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그대 존재 안에 우주가 있지, 우주 속에 그대가 있는 것이 아니다.

무한진인 2017. 3. 1. 10:04



질문자 : 저는 길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숲을 헤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하리쉬 : 숲 속에 있다는 그런 생각이 사라져야 합니다. 문제의 뿌리에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생각입니다.

질문자 : 그러나 저는 길을 못 찾겠습니다

마하리쉬 : 그것이 그대의 안에 있지 않으면 숲이 어디 있고 길이 어디 있습니까? 그대는 본시 있는 그대로인데도, 숲과 길을 이야기하는군요.

질문자 : 그러나 저는 사회 안에서 움직여야 합니다.

마하리쉬 : 사회도 숲에 대한 생각과 비슷한 하나의 생각입니다.

질문자 : 저는 집을 떠나 사회로 나가 거기서 사람들과 어울립니다.

마하리쉬 : 누가 그렇게 합니까?

질문자 : 몸둥이가 움직이면서 모든 일을 합니다.

마하리쉬 : 정말 그렇지요. 지금 그대가 자신을 그 몸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문제를 느낍니다. 그 문제는 그대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대는 자신이 그 몸이라고, 아니면 그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대가 몸과 마음에서 벗어나는 때가 있지요. 예를 들어 깊은 잠이 들었을 때가 그렇고, 꿈을 꿀 때는 그대가 하나의 몸과 하나의 세계를 창조합니다. 그것은 그대의 마음활동을 나타냅니다. 생시의 상태에서는 자신이 그 몸이라고 생각하고, 그러고 나서 숲이라는 생각과 그 나머지 생각들이 일어납니다.

이제 상황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그대는 이 모든 상태에서 그대로 남아 있는 불변의 지속적인 존재입니다. 그 상태들은 부단히 변하고 따라서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항상 있습니다. 그래서 이 찰나적인 대상들은 마치 화막(스크린) 위를 움직이는 화상(영상)들처럼 그대의 존재 위에 나타나는 현상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화막(스크린)은 움직이지 않고 화상(영상)들이 움직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몸이 집을 떠나 사회에서 사람들과 어울릴 때도 그대는 자신이 있는 곳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대의 몸,사회,숲과 길은 모두 그대 안에 있습니다. 그대가 그것들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의 순수한 진아로 머물러 있으면, 몸과 그 움직임은 그대에게 영향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

질문자 : 그것은 스승의 은총에 의해서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저는 <스리 바가바뜨>를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서 말하기를 지복은 스승의 발에 묻은 먼지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잇다고 했습니다. 저는 은총을 기원합니다.

마하리쉬 : 그대 자신의 존재 말고 무엇이 지복입니까? 그대는 존재와 별개가 아닌데, 그 존재는 지복과 같습니다. 그대는 지금 자신이 마음이거나 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둘 다 변하고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변치 않고 영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대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질문자 : 그것은 어둠이고 저는 무지합니다.

마하리쉬 : 그 무지가 사라져야 합니다. 또 '나는 무지하다'고 말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무지를 바라보는 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본래의 그대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지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지혜입니다.

질문자 : 그러면 저는 벨로르에 있을 때는 불행을 느끼는데 당신의 친존에서는 평안을 느낍니까?

마하리쉬 : 이곳에서의 그 느낌이 지복일 수 있습니까? 이곳을 떠나면 그대는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 평안은 영구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다른 곳에서 느끼는 불행감과 섞여 있습니다. 따라서 그대는 어느 곳 어느 시간대에서나 지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이 쓸모가 있으려면 영구적이어야 합니다. 그런 영구적인 존재는 바로 그대 자신입니다. 진아가 되십시오. 그것이 지복입니다. 그대는 항상 그것입니다.

그대는 벨로르를 떠나 기차를 타고 여행하여 띠루반나말라이에 도착했고, 회당으로 들어와서 행복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벨로르로 돌아가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자, 그대가 여기서 저기로 이동합니까? 그대가 그 몸이라고 칠 때, 그 몸이 집 앞에서 달구지에 앉으면 달구지가 기차역으로 움직여갑니다. 그 다음에는 그 몸이 기차간에 타고, 기차는 벨로르에서 따루반나밀로 달려 갑니다. 거기서 그 몸은 다른 달구지를 타고, 달구지는 그것을 이곳에 데려다 줍니다. 그렇지만 누가 물어 보면 그대는 자신이 벨로르에서 그 먼 길을 왔다고 말합니다. 그대의 몸은 있던 곳에 그대로 있고, 그 모든 장소들이 몸을 지나쳐 갔는데도 말입니다.

그런 생각들은 거짓된 동일성에서 비롯되는데, 그것은 그토록 뿌리 깊습니다.

다른 질문자 : 우리는 세계를 일시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마하리쉬 : 왜 그렇습니까? 그대가 지금 그것을 영구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경전들은 그대가 그릇된 관념에서 떨어져 나오도록 하기 위해 그것이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대 자신이 영원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이지, 세계를 일시적이라고 낙인찍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질문자 : 저희는 무관심을 닦아야 한다고 배우는데, 그것은 세계가 실재하지 않아야만 가능합니다.

마하리쉬 : 그렇지요. "무관심이 바람직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무관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과 미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들은 진아의 위를 지나가는데, 그대가 진아를 깨달으면 그런 것들(세계의 대상들)을 사랑하거나 미워하겠습니까? 그것이 무관심의 의미입니다.

질문자 : 그렇게 하면 우리가 하는 일에 흥미가 줄어들 것입니다. 우리의 임무를 다해야 하지 않습니까?

