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시간과 공간이 없을 때도 그대는 존재한다.

무한진인 2016. 11. 25. 20:09



영국인 방문객인 머스틴 부인 : 저는 <나는 누구인가?>를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나'가 누군지를 탐구하고 있으면 그것을 오래 붙잡고 있지 못합니다. 두번째로, 저는 환경에 아무런 관심이 없지만 그래도 삶에서 뭔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할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하리쉬 : 아무 흥미가 없다면 좋지요.[통역자는 질문자가 삶에서 어떤 흥미를 발견하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


마하리쉬 : 그것은 그런 원습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꿈꾸는 사람이 어떤 꿈을 꾸면서 쾌락, 고통 등이 있는 꿈 세계를 봅니다. 그러나 깨어나면 그 꿈 세계에 대한 모든 흥미를 잃어버립니다. 생시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꿈 세계가 그대 자신의 일부일 뿐이고 그대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거기서 깨어나면 더 이상 ) 그대의 흥미를 끌지 못하듯이, 현재의 세계도 만일 그대가 이 생시의 꿈(윤회계)에서 깨어나, 그것이 그대 진아의 일부이지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 (더 이상) 그대의 흥미를 끌지 못할 것입니다. 그대는 자신을 주위의 대상들과 별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사물을 욕망합니다. 그러나 그 사물이 하나의 상념 형상(thought-form, 생각의 파동으로 만들어진 형상(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더 이상 그것을 욕망하지 않게 됩니다.

모든 사물은 물 위의 거품과 같습니다. 그대는 물이고  대상들은 거품입니다. 그것들은 물과 별개로는 존재할 수 없지만, 물과 아주 같은 것은 아닙니다.

질문자 : 저는 제가 거품덩이 같다고 느낍니다.

마하리쉬 : 비실재와의 동일시를 그만두고 그대의 참된 정체성을 아십시오. 그러면 확고해질 것이고 어떤 의심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질문자 : 그러나 저는 거품덩이입니다.

마하리쉬 :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까 근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상상입니다. 실재와 그대는 동일하다는 진실을 받아들이십시오. 물 자체가 될 것이지 물 위에 떠있는 거품덩이가 되지 마십시오. 그러자면 (마음의) 내면으로 뛰어 들면 됩니다.​

질문자 : 만약 안으로 뛰어들면 , 제가 발견하겠지요 - - -.

마하리쉬 : 그러나 안으로 뛰어들지 않아도 그대는 그것입니다. 안과 밖의 관념은 그대와 진정한 (실재와의) 동일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동안에만 있습니다.

질문자 : 그러나 저더러 안으로 뛰어들기를 바라시는 그 뜻은 제가 받아들였습니다.

마하리쉬 : 예, 아주 좋습니다. 제가 그 말을 한 것은 그대가 자신을 거품덩이와 동일시하지 물과 동일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혼동 때문에, 그대의 주의를 그 혼동에 기울이게 하여 그것을 명심하도록 하려고 그런 대답을 했습니다. 거기서 말하려고 한 것은, 진아는 그대가 보는 모든 것을 포함하여 무한하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것을 넘어서거나 그것과 별개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알면 어떤 것도 욕망하지 않게 될 것이고, 욕망하지 않으면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진아는 항상 깨달아져 있습니다. 이미- 항상- 깨달아져 있는 것을 깨달으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자신의 존재성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존재성이 의식, 곧 진아입니다.

만일 그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질문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대는 자신의 존재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존재성이  진아입니다.  그것은 이미 깨달아져 있습니다. 따라서 깨달으려는 (그대의) 노력은, 그대가 자신의 진아를 깨닫지 못했다고 여기는 현재의 착각을 깨닫는 결과가  될 뿐입니다. 새로운 깨달음이란 없습니다. 진아는 (자연히) 드러나게 됩니다.

질문자 : 그렇게 되려면 몇년이 걸리겠지요.

마하리쉬 : 왜 몇 년입니까? 시간관념은 그대의 마음 안에 있을 뿐, 진아 안에는 없습니다. 진아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은 에고가 일어난 뒤에 하나의 관념으로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대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진아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없을 때에도 그대는 존재합니다.(625)

                                                               -라마나 마하리쉬 대담록-  ​

- - - - - - - - - - - - - - -

[閑 談]

내 눈 앞에 무엇인가가 보인다는 것은 그것이 나와 어떤 연관이 있기 때문에, 내 눈 앞에서 보이는 것입니다.

