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하는 자를 명상하라
마하리지 : 여러분은 인도를 함께 돌아다니고 있나요?
질문자 : 예, 저희들 중 몇 명은 하타 요가를 공부하고 있고, 저희는 또 스리 라마나스라맘에도 가서 명상을 했습니다.
마하리지 : 둘씩 혹은 몇 명씩 함께 몰려서 다니는 것도 재미는 있겠지요. 진정한 탐구는 홀로 하는겁니다. 여러분이 하타 요가를 수련하고 싶다면 어디 다른 데로 가 보아야 합니다. 명상을 하려면 라마나스라맘으로 돌아가시오. 거기는 아주 좋은 곳이오. 여기서는 우리가 하타요가가 아니라 지(知) 요가를 합니다.
질문자 : 하지만 그것을 배워 두면 마음을 제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마하리지 : 아뜨만이 존재할 때만 마음이 있소. 마야는 아뜨만의 언어요.
질문자 : 아뜨만은 생각하는 자입니까?
마하리지 : 아뜨만은 지켜보는 자이고, 마음과 생기는 활동하는 자일 뿐이요.
질문자 : 그것들이 하나가 될 수가 있습니까?
마하리지 : 그대가 자신을 몸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것들이 따로 따로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오.
질문자 : 업의 지식은 어떻습니까?
마하리지 : 그대가 가지고 있는 모든 활동하는 에너지를 업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들은 아뜨만이 아니오.
질문자 : 인간은 항상 자신이 모르는 어떤 것의 표현입니다.
마하리지 : 그것은 음식으로 된 몸에 지나지 않아요. 그런 개념들이 떠오르는 것은 마음과 몸 의식 때문이지 어떤 다른 원인이 없소.
질문자 : 마음과 진아는 다른가요?
마하리지 : 하나요.
질문자 : 죽음이란 무엇인가요?
마하리지 : 죽음에 대한 공포만 있을 뿐이지, 죽음에 대한 실제 체험은 없소. 그대에게 출생의 체험이 없듯이, 죽음의 체험도 없는 것이오. 죽음의 공포만 있을 뿐이오.
질문자 : 죽음의 체험이란 어떤 것입니가?
마하리지 : 휴식이지요.
질문자 : 우리가 죽는 체험을 하게 됩니까?
마하리지 : 죽음의 체험이 아니고, 기껏해야 거기 누워있는 시신 하나를 보게되겠지요. 그리고 그대가 거기서 지켜보는 것이오.
질문자 : 제가 누군지 알아보려고 애를 쓸 때면, 오래 있지 않아서 다른 생각들이 밀려 옵니다.
마하리지 : 그 생각들을 누가 압니까?
질문자 : 제가 압니다.
마하리지 : 그대가 생각들을 아니까 그대는 그 생각들이 아닙니다. 그 원리가 없었다면 누가 생각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질문자 : 생각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동시에 통찰력을 가질 수 있습니까?
마하리지 : 생각에서 벗어나 있으면서 다른 어떤 것에 대한 통찰력을 갖고 싶어하는 생각을 하는 것은 또 누구요? 그 '나'는 누구요? 그대는 생각보다 먼저 있으므로, 그 근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런 대화를 깊히 성찰해 보면 이것을 명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실제 명상에서는 명상하는 자를 명상하고, 내관하는 자를 내관해야 하는 것이오. 그렇게 하면 그대가 누구인지 알게 되오. 누구한테 물어 볼 것도 없이 그것을 깨닫게 되오. 속세생활에서는- 영적인 수행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 언제나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어 하지요.
질문자 : 우리의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의 '내가 있음'이 절대자 안에 합일된다는 것이 가능한가요?
마하리지 : 가능하지 않소. 그래서 저 모든 위대한 화신들이 대삼매(大三昧)에 들었는데, 대삼매란 그 존재성이 절대자 속으로 합일했다는 뜻이오.
질문자 : 저는 하타 요가를 하면 집중이 훨씬 잘 되고 몸이 가볍게 느껴집니다. 그것은 저에게 유익하다고 생각되어서, 저는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하리지 : 그대의 진아를 알기 전까지는 그대가 무엇을 할 필요로 있고, 무엇을 할 필요가 없는지 모를 거요. 진아를 아는 그 순간까지는 그대가 무엇을 하든 다 쓸모가 없소. 그대는 몸뚱이가 남겨질 거라는 것을 아는데, 누가 그 몸을 떠나게 됩니까? 그것을 생각해 보시오.
질문자 : 그 말씀은 이 동일시가 하나의 장애물이라는 뜻입니까?
