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능엄경

능엄경 공부(90)

무한진인 2015. 11. 24. 19:50

[무한진인의 능엄경 공부하기 90] 


4-2. 이십오(二十五) 원통
 


4-2-2. 육근원통(六根圓通) 


4) 설근(舌根)


[본문]

[憍梵鉢提 卽從座起頂禮佛足而白佛言호대 我有口業하야 於過去劫 輕弄沙門이라가 
世世生生有牛伺病이리니 如來示我一味淸淨心地法門어늘 我得滅心하야 入三摩地하며 觀味之知 
非體非物하고 應念得超世間諸漏하야 內脫身心外遺世界하야 遠離三有如鳥出籠이라 離垢消塵 
法眼淸淨成阿羅漢하니 如來親印登無學道호이다 佛問圓通하시니 如我인댄 還味旋知斯爲第一이니다 ]
 
교범바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어 절하고 부처님께 사뢰었다. 
“저에게는 구업(口業)이 있었습니다. 제가 오랜 과거에 사문(沙門)을 조롱한 까닭으로 
세세생생 소처럼 되새김하는 병이 있었습니다. 
여래께서 저에게 한결같이 심지법문(心地法門)을 개시(開示)해 주셨으므로, 제가 잡념이 
없어짐을 얻고 삼마지에 들어가 혀가 맛을 아는 것이 몸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맛보는 
대상에서 생기는 것도 아님을 관찰하고 바로 세간의 가지가지 번뇌를 초월하여 안으로는 
몸과 마음에서 해탈하고 밖으로는 세계를 떠나 삼계를 멀리 벗어나는 것이 마치 새가 
새장에서 벗어난 것과 같았습니다. 이와 같이 허물을 여의고 번뇌를 소멸하여 진리의 
눈[法眼]이 맑아져 아라한을 이루었으니 여래께서 친히 더 배울 것이 없는 무학(無學)
 도(道)에 올랐다고 인가(印可)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원통을 물 으시니 제가 증득한 
바로는 맛을 돌이켜 신령스럽게 아는 것[知,返照]에 돌아가는 것이 제일(第一)인가 합니다.” 
[해설]
교범발제라는 것은 소가 되새김질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교범발제는 과거  전생에 노승이 
이가 없이 우물우물 밥먹는 것을 보고 노승에게 소 새김질 하듯 밥먹는다고 놀렸던 적이 있었는데,
 그가 아라한인 줄 모르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라한을 비방하면 지옥에 가게 되기 때문에 
그 노승이 곧 참회를 시켜서 지옥에는 가지 않고 그 이래로 소 새김질하는 과보를 받아 마치 
소가 되새김질 하듯이 우물거리는 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청정한 마음을 
가지라고 일미청정심지법문(一味淸靜心地法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원래 일미청정심법문
(一味淸靜心地法門)이란 한 가지 맛이 나는 음식을 평소 되씹으면서 그 맛을 관(觀)하여 
설근의 여래장성을 깨닫게 하는 법문이지만, 여기서는 한 가지 염불을 계속 입으로 읖조리며 
염불하는 수행을 말합니다. 염불을 입으로 읖조릴려면 혀를 우물거려야 하기 때문에, 
교범발제가 계속 우물거리는 습관이 있으므로, 마치 우물거리듯 쉼없이 염불수행을 하라는 
뜻에서 부처님이 이런 수행을 권하게 된 것 같습니다. 교범발제는 이 수행을 계속 하면서 
결국 깊은 삼매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결과 혀가 맛을 아는 것이 몸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맛보는 대상에서 생기는 것도 아님을 관찰하므로써 온갖 번뇌를 벗어나는 경지에 이르러서 
몸과 마음에서 초월하고 밖으로는 세계가 다 사리져 삼유(三有)를 벗어나서 공(空)해졌다는 
것입니다. 혀가 맛을 아는 것이 몸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몸은 혀를 말하는 것인데, 
맛을 아는 것은 어떤 음식의 대상이 혀에 닿아야 맛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혀에서 단독으로
 맛이 생기는 것이 아니죠. 또 어떤 음식대상에서도 맛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그 음식대상이
 혀에 닿아야 맛을 아는 것인데, 음식자체 혼자서는 맛이 있더라도 혀가 닿지 않으면 맛을 
알수가 없는 것이죠. 따라서 맛을 아는 것은 혀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음식대상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수행을 해서 삼계를 다 벗어나니 
육진 경계가 다 녹아서 법안(法眼)이 청정해 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어 
부처님이 인가를 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교범발제는 설근을 통해서 맛을 아는 것을 
되돌려서 아는 것이 원통의 으뜸이라고 말합니다.  