마하리쉬 : 예, 물론이지요. 설사 임무를 다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육신이 그것을 하러 태어났으니, 그 임무를 완수하십시오. 스리 끄리쉬나도  <기타>에서, 아르쥬나가 원하든 않든 싸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대가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할 필요가 없을 때에는, 다시 말해서 그대에게 활당된 일이 다 끝났을 때는, 그 일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요컨대 일은 진행될 것이고, 그대는 그 중에서 자기 몫을 해내야 합니다. 그대에게 활당된 그 몫을.

질문자 : 그것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하리쉬 : 드라마에서 자기 역을 연기하는 배우같이 하십시오. -사랑이나 미움에서 벗어나서. ■

                                                                  -라마나  마하리쉬 대담록-   


[閑 談]

위에서 마하리쉬가 "그대 안에 세계, 숲,길이 있지, 세계 안에 그대가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로 말씀하셨는데,

말하자면 이 세상 우주 만물이 내 안에 있지, 이 세상 안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경지는 자기 육체라는 동일시를 벗어난 경지를 말하는데, 보통 구도자들도 마하리쉬 책이나 기타 불교경전 등을 반복적으로 많이 구독해서 믿음이 굳어 있으면 저절로 "우주삼라만상이 내 안에 있다"는 믿음과 느낌이 옵니다.

이 상태에 까지 오게되면 의도적인 유위적 수행보다는, 그저 수동적인 자세로 지나가는 모든 현상을 머물지 않고  관조하는 수행을 해도 됩니다.

또한 아직까지 온 세상, 모든 대상들이 내 안에 있다는 확신이 없는 구도 지망생이라도, 어떤 특정대상에 대해서 분별심이나 집착해서 머물지 말고, 수동적으로 말없이 바라보는 관조수행을 하면 모든 대상이 저절로 내 존재 안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보통 수동적인 자연주시행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눈 앞에 시계가 있는데, 시계를 볼 때에 보통은 "내가 시계를 본다"라고 여기는데, 이 경우는 "나"라는 행위 주체가 앞의 시계라는 대상을 선택해서 능동적으로 본다는 행위를 합니다. 즉 보는 자인 '나"가 유위적 행위를 하는 경우이지만, 수동적으로 본다는 것은 "시계가 보여진다"라는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내가 시계를 본다"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주체인 "나"가 능동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지만, "시계가 보여진다"라고 생각하면 "수동적인 행위"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보여진다"의 주체는 "육체적인 개체의 나"가 아니라, 육체적인 나도 보여지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는 주체는 '육체적인 나'이전에 있지만, 그것은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것을 편의상 (모양없는,알려지지 않은)주시자라고 한다면 모양이 없는 무엇인가가 "육체적인 나"와 " 시계"를 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알려지지 않고 모양도 없는 배면의 주시자(無)가 "육체적인 나","마음의 움직임" "보는 행위" "시계라는 대상"을 일시에 주시하고 있지만, "개체적인 내가 직접 보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개체적인 나"도 보여지는 대상이 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수동적으로 보여진다, 알려진다, 느껴진다. 들려진다. 식으로 태도를 바꾸면 점차로 "육체적인 나'는 점점 물러나서 에고가 점점 엷어지게 됩니다. 물론 다른 수행, 만트라나 염불, 호흡수련, 위파사나, 등 다른 수행을 할 때도 수행과 함께 항상 수동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자기를 깨어서 지켜본다면 그것이 서서히 알려지지 않은 주시자영역으로 향해서 들어 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때 갑자기 우연한 계기에 <덜컥 !>하고 발아래 땅이 천길 아래로 푹 꺼지는 듯, 또는 몸이 있다는 느낌이 사라지는 갑작스런 변화가 오기도 합니다. 또한 마치 항아리 밑바닥(궁둥이 밑)이 펑 뚫리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좌우지간 그런 어떤 모종의 체험이 오면서 몸이 없는 듯한 전체 허공과 하나가 된 듯한 체험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최종 깨달음은 아니지만, 이때부터 확실히 전체 우주 공간이 "내 안에 있다"는 확신이 다가오게 됩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하던 수행을 그만둘 필요도 없고, 내가 어떤 한단계 위로 올라갔다고 좋아할 처지도 아닙니다. 그런 좋아한다느니 그런 생각을 가지면 지금까지 수행한 공덕이 다 무효화됩니다. 그냥 아무 생각말고 더 정진해야 합니다. 임제스님 말씀처럼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같은 무위행을 할 수도 있겟지만, 아직 더 무르익을 때까지 하던 수행을 끊이지 말고 계속해야 합니다. 이쯤되면 세상 모든 보이고 들리는 대상들, 마음 속에서 초대받지 않은 망상, 느낌들조차도 모두가 회광반조(廻光返照)에 의해 공(空)으로 돌릴 수가 있습니다.모든 경계 대상들이 전부 평등한 공(空)으로 여겨지는 단계가 가까이 온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밥 먹고, 싸고, 걷고, 앉고 눞는 일상행위들 자체가 모두 무위적인 수행이 저절로 되는 때입니다.

본문 맨 밑에서  마하리쉬가 <그렇지요. "무관심이 바람직하다"고 했습니다> 마하리쉬 말씀에 <무관심해지다>라는 것은 어떤 대상에 대해서 좋다,나쁘다,또는 옳다 그르다 같은 분별생각을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금강경의 "머문바 없이 마음을 낸다"는 말과 그 의미가 같습니다. "머문 바 없다"는 것은 어떤 대상에 대하여 분별생각이나 판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마음을 낸다"는 것은 보기도 하고 듣기도하고 알아차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대상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나 분별심도 내지 않고 그냥 무심으로 보되 보지 않는 듯, 듣되 듣지 않는 듯, 대상을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느끼기도 하지만, 그냥 무심으로 흘려 보낸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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