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엄경 공부(105)
[무한진인의 능엄경 공부하기 105회]
5.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耳根圓通)
5-5. 문수의 선택
4)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에 대한 평가
[본문]
[我今白世尊호니다 佛出娑婆界하야 此方眞敎體는 淸淨諸音聞이니 欲取三摩提인댄 實以聞中入이니다 ]
제가 지금 세존께 아뢰옵니다.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오시어 이곳에서 설하신 진실한 가르침의 실체는 청정하게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만약 삼마제를 닦으려 한다면 참으로 듣는 것으로부터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해설]
문수보살이 부처님께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오셔서 가르침을 펼치는데, 그 가르침을 펼치는 실질적인 도구로서 부처님의 음성, 즉 소리를 듣는 것이기 때문에 삼매에 들어가려는 수행을 하려면 소리를 듣는 그것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이 삼차원 인간세상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나,천상에서는 소리가 아닌 생각, 또는 다른 방식을 통해서 가르침을 펼칠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어떤 느낌이나 말 없는 어떤 특별한 의사전달형태로 가르침을 펼칠 수도 있겠지만, 이 사바세계에서는 부처님이 음성으로 말씀하시면 대중들은 그 소리를 귀로 들으면서 배우므로, 이근(耳根)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離苦得解脫하니 良哉觀世音이며 於恒沙劫中에 入微塵佛國하야 得大自在力하고 無畏施衆生하며 妙音觀世音과 梵音觀世音과 救世悉安寧하여 出世獲常住니이다 ]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게 하니 훌륭하구나! 관세음이여!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이 수없이 오랜 겁(劫, 시간) 가운데 작은 티끌처럼 많은 불국토에 들어가서 대자재력(大自在力)을 얻고, 두려움이 없이 중생에게 베풀어 묘음(妙音)과 관세음(觀世音)과 범음(梵音)과 해조음(海潮音)으로 세상을 다 구제하여 다 편안케 하며 세상을 벗어나 영원을 얻었습니다.
[해설]
관세음보살이 괴로움을 다 없애고 해탈을 얻었고, 또한 이 사바세계 뿐만 아니라, 다른 미진의 수많은 다른 차원의 세계에도 들어가서, 대자자력을 얻어서 아무 어려움없이 중생들에게 베풀어 주었다고 문수보살이 관세음보살을 칭송하고 있는 말입니다. 여기서 대자재력이란 삼십이응신(三十二應身), 십사무외력(十四無畏力, 사불사의덕(四不思議德) 등 앞에서 이야기한 불보살의 공력등을 말합니다. 묘음(妙音)이라는 것은 音(파동의식) 중에서도 가장 미세한 音(의식파동성)을 말하는 것이고, 이 미세한 音(의식파동성)이 세상의 모든 音(거친파동의식)을 관(觀)하는 音(파동의식)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범음(梵音)이라는 것은 아주 청정하고 오염이 없는 音(파동의식)이라는 뜻이며, 세상의 모든 音(파동의식)을 관(觀)하는 음(音,파동의식)의 또다른 특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해조음이라는 것은 중생들에게 가장 적절한 시기를 맞추어, 마치 바다의 조수가 시간에 맞추어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듯이, 중생들에게 접근하여 늦춰다 조였다하는 것처럼, 상황에 맞추어 조합롭게 중생제도를 하는 음(音)이라고 표현한 것인데, 이것도 관세음(觀世音, 세상의 온갖 소리를 관하는 音)의 한 특징을 말한 것입니다. 다시 종합해 보면 관세음보살이 묘음, 관세음,범음,해조음의 특성을 두루 갖추어 가지고서 중생들에게 조화롭게 작용하여 세상사람들을 그 사바세계 넘어로 편안하게 인도되도록 제도한다는 것입니다. 즉 관세음보살이 이런 아름다운 공덕을 갖추었는데, 음(音,파동), 즉 소리 하나만 가지고 이렇게 훌륭하게 공덕을 갖추었다고 칭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我今啓如來하노니 如觀音所說하야 譬如人靜居에 十方俱擊鼓어든 十處一時聞하나니 此則圓眞實이니다 ]
제가 이제 부처님께 아뢰옵니다. 관음도 설명했지만, 이는 마치 사람들이 조용히 쉬고 있을 때에 시방에서 한꺼번에 북을 치면 열 곳의 소리를 일시에 듣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것이 원진실(圓眞實)인가 합니다.
[해설]
사방에서 동시에 북을 쳐서 소리를 내면 한쪽 방향의 소리만 듣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방향의 소리를 동시에 전체적으로 들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시에 통짜로 듣는 성품은 원진실(圓眞實)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듣는 성품이 조금도 빠짐없이 전채적으로 동시에 한꺼번에 다 들을 수 있으므로 그 공덕이 원만하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눈은 앞을 향하고 있을 때는 밑이나 위, 또는 옆의 일부 뒤쪽은 볼 수가 없으므로, 귀가 팔방의 소리를 듣는 공덕만 못한 것이죠. 따라서 듣는 성품은 그 공덕이 진실되게 원만하다는 것입니다.
