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엄경 공부(104)
[무한진인의 능엄경 공부하기 104회]
5.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耳根圓通)
5-5. 문수의 선택
3) 게송으로 24원통을 분별하다
3-4) 칠대(七大)
[본문]
若以地性觀하면 堅礙非通達이라 有爲非聖性어늘 云何獲圓通이리요
若以水性觀하면 想念非眞實이라 如如非覺觀이어니 云何獲圓通이리요
若以火姓觀하면 厭有非眞離라 非初心方便어니 云何獲圓通이리요
若以風性觀하면 動寂非無對이니 對非無上覺어늘 云何獲圓通이리요
若以空性觀하면 昏鈍先非覺이라 無覺非菩提어니 云何獲圓通이리요
若以識性觀하면 觀識非常住라 存心乃虛妄어니 云何獲圓通이리요
諸行是無常어니 念生元生滅이라 因果今殊感어늘 云何獲圓通이리요
만약 흙의 성품을 관찰해 보면 단단하고 장애되어 통달함이 없고 유위(有爲)는 성스러운 성품이 아닌데,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물[水]의 성품을 관찰해 보면 분별[想念]은 진실이 아니고, 참다운 여여(如如)는 각관(覺觀)이 아닌데,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불의 성품을 관찰해 보면 유(有)를 싫어하는 것은 참으로 여읜 것이 아니요, 초심자에게 맞는 방편이 아니거늘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바람의 성품을 관찰해 보면 움직임과 고요함으로 상대[對]가 끊어지지 아니했으며, 상대가 있음은 최상의 깨달음이 아닌데,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허공의 성품을 관찰해 보면 혼둔(昏鈍)은 애당초 깨달음이 아니요, 깨달음이 없는 것은 보리(菩提)의 길과 다르거늘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인식하는 성품을 관찰해 보면 관찰하려 해도 식(識)은 항상 머무는 것이 아니어서 마음을 붙들어 둔다는 것이 이처럼 허망한 것인데,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제행(諸行)이 무상하니 성품을 생각하는 것도 원래 생멸이요, 수행의 인(因)과 증득의 과(果)가 지금 다르게 감득(感得)되니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해설]
지지보살(持地菩薩)의 지대(地大)에서, 흙(地大)의 성질은 굳고 막힌 것이라 유위성(有爲性)이 뚜렷하여 청정담연(淸淨湛然)한 여래장성(如來藏性)을 밝히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위는 성스러운 성품이 아닌데'라는 문장은 앞서 지지보살(持地菩薩)이 흙을 가져다 땅을 평평히 한다고 말한바 있는데, 이것은 유위법(有爲法)이지 성스러운 성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월광동자(月光童子)의 수대(水大)에서,물의 성질을 관찰하는 것은 그 자체가 허망한 생각(想念)으로서 본래 진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진여의 자리는 생각(想念)하는 관찰로는 이를 수가 없으므로 원통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월광동자 역시도 수대(水大)로 원통(圓通)할 때 단번에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물과 몸의 분별로 인하여 원통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오추슬마의 화대(火大)에서, 음욕(淫欲)이 많아서 이것을 다스리기 위하여 오추슬마가 하던 수행인데, 음욕(淫欲)을 싫어해서 불을 관찰한 것이므로, 이것이 좋다, 나쁘다라는 분별심이 없어야 할텐데, 이 있음(有)를 싫어하는 것은 참으로 벗어난 것이 아니며, 초발심의 인지(因地)와 과지(果地)가 합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적멸(寂滅)의 단계에 도달하기 어렵고, 초보적인 수행자들에게는 적합하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유리왕 법왕자가 말한 풍대(風大)에서, 바람의 성질은 바람이 부는 것(動), 잠잠한 것(靜)이 서로 상대적으로 의지한 것이지, 절대적인 무상각(無上覺)이 아니어서 바람의 상대성을 통해서는 원통을 이루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허공장(虛空藏) 보살의 공대(空大)에서, 허공의 성질을 관할 경우를 보면, 허공자체는 본래 무지로부터 나온 어두운 것이어서 혼돈스러운 근본 무명(無明)은 본래 밝은 각(覺)과는 다릅니다. 따라서 앎(곧 覺)이 없다는 것은 보리가 아니라는 것인데, 이러한 무명에서 나온 허공을 관할 경우 근본 무명 속에 파묻혀서 각(覺)을 깨닫기가 어려우니 중생들이 원통으로서는 부적합다는 것입니다.
미륵의 식대(識大)에서, 식(識)의 성품을 관한다고 할 때에 이 관하는 것 역시 식(識)의 성품이라 항상 머물러 있는, 상주(常住)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생각할 때는 관(觀)하는 식(識)이 있지만, 생각하지 않을 때는 관(觀)하는 식이 없으므로 상주(常住)하는 식(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따라서 상주(常住)하지 못하는 마음을 두는 것은 이미 허망한 것이므로 원통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대세지(大勢至) 보살의 염불하던 근대(根大)에서, 모든 행위는 생멸(生滅)이므로 행(行) 그 자체가 무상(無常)하다는 것입니다. 염불(念佛)도 일종의 행(行)이고,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 역시 하나의 생각(想念)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움직임(行)은 무상(無常)하고 모든 생각(念)은 생멸심(生滅心)이니, 불성을 얻을려고 수행을 할 때에 인지(因地)와 과지(果地)가 어긋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세지보살의 육근(六根)을 모두 포섭하여 행한 염불심 역시 대중들을 위한 제일의 원통법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25원통(圓通) 가운데 이근원통(耳根圓通)을 뺀 24원통(二十四圓通)이 옳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음은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耳根圓通)에 대해서 나옵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