 5) 신근(身根)
[본문]
[畢陵伽婆蹉 卽從座起頂禮佛足而白佛言호대 我初發心 從佛入道하야 數聞如來 
說諸世間不可樂事하고 乞食城中일새 心思法門이라가 不覺毒刺傷足하야 擧身通病호이다 
我念有知하야 知此深痛이니 誰覺覺痛 이나 覺淸淨心에는 無痛痛覺이라하고 我又思惟호대 如是一身 
寧有雙리요하야 攝念未久身心忽空하고 三七日中諸漏虛盡하야 成阿羅漢하고 親印記發明無學
호이다 佛問圓通하시니 如我所證컨댄 純覺遺身호미第一이니다 ]
필릉가바차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어 절하고 부처님께 사뢰었다. 
“제가 처음으로 발심하여 부처님을 따라 입도(入道)할 때에 여래께서‘세간(世間)에는 
가히 즐길 만한 일이 없다’고 자주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성(城)에서 걸식할 
때에 항상 마음으로 그 법문을 생각하다가 저도 모르게 길에서 독한 가시에 발을 
다치니 온 몸이 몹시 아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를‘앎이 있으므로 이러한 심한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다. 비록 촉각(觸覺)이 있어 아픔을 느끼지만 깨달음의 청정한 
심체(心體)에는 아픔과 아픔을 아는 것이 없다’고 관찰하고 다시 더 나아가 사유하기를
‘이와 같이 하나의 몸에 어떻게 두 개의 느낌[雙覺]이 있을 수 있겠는가?’이렇게 
생각한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몸과 마음이 홀연히 비워지고, 삼칠일(三七日) 동안에 
모든 번뇌가 다 없어져 아라한을 이루게 되니 부처님께서 친히 인가(印可)하시어
‘무학(無學)을 발명하였다’고 수기(授記)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원통을 물으시니 
제가 증득한 바로는 깨달음을 순일하게 지키고 몸을 버리는 것이 제일(第一)인가 합니다.” 
[해설]
팔능가바차라는 이름은 '習이 남아 있음'을 의미합니다. 팔능가바차가 전생에 많은 종을 
부리던 양반이었는데, 그때 거들먹거리던 건방진 습기가 많이 남아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팔능가바차가 부처님 밑에 들어와 수행할 때,부처님이 이 세상의 삶은 모두가 
고통이라는 법문을 들었는데, 그 부처님의 법문을 생각하며 길을 걷다가 독한 가시에발을 
찔려서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때 생각하기를' 알음알이(분별심)가 있기 
때문에 이 고통을 알게 되는 것인데, 비록 아픈 통증을 느끼는 것은 알고 있으나, 그 아는 
자체(本覺)의 청정한 마음은 아픈 것도 없고, 아픈 것을 느끼는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한 몸 안에 어찌 두가지 앎이 동시에 있겠는가? 라는 
생각이 나서, 이 의문을 붙잡고 선정에 드니, 오래지 않아서 심신(心身)이 문득 공(空)해져서, 
삼칠일(3주일,21일간) 선정에 들어서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나 아라한을 성취하여 부처님에게 
인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한몸 안에 두 가지 앎이 어찌 동시에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말은, 분별각(妄覺)이 있고  
진각(眞覺)이 있으니깐, 아픈 것을 깨닫는 각(覺)이 있고, 아픈 것을 깨달을 것이 없는 
청정각(淸淨覺)의 두 각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했다는 말이죠. 

