에 머무르는 자가 나라야나입니다."
이 세계는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내가 말해주겠다.
잠을 자는 자, 꿈을 꾸는 자, 꿈 속에서 사물을 보며, 눈에 보이는 세계를 아는 자가 나라야나이다.
나라야나가 허공이 되자마자 거기서 그는 깨어났고, 세계가 생겨났다. 그것이 잠깐동안이든 오랜 시간동안이든, 나라야나는 생시상태의 경험이다. 그 경험은 그것을 원한다고 해서 또는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것을 원치 않는다고 해서 사라지지도 않고, 결코 경험자의 욕망에 의지하여 일어나지도 않는다.
세계는 하나의 자연적 현상으로서 생겨나고 사라진다. 이 모든 것의 경험자는 나라야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꿈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자가 나라야나이다. 꿈은 허구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자, 생시상태의 자각을 아는 자, 그리고 깊은 잠의 지복을 온전히 자각하는 자는 나라야나일 뿐이다.
모든 상태와 모든 경험을 인식하는 그것을 지고아(至高我) 빠라마트만이라고도 한다. 그는 의식의 위없는 찬연함이자 지고의 뿌르샤(지고의 형상없는 존재성)이며, 만물에 편재하는 나라야나이다.
이제 브라만의 상태를 깨닫는 쉬운 길을 이야기하겠으니 들어보라.
전체적인 그것, 전부인 그것을 보라. 파라마트만은 '옴' 소리 안에 있고, 그 소리는 여러분 안에 있다.
그의 힘으로 마음과 지성이 움직이는 그것이 빠라마트만이다. 이 나라야나가 여러분의 내면에서 별처럼 빛나고 있다.
나라야나는 모든 존재 안의 생명이다. 그는 모든 존재들을 움직이는 자이며, 깊은 잠 속에서는 물론이고 삼매 속에서도 깨어있다. 그는 세계의 주(主)로 불린다. 이 세계를 보는 자가 세계의 주이다. 그가 태초의 주(主)이다.
만약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콧속의 빈 공간이 어떤 항기도 맡지 못할 것이다. 그의 힘으로 여러분이 "내가 있다"고 말하는 그가 나라야나이다. 우리를 보호하는 그가 나라야나 신이다. 나라야나가 모든 행위의 행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