[본문]
[目非觀障外하고 口鼻亦復然하며 身以合方知하고 心念紛無緖이니와 隔垣聽音響하고 遐邇俱可聞하니 五根所不齊하야 是則通眞實이니다 ]
눈은 담장 밖의 것을 보지 못하고, 입과 코도 다시 그러하며, 몸은 접촉하는 대상과 합해야 앎이 생기고, 마음과 생각은 분잡하여 단서가 없는 것이지만, 이근(耳根)은 담장에 막혀도 음향을 듣고,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 들을 수 있으니 앞의 오근(五根)과는 같지 아니하여 이것만이 통진실(通眞實)인가 합니다.
[해설]
위에서 잠깐 말했습니다만, 눈, 입, 코, 몸의 촉감 등은 어떤 조건에서는 통하지 못하나, 귀는 보이지 않는 담너머의 소리도 들을 수가 있고, 멀고 가까운 거리에 관계없이 들을 수가 있는 등, 다른 오근과는 다르게 어떤 조건하에서도 막힘이나 제한이 없이 다 통할 수가 있으므로 통진실(通眞實)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音聲性動靜하야 聞中爲有無이라 無聲號無聞이나 非實聞無性이니다 聲無旣無滅이며 聲有亦非生이니 生滅二圓離일새 是則常眞實이니다 ]
소리의 성품은 움직이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해서 듣는 가운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소리가 없을 때 들음도 없다고 말하나 참으로 듣는 성품은 없는 것이 아니요, 소리가 없더라도 그 성품은 없어진 것이 아니며, 소리가 있어도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생멸의 두 가지를 다 여의었기에 이것이 곧 상진실(常眞實)인가 합니다.
[해설]
소리는 소리가 나고 있는 중이기도 하고, 소리가 없어져 고요해지고도 해서 듣는 성품 속에서 소리가 있기도 하고 소리가 없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소리가 없을 때는 소리자체는 안난다고 하나, 듣고 있는 성품은 항상 있으므로 진실로 듣는 성품 자체는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이죠.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듣는 성품은 그대로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소리가 난다고 해서 듣는 성품이 새로 생긴 것은 아니고 항상 듣는 성품은 그대로 거기에 변함없이 있습니다. 따라서 소리가 난다, 안난다 와는 관계없이, 즉 생멸(生滅)작용과는 상관없이 듣는 성품 자체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을 이근(耳根)의 상진실(常眞實)이라고 합니다. 소리라는 대상은 없어지기도 하고 생기기도 하지만 소리를 듣는 주체(주시자)는 항상 변화가 없이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대상의 생멸(生滅)과 관계없이 항상(恒常)하다는 것이죠.
지금까지 듣는 성품(耳根)의 원(圓), 통(通), 상(常)의 세 진실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본문]
[縱令在夢想하여 不爲不思無이며 覺觀出思惟하니 身心不能及이니다 ]
비록 꿈속에서 사유하지 않더라도 들음이 없지 않듯이, 이근(耳根)의 원만한 각관(覺觀)은 사유에서 벗어났으니 몸이나 마음으로는 능히 미칠 수가 없습니다.
[해설]
비록 잠 속에서 꿈을 꾸고 있을 때라도 듣는 성품은 있다는 것입니다. 또 꿈 속에서 생각하지 않는다고 듣는 성품이 없었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잠 속에서나 꿈을 꿀 때 누군가가 부르면 바로 꿈이나 잠을 깨고 대답을 하게 되죠.
이근으로 듣는 성품인 각관(覺觀)하는 것은 보통 생각(思惟)하는 것을 초월해 있으므로, 몸의 눈이라든가, 혀라든가, 촉각이라든가 아니면 마음의 의식작용으로는 듣는 성품에 미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듣는 성품 그 자체는 다른 육체의 감각기관이나 마음의 생각하는 기능과 인식작용과는 그 현상계 차원을 벗어나 있다는 말입니다.
[본문]
[今此娑婆國은 聲論得宣明어늘 衆生迷本聞하고 循聲故流轉이니다 阿難縱强記나 不免落邪思니 豈非隨所淪이리요 旋流獲無妄이니다 ]
지금 이 사바세계는 소리와 언어라야 밝힐 수 있는데, 중생들이 본래의 듣는 성품을 미혹하여 소리만 따라가기 때문에 한없이 윤회[流轉]하게 됩니다. 아난이 비록 많이 기억했다 하나 사악한 생각에 떨어짐을 면치 못했으니 어찌 소리에 빠진[淪溺] 것이 아니리요. 그러나 흐름만 돌이키면 허망이 본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해설]
지금 이 사바세계, 즉 현상세계에서는 소리로 의사 표현을 하게 되고, 소리로 표현하면 그것을 듣고서 중생이 그것을 따라다니는데, 즉 대상에만 미혹되어 따라다니므로, 항상 생사(生死)에 돌고 도는 유전(流轉)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난이 비록 부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기억하고 있다고 하지만, 마등가의 꾀임에 홀려서 나쁜 생각에 떨어질 수 밖에 없었으니, 이것이 감각의 대상에 빠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심을 내면으로 되돌려서 듣는 자를 돌이켜 보면, 거짓된 감각대상이 허망한 환(幻)임을 깨닫을 수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망(妄)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바로 그 자체가 진여를 깨닫는 것입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