마하리지 : 그렇지요. 장애물은 그 개념 뿐이요.
질문자 : 우리는 그 개념을 어떻게 얻게 되었습니까?
마하리지 : 아이는 첫 가르침을 엄마로부터 들어요. "우리가 네 엄마,아빠다" "너는 우리 아들이다" "너는 이렇게 해야 한다" 등 등으로 말이오. 그때까지는 그의 욕구가 신체적인 욕구뿐이었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소. 나중에 학교 선생님들에게나 또는 가족 내의 다른 사람들에게서 여러가지 가르침을 받는 것이오. 그렇게 해서 알게 되는 것들은 모두가 남들이 말해 준 것들이오. 그 개인은 많은 개념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논의도 해보기도 하는 것이오. 그러나 거의 누구도, 항상 존재하면서 이 모든 것을 인식하는 저 원리적인 것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죠. 이 앎이 최초의 것이고 모든 개념의 기초인 것이오. 앎이란 그것에 붙여진 하나의 이름에 불과한 것이오. 그것은 아무 이름도 형상도 없소. 그것은 모든 지각의 뿌리요, 그것은 평안하거나 고요할 필요가 없소. 왜냐하면 그 자체가 평안이자 고요함 그 자체이니까요. 기본적인 고요함이고 이원성이 없는 이 원리 안에서는 언제 어느 때건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소. 이 기본 원리는 어떤 상태도 넘어서 있소. 감각기관을 통해서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것은 의식 내의 한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데, 이 (움직임의)의식은 생시와 잠의 상태가 존재할 때 존재합니다. 이 상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찰나적인 것(파동성)에 불과하오.
의식 그 자체가 신이고, 저 존재성, 곧 의식에 의해서만 모든 현상계, 모든 창조계의 비밀이 그대에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오. 다른 모든 것은 개념일 뿐이오.
이 기본 원리가, 즉 존재성 혹은 의식(의 뿌리)에 대한 기본적인 앎이, 그 자신의 비밀을 그대에게 드러내어 그대가 그것과 친숙해지기 전까지는, 그대가 갖고 있는 어떠한 지식도 개념에 기초한 것이어서 참되지 않소. 그런데 모든 지식의 근원인 이 기본 원리(의식의 뿌리,존재의식)조차 시간에 속박되어 있는 것이오. 이 의식(뿌리)은 그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앎 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앎도 가져다 주오. 그리고 몸이 사라지면서 이 앎이 사라지면 자기 자신이나 세계에 대한 어떤 앎도 없소.
'나'가 어떻게 생겨났느냐 하는 비밀스러운 지식은, 그대가 노력하지 않아도 오직 이 의식의 뿌리- 존재성에 의해서 드러날 것이오. 그대에게 영적인 지식을 전해주는 어떤 스승도 그 지식의 기초를 그 자신의 개념에 두면서 그것을 진리라고 여길 수 있는 것이오. 그 개념이 훌륭하고 희유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역시 하나의 개념일 뿐이며, 그것을 통해서 그대가 이해하려고 하는 모든 것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오.
내가 지금 이 씨앗(내가 있음의 뿌리)를 통해서 이 지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오. 고행을 하는 대단한 요기들과 성자들은 그것을 받지 못하오. 왜냐하면 그들은 무엇인가 아주 대단한 것을 얻을 생각으로 어떤 개념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오. 겉으로는 진아 깨달음을 위하여 고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그들은 자기가 얻은 것에 아주 만족하여 거기에 안주해 버릴 수 있는 것이오.
질문자 : 이제 말씀하신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공부하여 - -
마하리지 : 공부라는 것은 무슨 뜻이오? 그것은 그대가 개념들을 기억하려고만 한다는 뜻이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은 그대가 개념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오. 개념들을 도끼로 내려 치시오. '내가 있다'는 개념을 포함해서 말이오.
질문자 : 우리가 진리를 알 수 있도록 개념들을 제거하는데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요, 아니면 그것이 저절로 일어납니까?
마하리지 : 그것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오. '내가 깨어났다'는 개념자체가 환(幻)의 뿌리인 것이오.
질문자 : 그러니까 아무 노력도 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군요?
마하리지 : 백만명 중 한명이나 이것을 받아들이겠지요. 하지만 그 나머지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얻고 싶어하오.
질문자 : 어떻게 해야 우리가 마음의 흐름에서 벗어납니까?