이것은 위의 본문과는 좀 다른 이야기지만, 만일 아픈 느낌이 있는데, 여기에 단순히 아픈 
느낌 하나만 있으면 아프다는 것을 못 느낍니다. 무엇인가가 아픔을 느끼는 기준(아는 자)이 
있어야 합니다. 아픔이라는 경계(대상)가 느껴질려면 아픔이 없는 것, 즉 경계없는 것(아는 자)이 
동시에 존재해야 아픔이 느껴집니다. 아픔(대상)은 잠깐 왔다가 머물다가 이내 가버리는 것이지만, 
아픔의 배경에는 아픔이 없는 배경(아는 자)이 있어야 아픔이라는 것이 잠시 지나 갈 수가 있습니다. 
그 아픔의 배경이라는 것은 아픔을 알아차리게 하는 것으로써 1차적으로 순수한 존재의식이지만, 
그 존재의식은 중간의 매개자 역활만 하는 것이고 실은 그 존재의식이 생겨난 근원인 절대바탕, 
여래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파동성도 없는 고요한 여래장 바탕 입장에서는 미세한 파동성인 존재의식도 없고, 
거친 반사파동성의 말단 대상인 아픔도 없는 것입니다. 아픔이란 단순히 말단에 비추어진 
그림자 대상일 뿐이어서 그것은 앎(비춤)자체가 되지 못합니다. 앎이란 비추어진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추는 주체를 말합니다. 따라서 본래 앎이란 드러난 것이 아니라, 드러나기 
이전의 내면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책상 위에 책이 있는지 안다 '고 말할 때에 그 '안다'고 
마음에 느껴지는 앎의 느낌은 드러난 대상이므로, 그것은 앎 자체(본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내면에서 비쳐져 나온 앎의 빛에 의하여 마음의 그림자로 비추어진 것이 우리가 
보통 느끼는 "안다"라는 분별앎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고통,쾌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잠깐 스쳐가는 의식빛의 반사된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언제나 아는 자가 
있어야 나타납니다. 그 아는 자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전체입니다. 
따라서 <고통+ 아는 자= 고통의 느낌>, <쾌감 + 아는 자 = 쾌감의 느낌>으로 표시할 수 있으며, 
"아는 자"는 우리 마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므로 <0>로 대입하면, 
<고통 + 0 = 고통의 느낌> <쾌감 + 0 = 쾌감의 느낌>이라고도 표시할 수 있습니다.  
고통이나 쾌락의 느낌을 알도록 비추어 주는 그 아는 본체인 <0>는 절대로 드러날 수 
없는 여래장묘진여성입니다. 그러나  여래장 묘진여성인 <0>가 없으면, 즉 <고통 ≠ 고통의 느낌>
 <쾌감≠쾌감의 느낌>입니다. 여래장이 없이 <고통>이나 <쾌감>이 단독으로는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모든 마음의 대상들은 바로 여래장 묘진여성인 <0>와 함께 있으며 
그래서 <안다>는 느낌의 그림자가 우리 마음에 반사된 그림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6) 의근(意根)
[본문]
[須菩提 卽從座起頂禮佛足而白佛言호대 我曠劫來心得無礙하야 自憶愛生 如恒河沙니다 
初在母胎하야 卽知空寂하고 如是乃至十方成空하며 亦令衆生  證得空性이러니 蒙如來發成覺眞空하야 
空性圓明得阿羅漢하고 頓入如 寶明空海하야 同佛知見이니 印成無學호대 解脫性空에는 
我爲無上호이 佛問圓通하시니 如我所證인댄 諸相入非호대 非所非盡하야歸無斯爲第一이니다 ]
수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어 절하고 부처님께 사뢰었다. 
“저는 오랜 세월 이전에 이미 마음에 걸림이 없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이 많았음을 스스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처음 어머니의 태에 있을 때부터 
공적(空寂)을 알았고, 이와 같이 더 나아가 시방에 이르기까지도 공적하였으며, 또한 
모든 중생들에게 공(空)의 성품을 증득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여래께서 성각(性覺)
  인 진공(眞空)을 밝혀 주셨으므로, 공성(空性)이 원만하게 밝아져서 아라한을 증득하고, 
바로 여래의 보명(寶明)한 공의 바다에 들어가 부처님의 지견(知見)과 같아졌기에, 
부처님께서 무학(無學)을 이루었다 인가하시고, 성공(性空)을 해탈함에는 저보다 
더할 사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원통을 물으시니 제가 증득한 바로는‘모든 상(相)이 상(相)이 아니다’고 
부정하고, 아니라는 생각[非]과 아니라고 생각하는 대상[所非]까지도 모두 다하여 
모든 유위법(有爲法)을 돌이켜 비(是非)가 없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제일(第一)인가 합니다.” 

 

 



[해설]

