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육체를 가진 개아(個我)가 바로 진아(眞我)이다.

무한진인 2017. 2. 9. 09:39


질문자 : 간디지가 이야기하는 것은, 생각들 자체가 낯선 것이 되는 상태가 아닙니까?

마하리쉬 : 그렇지요. 다른 모든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나'라는 생각이 일어난 뒤일 뿐입니다. 세계는 그대가 '내가 있다'를 느끼고 나서 눈에 보입니다. 그에게는 '나'라는 생각과 다른 모든 생각이 사라져 버렸던 것입니다.

질문자 : 그러면 그 상태에서는 몸의 느낌이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마하리쉬 : 몸 느낌도 하나의 생각이지만, 그는 "생각들이 오지 않는"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질문자 : 그는 또 "생각을 멈추는 데는 ​전혀 노력이 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하리쉬 : 물론 생각을 멈추는데는 전혀 노력이 필요없지만, 생각을 일으키는 데는 노력이 필요하지요.


질문자 : 저희들은 생각을 멈추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간디지도 생각은 신의 인도를 받는 데 하나의 장애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본래적 상태군요. 본래적이기는 하지만 깨닫기는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수행이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장애물이라고 합니다. 저희는 혼란스럽습니다.


마하리쉬 :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동안은 수행이 필요합니다. 수행이란 장애들을 종식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사람이, 수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력하다는 것을 느끼는 단계가 옵니다. 그러면 그렇게 소중히 여겨온 그 수행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 신의 힘을 깨닫게 됩니다. 진아가 스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질문자 : 만일 그 상태가 본래적이라면, 왜 그것이 비본래적인 국면들을 극복하고 - 나머지들을 누르고-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습니까?


마하리쉬 : 그것 외에 어떤 것이 있습니까? 누가 자기 외에 어떤 것을 보기나 합니까? 사람은 항상 자기를 자각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항상 그것 자신입니다.


질문자 : 그것이 빛나기 때문에 그것은 직접 지각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저는 그것이 직접지각으로 된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빛남이니까요.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저는 그것이 빛나지 않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것은 (보통의) 빛남일 뿐이고, 그래서 장애들을 인정하고 거기에 굴복합니다. 만일 진아가 아주 빛남이라면 그것이 그 나머지들을 누르고 빛나겠지요. 그래서 그것이 더 빛나게 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마하리쉬 :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진아는 한 순간은 흐릿하고 한 순간은 번쩍 거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변이며 한결같습니다.


질문자 : 그러나 (요가 바시슈타에서) 쭈달라는 시키드바자에게 자신은 (등불의) 심지를 정리하는 것을 도왔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마하리쉬 : 그것은 일여내관(一如內觀)을 말합니다.

청문(聽聞)에 의해 지(知)가 밝아 옵니다. 그것이 불꽃입니다.

성찰(省察)에 의해 그 지(知)가 사라지지 않게 됩니다. 불꽃이 바람막이로 보호되듯이, (성찰에 의해) 다른 생각들이 올바른 지(知)를 압도하지 못하게 됩니다.

일여내관의 의해 그 불꽃은 심지가 정리되어 계속 밝게 타오르게 됩니다. 다른 생각들이 일어날 때마다 마음은 참된 지(知)가 빛을 발하는 내면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되면, 그것이 삼매입니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탐구가 청문입니다.

'나'의 참된 의미를 확인하는 것이 성찰입니다.

이것을(일상 속의) 매 경우마다 실제로 적용하는 것이 일여내관입니다.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 삼매입니다.