마하리지 : 이 마음이란 것들은 생기에서 나와 내 안에서도 흐르지만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소. 무지한 사람이 어떤 인상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는 그것을 자기 장부(마음 속에)에 올리고 자기 일기장(기억 속)에 기록합니다.(175)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대담록( Seeds of Consiousness)-
[閑 談]
<실제 명상에서는 명상하는 자를 명상하고, 내관하는 자를 내관해야 하는 것이오. 그렇게 하면 그대가 누구인지 알게 되오> 명상하는 자, 내관하는 자를 명상하라는 말은 내면 깊은 곳의 모든 것의 주시자에 대하여 명상하라는 말입니다.
이 주시자는 모양도 없고 움직임도 없고 알 수도 없으므로, 어떤 정체성이 있는 대상이 아니라,전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대개 마음 안에서 확실하게 붙잡을 수 있는 것을 기대하는데, 명상이나 정신 수행에서는, 일단 마음에 확실히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일단 대상화가 된 것이므로 우리가 추구하는 주시자 또는 보는 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제거되었을 때에 마음의 내용물은 없어졌지만 마음의 껍때기가 마지막 남게 되는데, 이 마지막 남은 마음의 껍때기 또는 마음의 그릇이 바로 "내가 있다"앎 또는 의식의 뿌리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하지면 수행에서 모든 마음의 내용물을 제거하고 마지막에 내가 있다는 앎 조차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하리지가 말씀하시는 수준은 이 "내가 있다"순수앎에 머물러 있을 때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절대진아를 깨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다만 일반 구도자가 초기에는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의 상태까지는 소정의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하리지는 대화록에서 이 수행 초보자에 대하여는 별로 언급을 안하는데,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가 속하는 수행체계에서는 주로 전통적으로 수행 초기에는 만트라 수행으로 이 단계를 넘어서도록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위의 대담들은 대개 "내가 있다" 수준에 가까이 접근해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공부 초기에는 마하리지가 말씀하시는 "내가 있다"가 어떤 특별한 상태라고 믿기가 싶습니다. 개인의식, 존재의식, 절대진아, 이렇게 세 단계로 구분해서 말할 때는 "내가 있다" 존재의식이 마치 개인의식과 절대진아의 중간의 단계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실지로 수행을 점점 깊히 하다보면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이란 절대진아를 가리키는 하나의 손가락, 또는 화살표 표지판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개인의식과 존재의식은 그 두 영역이 서로 공존하면서 두 지역을 들락날락하는 경우가 많고, 좀 더 깊히 들어가면 존재의식과 절대진아도 그 경계선에서 들락 날락하는 과정을 오래동안 겪게 됩니다. 따라서 이론상으로는 개인의식, 존재의식, 절대진아로 구분하는 것은 개인의식상태에서 이해시키기 위한 하나의 명칭구분에 지나지 않으며, 실지 수행에서 일단 개인의식이 존재의식상태로 되면, 개인의식과 존재의식은 공존하고, 만일 절대진아상태가 되면 개인의식과 존재의식이란 없는 것입니다. 존재의식의 초기상태는 마치 개인의식과 다를 바 없고, 존재의식의 말기상태는 마치 절대진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한 존재의식의 초기상태는 원인체라고 말하고 존재의식의 말기상태는 대원인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대원인체는 절대진아의 현관입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라마나 마하리쉬 같은 분은 "내가 있다"가 절대진아나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때는 존재의식의 말기, 즉 대원인체 상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또한 어느 때,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는 "내가 있다"도 개인의식과 같은 환(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내가 있다"도 절대진아 밖으로 나온 미세한 파동성 의식이므로 환(幻)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이런 경우는 "내가 있다" 존재의식과 절대진아를 명확하게 구분해 주기 위하여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론상으로 그렇게 세 가지로 구분되는 것이나, 실지로 구도자가 명상 중에 '아 이 상태가 바로 "내가 있다" 상태인가 보구나 !'하고 여긴다면 그것은 완전히 빗나간 것입니다. 마음이나 체험상으로 "아! 이 상태가 바로 그것인가보다"라고 생각하거나 느끼는 순간, 개인의식의 대상적 상상으로 빠져 버린 것입니다. '내가 있다"는 아무 것도 체험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무엇인가 체험하거나 느끼는 것이 있다면 아직 개인의식의 분별개념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죠. 라마나 마하리쉬나 니사르가다타님이 말씀하시는 "침묵상태"는 자기 개인존재조차 자각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이 "나"가 없어진 무아(無我)의 침묵상태를 말합니다. 평시에도 누구에게나 이 상태는 항상 있으며, 모든 것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자입니다. 구도자 본인이 그것에 대해 알던 모르던 상관없이 말입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