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나는 하나다.
바가반을 방문하여 몇칠간 마하리지의 수승한 가르침을 들었던 영국의 베이트먼 여사가 마하리지의 말씀에 대해서 높히 공경한다고 말하면서, 그녀는 자신이 다음 날 떠난다고 마하리지께 말했다.
마하리쉬가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 그대는 한 장소를 떠나 다른 장소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는 항상 움직이지 않습니다. 장면들만 그대를 지나갑니다. 보통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대는 선실에 앉아있고 배가 항해합니다. 그대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화에서 사람이 먼길을 달려가고 우리에게 달려오는 장면을 보지만, 화막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계속 움직이며 변해가는 것은 화상입니다.
방문자 : 알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진아를 깨달은 뒤에야 그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하리쉬 : 진아는 항상 깨달아져 있습니다. 깨달음이 앞으로 그대가 얻을 어떤 것이라면 그것을 잃어버릴 가능성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겠지요. 일시적인 지복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해탈일 수 없습니다. 그대가 나중에 그것을 깨닫는 것이 사실이라면, 지금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현재의 순간에 깨달음이 없다면 미래에도 언제든지 그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무한하니까요. 그래서 역시 그런 깨달음은 영구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맞지 않습니다. 깨달음이 영구적이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참되고 영원한 상태입니다.
방문자 : 예, 저도 때가 되면 그것을 이해하겠지요.
마하리쉬 : 그대는 이미 그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은 진아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그대의 안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대가 주위에서 보는 모든 것이 그대의 안에 있습니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여자가 귀중한 목걸이를 목에 두루고 다녔습니다. 한 번은 경황 중에 그것을 잊어버리고 목걸이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걱정이 되어 집안을 뒤져 보았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친구와 이웃들에게도 목걸이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지만, 그들도 보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한 친절한 벗이 그녀에게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만져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그것이 내내 자기 목에 걸려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기뻐했지요. 다른 사람들이 나중에 잃어버린 목걸이를 찾았느냐고 묻자 그녀는 "예, 찾았어요"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잃어버린 보물을 되찾은 것처럼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녀가 그것을 잃어버리기는 했습니까? 그것은 처음부터 목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심정을 헤아려 보십시오. 마치 잃어버린 보물을 되찾기라도 한듯이 기뻐합니다. 우리도 그와 마찬가지로, 언젠가 우리가 진아를 깨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결코 진아 아닌 적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방문자 : 저는 지구 아닌 다른 어떤 세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마하리쉬 : (미소를 지으며) 여기가 하늘 나라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늘나라와 이 세계는 서로 다른 영역이 아닙니다. " 그 나라는 너희의 안에 있다" 고 성경에서 말합니다. 정말 그렇지요. 깨달은 존재는 이것을 하늘 나라로 보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이 세계'로 봅니다. 그 차이는 시각의 차이에 불과합니다.
방문자 : 세계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습니까? 저는 음악을 좀 듣습니다. 그것은 감미롭고 웅장합니다. 저는 그것이 바그너의 음악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것이 저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마하리쉬 : 바그너나 그의 음악이 그대와 별개로 존재합니까? 그것이 바그너의 음악이라고 말하는 그대가 없다면, 그대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대가 없어) 그것을 모른다면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더 분명히 하자면, 그대는 깊은 잠 속에서도 바그너의 음악을 인식합니까? 그런데도 그대는 잠 속에서 존재합니다. 따라서 바그너와 음악은 그대의 생각들에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그대의 안에 있지, 그대의 밖에 있지 않습니다.
방문자 : 아름답습니다.
[편집자의 말 : 누구나 때때로 혼동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비록 진리를 듣고 이해한다해도 가끔 그것을 잊어버리며, 사실들과 직면할 때는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진리가 무지에게 자리를 내주면 그 결과는 혼동이다. 그러나 진인만이 우리의 생각들을 때때로 돌려놓아 줄 수가 있다. 그래서 사뜨상가, 즉 현인(깨달은 이)과의 친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라마나 마하리수 대담록-
[閑 談]
위의 본문 중 마하리쉬의 말씀 내용은 충분히 이론적으로도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즉 이 모든 세상과 자기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자기의 인식 기관(의식) 안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과 타인은 자기와는 동 떨어진 것으로 분리시킵니다. 이렇게 차별화함으로써 그 동안 없어던 에고가 새로 생겨서 점점 강화되는 것입니다. 현상세계 대상을 자기(에고)와 차별화 하지만 않으면, 모든 것(대상들)은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의 그림자들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의 존재의식 안에서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찰나의 의식 움직임인데, 그 모든 현상계는 의식의 파동성 한 바다에서 명멸하는 파동성의 변화일 뿐입니다. 의식의 한 바다는 존재의식의 한 바다이며, 그 존재의식의 바다에서 수많은 파도모양이 순시적으로 생멸하면서 변화하는 양상입니다. 불교(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色-五蘊)과 공(空)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 바로 이 말입니다. 색(色-五蘊))은 현상계로 보이는 물질계와 정신계이고 공(空)은 존재의식의 뿌리를 말합니다. 물론 절대진아는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닙니다. 색과 공을 둘 다 초월한 그 무엇(참나)입니다.
우리 구도자들이 이 세상과 나가 하나다라는 지적인 이해를 철저히 하면, 정말로 이 세상과 나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절로 무한한 존재의식과 동일시 됩니다. 여기까지는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이 지점에서 잠시 머물러서 불교에서 말하는 대자비심(大慈悲心), 즉 대자심과 비심(悲心)의 보살도를 실천하라고 권고합니다. 전체와 내가 하나이므로 모두가 나 자신으로 보아서 큰사랑이 저절로 우러나고, 무지 속에서 헤메는 중생을 구원해야겠다는 대비심(大悲心)이 일어나서 보살심을 펼치게 되는데, 이것이 대승적인 보살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중생에 대한 대자비심으로 구도의 단단한 기반을 다져서 수행을 해야 옳바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구도자는 우선 이론적인 공부를 철저히 해서 이 세상과 나는 하나다라는 경지에까지 이해를 하고, 또한 스스로 그렇게 믿고 심적으로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저절로 마음이 무한해지고, 에고가 엷어지고, 이 세상, 모든 살아있는 생물과 중생들을 마치 자기 자신처럼 여기는 대비심이 저절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 큰마음바탕의 기반 위에서 수행을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스스로 가야할 길이 훤하게 저절로 옳바르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과 내가 하나라는 이해는 성인들의 수많은 가르침을 공부하거나 경전공부를 이론적으로 열심히 공부해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합니다. 그런 믿음을 단단히 굳힌 후에 직접 어떤 수행을 본격적으로 실천하면서, 탐진치의 삼독과 습을 서서히 제거하는 수행방편들이 세상에는 꽤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 아닌 이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궁극적인 큰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또 다른 표현으로 말하자면, 미워하고 좋아함의 이원적인 분별심에서 벗어나면 원융무애해져서 너와 나, 안팎의 구별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