질문자; 저희들은 그것을 그렇게 자주 그리고 그렇게 부단히 들어 왔는데도, 그 가르침을 실천하여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마음의 약함 때문인 것이 분명합니다. 나이 먹은 것이 하나의 장애일 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 보통은 맹렬하게 생각할 수 있으면 마음이 강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생각에서 벗어나 있을 때가 마음이 강한 것입니다. 요기들은 서른 살 이전에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지(知) 수행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지(知)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요가 바쉬슈타>의 '무욕장(無慾章)'에서, 바쉬슈타가 라마에게 "그대는 젊은데도 그런 무욕을 가지고 있소. 그것은 존경할만한 것이오." 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노인이라고해서 지(知)를 가질 수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노인이라고 그것을 갖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수행자는 자기로서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럴 수 없다면, '나'의 참된 의미를 확인하고, 다른 생각들이 일어날 때마다 부단히 그것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지(知)의 수행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가 '따뜨'(tat-그것)를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세계에 대한 관념이 부단히 일어나서 마음을 빗나가게 하는데, 만일 세계 이면의 실재를 먼저 확인하면 그것이 브라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뜨왐(tvam-그대)은 나중에 이해된다고 하는데, 그것이 개아(個我)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범아합일(梵我合一-개아와 브라만의 합일)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 이런 이야기를 다 합니까? 세계가 자기와 별개로 존재할 수 있습니까? '나'는 언제나 브라만입니다. 그 동일성을 논리와 실천으로 확립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를 깨달으면 충분합니다. 그것은 항상 브라만이니까요.

다른 학파에 따르면 일여내관은 '아함 브라마스미(나는 브라만이다)'라는 생각이 되겠지요. 그것은 생각을 브라만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도 돌려서는 안됩니다. 자기를 아십시오. 그러면 생각은 끝이 납니다.

자기를 아는데는 어떤 오랜 과정도 필요치 않습니다. 남이 그것을 지적해 줍니까? 누구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자기 손을 볼 수 없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누가 부르면 누구나 "나 여기 있소" 하면서 대답하지 않습니까?


질문자 : 그러나 그 '나'는 에고 또는 '나'라는 생각입니다. 남이 부를 때 대답하거나 기타의 경우에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절대적 자아가 아닙니다.


마하리쉬 : 에고조차도 빛, 시각 등이 없을 때 그 자신을 지각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진아의 순수한 빛이라면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저는 진아가 자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아를 발견하기 위해 범주들을 논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24가지 범주들이 있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더 많게 이야기합니다. 진아의 존재를 인정하기 전에 우리가 범주들을 알아야 합니까? 경전들은 범주들이 진아를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그것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그러나 구도자로서는 범주 연구에 의지할 것 없이, 곧바로 진아를 인정하고 그것이 되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질문자 : 간디지는 사띠아(진리)를 그렇게 오래 고수하더니 진아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마하리쉬 : 사띠아가 진아 아니고 무엇입니까? 사띠아는 사뜨(존재)로 이루어집니다. 또 사뜨는 진아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간디지의 사띠아는 진아일 뿐입니다.

누구나 자기를 알지만 그런데도 무지합니다. 사람은 '큰 말씀(mahavakya)을 듣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우파니샤드의 문구(큰 말씀)는 깨달은 사람들 누구나 자신의 체험이 거기에 부합한다고 말하는 영원한 진리인 것입니다. 자기가 브라만이라는 것을 듣고 나면 그 사람은 자기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자신이 거기서 벗어날 때마다 거기로 돌아갑니다. 깨달음의 전과정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라마나 마하리쉬 대담록-


[閑 談]

오늘 새벽에 곤한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에, 그 깨어나기 바로 전에는 "내가 있다"는 느낌을 몰랐습니다. 깨어나는 순간에는 "내가 있다"는 느낌이 일어나면서 의식이 깨어났지만, 처음에는 순간적으로 의식과 감각들이 작동을 하지 않아서 대상이 없는 전체적인 깨어남이 찰라에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 순간을 잘 모르고 지나가고, 깨어나자 마자 정신이 들면서 "내가 깨어났구나, 아 꿈도 없이 참 잘 잤네" 뭐 이런 개인적인 생각이 올라오면서 눈을 떠서 세상을 대상으로서 인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어젯밤에 잠들기 직전까지 만트라나 어떤 수행을 하다가 잠들었다면,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면서도 자기가 수행하던 만트라나 염불이나 화두가 마치 밤잠 안자고 계속 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잠을 자면서도 염불은 염불대로, 화두라면 화두가 계속 이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잠은 잠대로 자고 염불 수행은 염불 수행대로, 또는 화두수행을 계속 진행 했다는 것이죠. 말하자면 사람이 잠을 자고 있으면서도 "내가 있다"상태는 항상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마하리지가 말씀하시는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은 개인적인 느낌이 아니라, 우주적인 전체의식입니다.