수보리는 부처님의 십대제자의 한 사람인데, 탄생 때부터 공(空)의 도리를 깨달았다고 하여, 수보리, 즉 공생(空生)이라고 부릅니다. 수보리는 업겁의 생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데, 처음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부터 곧 공의 도리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지금까지 몇 수억전생을 겪어 왔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기억해서 아는 것들, 부모의 태 속에서 알던 것이 태에서 나오면 기억이 사라지고, 또 중음신이 되어 태에 들어가면 들어갈 때까지 알지만 태에서 나오게 되면 잊어버려서 과거 것을 전혀 모릅니다. 또 금생에 알던 것을 죽을 때까지는 알겠지만 죽어서 다른 오음(五陰)을 받게 되면 모르는 그것이 격음(隔陰)이라고 하는데, 음(陰)이 떨어져도 잊어버리고, 태에서 나와도 잊어버리게 되어 지금의 우리는 모르지만, 이 수보리는 마음이 무애한 해공 제일이니깐 수억번의 생을 받은 것을 다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수행 중에 전생일 것이라는 환영을 많이 봅니다. 이생에 본 장면과는 전혀 다른 고대의 복장과 환경을 단편적으로나마 얼뜬 얼뜬 마치 낡은 영화 필름의 장면을 보듯이 자기 전생의 장면을 쭉 연속으로 보는 체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본인도 이십오륙여년전 수행 중에 약 한달 가량을 매일 이런 해괴한 고대 영화장면같은 환상을 접해 본 경험을 했습니다. 그 당시는 왜 그런 장면들이 마치 필름지나가듯이 스토리 있는 환상이 지나가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환상들이 바로 전생의 장면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나니깐 점차로 그런 환상이 사라져갔습니다. 그런데 그 환상에서 주로 그 생에서 충격적인 체험을 한 장면이나, 마지막 죽기 전의 충격적인 장면만 거의 드라마처럼 나타나고, 그 다음에는 전혀 다른 환경과 장면이 나타나다가, 다시 또 바뀌는 식으로 마치 단편영화가 조금씩 맛만 보여주는 환상이 계속 연이어져 나왔습니다. 이것이 전생의 일인지, 그저 나의 두뇌 잠재의식 속에 있던 기억이 만들어 낸 환상으로써 드러난 것인지는 지금도 확실하게 장담은 못하지만, 좌우지간 이 명상 수행 삼매중에 한달간 생생하게 지나간 다양한 전생장면을 다 겪고 나서 마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것 같은 느낌, 아니면 깊은 바닷 속에서 발버둥치며 헤메다가, 물 위로 확 솟구쳐 나와서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본 것처럼 상쾌한 느낌으로 인해 얼마동안 몸이 사라진 것 같은 해방감을 맛본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중요한 장면은 아주 뚜렸하게 기억하고 그 당시 감정이나 기분까지도 아직 생생하게 기억을 합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모두가 쓸때없는 환상이지만, 그 당시는 마치 전생을 쭉 훌어 보고 나왔다는 만족한 느낌이었습니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은,위본문에서 수보리가 수억번의 전생을 다 기억한다는 문장이 있어서, 자기의 전생을 기억하는 것은 누구든지, 구도자가 명상수행과정에서 어렵지 않게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이지, 이 글쓴이가 수보리처럼 수억번의 전생을 다 기억하는 초능력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 과거 수천년에 걸쳐서 어떠 어떠한 전생을 겪었다는 것을 대략 환상으로서 본 기억을 말하므로서, 정신수행을 하면 누구나 자기의 수많은 전생 장면을 볼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구도자가 수행 중에 이런 전생장면 같은 환상이 빠지면 그것이 바로 수행을 장애하는 심각한 수행병에 걸리게 됩니다. 따라서 그런 이상한 환상이 자꾸 나타나면 그것을 보려고 하지 말고, 나타나지 않게 수행에 몰두해야 합니다. 저는 그 당시 그것을 모르게 한달 동안에 그것에 빠져서 허송세월만 보낸 적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환상에 빠지지 말라고 기회있을 때마다 얘기하곤 합니다. 그런데 명상삼매 중에 어떤 경계까지 가면 자꾸 그런 함정에 빠지게 되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없다가, 아예 얼마 동안 그런 수행을 집어치우니깐 그제서야 서서히 그런 환상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어떤 수행을 하다가 그런 전생이라고 생각되는 환상에 빠진 것 같으면, 빨리 그 수행을 집어치우는 것이 좋습니다. 저도 그 다음부터는 그런 수행을 버리고 다른 수행법으로 바꾸었습니다.  쓸데없는 이야기가 좀 길어졌네요.

본론으로 들어가서, 수보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공(空)을 알고 나왔으므로, 나오자 마자 모든 세상이 공(空)하고, 또한 중생들에게도 공의 성품을 증득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부처님께서 본성의 깨달음이 진공(眞空)임을 명확하게 밝혀 주시므로써, 자기의 공성도 더욱 원만하게 밝아져서 결국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러서, 부처님의 지견과 같아지므로서 부처님께서 더 배울 것이 없다고 인가를 해 주셨다고 합니다. 

따라서 지금 부처님께서 원통을 물으니, 모든 상(相)은 상이 아니고, 그 아니라는 생각과 아니라는 생각의 대상조차도 전부 사라지게 해서,그것에게 모든 법을 되돌려 무(無)로 되돌아 가게함이 원통의 제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