우선 보는 내가 있고, 눈 앞에 책이 있다면, 나와 책의 관계는 보는 자와 보여지는 대상의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보는 자인 나와 보여지는 책을 둘 다 알고 있는 무엇인가가 틀림없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내가 있는 줄을 모르므로 따라서 책도 없는 것이죠. 또한 내가 있다는 것을 알고 대상인 책이 있다는 것을 둘 다 알고 있는 <그것>은 뭔지는 모르지만, 좌우지간 '내가 책을 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눈앞의 책을 보고 있을 때는 '책과 나'는 같은 하나의 앎(의식)의 테두리 안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와 내 주변의 세상은 보는 자와 보는 대상의 관계이지만, 한 테두리(의식 또는 존재) 안에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는 자와 보여지는 관계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대상이 성립될려면 동일성의 시공 차원 안에서 동시에 같이 존재해 있어야 합니다. 마치 우리 몸에서 팔과 다리가 한 몸에 붙어 있지만 따로 따로 움직이는데, 팔과 다리가 서로 다른 존재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보는 자와 보여지는 대상은 한 테두리 안에서 서로 관계하므로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크게 보아서 한 테두리 안에 있으니까요. 광진구나 영등포구나 다 같은 서울시 테두리 안에 있는데, 서울시 입장에서 보면 광진구나 영등포구나 전부 서울시 일 뿐입니다. 사실 광진구 입장에서 보아도 영등포구는 서울시이고, 영등포구입장에서도 광진구는 서울시입니다.

그래서 보는 주체와 보여지는 대상은 동일한 테두리 안에 있으므로 보여지는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며, 나와 세상은 바로 동일한 존재 안에서 이름과 모양만 다릅니다. 따라서 (큰)나는 이 모든 보여지는 우주삼라만상입니다. 이것이 작은 육체의 나라는 경계를 벗어나서 우주적 큰나가 되는 자세입니다. 큰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나는 현상계의 우주전체와 그 넘어 보이지 않는 경계넘어도 모두 나 자신인 것입니다.


위 본문의 마하리쉬 대화록에서 <진아는 그대가 보는 모든 것을 포함하여 무한하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것을 넘어서거나 그것과 별개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마음자세를 꾸준히 유지해 가면서 마음속에 단단하게 다지는 것이 마음 수행입니다.

마음을 안으로 향하라는 마하리쉬의 말씀은, 마음의 내면은 아무 것도 모르는 침묵상태를 말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자기 내면으로 물어보면 무슨 답이 나옵니까? 아무 대답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므로 마음이 저절로 침묵하게 됩니다. 그 침묵상태, 즉 무심(無心)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마음을 안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을 안으로 향하려더 보니깐, 원래 살아오면서 수많은 생각의 쓰레기들이 저장되고 업습들이 저절로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자꾸 생각이 밖으로 싸 돌아다닐려고 하니깐,이놈의 불안정한 마음을 다 잡게 위해서 명상이니 위빠사니나, 간화선이니 하는 것을 만들어서 마음을 내면에 붙잡아드려고 애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하리쉬가 가르쳐 주신대로 "나는 누구인가?"하고 내면을 향해서 단순하게 묻고 물어서 마음을 침묵하게만 안정시키고, 그렇게 계속 인내심있게 유지하기만 하면,자연스럽게 안정된 무심상태가 바로 마음의 바탕인 진아 상태입니다.


마음 수행의 첫단계는 이렇게 나와 세상이 모두 하나라는 느낌과 믿음을 단단히 다져서 자연스러운 무심상태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체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며,여기에서 대승보살적인 자애심이 다 나옵니다.

수행의 두번째 단계는 이 나와 세상이 하나라는 생각과 느낌조차도 완전히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의 마지막 단계인 절대 깨달음의 참나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여기서 다시 중생세계로 회향을 합니다. 즉 절대깨달음을 증득한 후에 다시 이 중생세상에 내려와서 중생과 똑같은 생활을 하면서 표 안나게 중생을 제도합니다. 이것이 대승불교가 주장하는 보살도입니다.진짜로 옳게 깨달은 도인은 보통사람과 똑같아서 도인이라는 표시가 안납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 속세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고 느끼는 중생으로서 물거품입니다. 물거품은 물과 거품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품이라고만 생각하지, 바탕에 있는 물은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물이라고 하면 그것은 모양없고 알 수없는 절대진아를 말하고, 그 모양없고 알수 없는 물 위에 정처없이 둥둥 떠내려오는 거품, 이 보고 알 수 있는 현상세계, 몸, 마음, 감각심리작용 등이 바로 거품을 비유합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알 수 있는 것만 관심을 가지고 실재한다고 여기고 있는데, 사실은 이 모든 현상계와 몸 마음은 거품같이 잠시 부풀어 올라서 보이는 물방울 거품과 같은 것들일 뿐, 거품이 떠 있는 물, 보이지 않고 알 수 없지만 진짜 실재인 바탕에는 관심을 안줍니다.

그래서 거품이 그 거품이 생겨나온 물바탕을 알려면, 내면으로 마음을 향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자신에게 묻고, 묻지만, 대답은 오직 컴컴하게 알수없는 침묵만 있는 그 바탕(물)에 안정되게 마음을 안착시켜서, 바로 자신이 진아 그 자체(물,침묵)임을 스스로 자각(自覺)하라는 것입니다. 이 완전한 자각(自覺)상태에 안정되는 것이 바로 진아 깨달음입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