그런데 소위 무지(無知,無明)는 바로 이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부터 시작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통 일상의식, 즉 이원화 대상세계에 있는 이 범부의식은 무지(無知)의 어둠에서 반사되었기 때문에 주(主)와 객(客)의 이원화(二元化)로 나누어진 의식인데, 이 개인 의식에서 안다는 것(分別知)은 무지인데, 이 무지가 바로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에서 비쳐진 것입니다. 따라서 생시일 때에는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은 전체 우주현상계가 바로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이 제8아뢰아 저장식의 기억종자들이 밖으로 현상화되어 비쳐져 드러난 것입니다. 내 존재의식이 현상화된 것이 바로 전체 우주 현상계입니다. 그러나 개인의식입장에서는 개인 '나'(自)와 세상(他)이 따로 떨어진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원래는 세상과 나가 "내가 있다"에서 하나인데, 개인의식에서는 이것이 이원화로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아탐구를 하여 나와 세상이 합일이 되면 나도 없어지고 세상도 없어집니다.

이 상태가 바로 "내가 있다" 존재의식의 뿌리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하리쉬가 말씀하시는 청문의 과정입니다. "나는 누구인가?"탐구는 "나는 누구인가?"를 의심하는 자와 그것을 듣는 자(주시자)가 하나로 합일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가 된 상태, 묻는 나가 사라진 상태를 더욱 안정되게 정착시키고 익숙해지기 위해서 라마나 마하리쉬는 "성찰"을 하라고 합니다. "성찰(省察)" 이란 바로 자각(自覺)을 더욱 다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각을 더욱 깊히 안정되도록 다지다 보면 저절로 삼매(三昧)상태가 도래합니다. 일여내관(一如內觀)은 일종의 삼매상태인데, 아직 유심(有心)의 흔적이 남아있으므로 깊은 유상삼매수준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겠습니다. 그 유상삼매상태가 더욱 깊어지다보면 자연무상삼매에 깊히 들어 갈 수 있습니다. 마하리지가 말씀하시는 최종 삼매는 바로 자연적인 무상삼매를 "삼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마하리지가 맨 마지막에 말씀하시는 진짜 깊은 뜻은 이러한 개인의식이니 존재의식이니, 하는 단계나 수준, 또는 범주로 나누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개인이니 존재의식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절대진아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육체를 가진 개아,그 자체가 바로 진아라는 것을 믿기만 하면 바로 진아가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진아로써 자명하기 때문에 구태여 범주나 단계, 수준을 나눌 필요없이 <지금 여기>서 모두가 형상없는 진아라는 것을 굳게 믿으면서 자신을 진아라고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돈오(頓悟)의 방법을 말슴하시는 것입니다. 강력한 믿음이 돈오, 즉 즉각적인 깨달음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복잡하게 여러가지 수준을 거쳐서 수행을 해서 진아를 깨달으려고 하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자기가 진아임을 스스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맨 밑에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큰 말씀>이라는 것은, <아함 브라마스미(aham brahmasmi -내가 브라만이다> 또는 <따뜨 뜨암 아시- 네가 브라만이다> 등, 우파니샤드에 실린, 고대부터 신이 말했다는 몇가지 만트라를 말합니다.

비이원론 베단타의 수행자들은 대부분이 이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신의 큰 말씀을 자기 스승으로 부터 받아서 그 만트라를 주로 암송하며 수행해서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수준까지 진입한다고 합니다.

이 큰말씀을 아주 신성한 만트라로 여깁니다. 그래서 일단 "내가 있다"수준까지만 도달하게되면, 진아의 의미를 스스로 발견하게 되어, 자신이 그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을려고 더욱 정진하여 결국엔 궁극의 진아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