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무엇인지 진정 이해한다면, 무엇인가 영적의 추구를 할 필요가 있겠는가?
질문자 : 저의 에고, 저의 몸, 이 방에 있는 에고들의 다른 몸들, 그들이 듣고 있는 것은 모두 이 존재성 안에서의 개념이고 움직임들입니다. 맞습니까?
마하리지 : 그렇지.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하고 싶으면, 자네의 꿈을 예로 들어 보자구. 나는 지금 지(知)의 근원에 접촉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거친 질문에도 대답할 입장이 못돼. 누군가가 말을 하고 질문을 하면, 나는 그에게 절대 시비하지 않아. 왜냐하면 그 질문들은 그의 관점에서 그의 수준에서 하는 것이므로, 그에 따르면 그 질문들이 올바른 것이기 때문이야. 바로 지금 만일 내가 어떤 상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 그것은 잉태되기 8일 전의 상태, 빠라브라만의 상태만 있어. 어제 '에고'라는 말을 썼는데, 오늘도 마찬가지야. 이 '에고'는 어느 수준에, 그리고 언제 해당될까?
일체가 더없이 신성하고 더없이 비신성해. 신성하고 비신성하다는 문제는 저 존재성이 있는 한에서 일 뿐이고, 존재성이 없다면 신성하다느니 하는 그런 문제가 어디 있겠나?
자네는 몇몇 사람을 만나보고 그들이 아주 유식하다고 생각하지. 그들은 자네에게 다음 생에는 자네가 위대한 왕이 되고, 그 다음 생에는 더 위대한 왕이 될 거리고 말해주겠지. 그런 조언을 듣고 나면 듣는 이는 아주 기분이 좋고 아주 만족스럽겠지. 자기애 자체가 환상이지만,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아. 누구도 자신의 존재성, 즉 '내가 있다'는 앎을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야.
어떤 총명한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고 해 보자구. "잉태되기 전에 그대는 어떻게 존재했었나?" 이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겠지. "나는 내 부모님의 본질 안에서 잠재적인 상태로 있었습니다."
아마도 영리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대답하겠지만 그것은 관습적인 대답인데, 만일 그 부모의 부모, 또 그 부모의 부모 하는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끝이 없게 될 거야. 따라서 아무 형상이 없고 잠재적인 상태 안에서의 앎에 지나지 않은 이 원리를 그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그것은 영원으로 들어가는 거야. 그래서 그 원리는 영원하다는 것이지. 이제 자네에게 두 가지 단서를 주겠어.
하나는 그대 자신을 잉태 이전의 그 상태 안에 자리 잡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부모라고 하는 관습적인 개념 안에 그대 자신을 감싸게 하는 것이야. 후자의 경우에는 그대 자신의 참된 성품을 제대로 탐구하지 못하게 되겠지. 이런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지식은 소멸되지 않을 것이고, 그럴 필요도 없어.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그것은 실재하지도 않고, 비진리이니깐 말야. 아무 것도 모르는 아기나 깨달은 진인이 하는 말은 무슨 말이든 양쪽 다 옳지.
나는 자네에게 어떤 개념을 줄 수 있어. 즉, "어떤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존재했던 완전한 원리 혹은 인격은 누구인가?"라는, 여기에서도 요람에 있는 아기와 완벽한 진인 간에 유사성이 있어. 아기가 음식을 맛보면 그것이 오줌인지 똥인지, 음식인지 우유이지 몰라. 다 똑 같은 맛이거든. 그 상태에서 아기가 그 자신을 어떻게 아는가? 자기만이 알아. 그러면 아기와 진인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질문자 : 아기가 되는 것, 모든 집착을 놓아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데요.
마하리지 : 일체를 놓아 버리느니, 포기하느니 할 것이 어디 있는가? 그것은 저절로 일어났고, 무엇을 내버릴 필요가 없어. 자네가 이해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야. 자네는 그 존재성의 겉모습 때문에 고통을 받거나 무엇을 경험해야 하는 것 뿐이야. 자네가 나서서 그 존재성을 붙들었는가? 그것은 저절로 일어난 것이야. 아기가 무엇을 붙들겠나? 어떤 개념이나, 관념이나 에고를 붙잡았나? 이 존재성의 상태와 존재성의 모든 장난을 이해한 진인은 그것을 초월하여 잉태이전의 상태 안에 안주하고 있어. 그는 그 존재성이 나타나든 사라지든, 그 완전한 절대상태 안에서 항상 거주하고 있는 것이야. 살아오는 동안 자네는 너무나 많은 것을 이루엇고 너무나 많은 정체성을 가졌는데, 그 모든 정체성들과 그 이해는 자네를 떠나 버렸어. 결국 자네는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죽게 되겠나?
'자네'가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면, 영적인 추구를 해야 할 어떤 필요성이 있겠는가?
- THE NECTER OF IMMORTALITY-
[한담(閑談)]
윗글의 요지는, 자기의 본래 면목이 무엇인지 완전히 이해한다면 더 이상 어떤 수행이나 공부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아주 당연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실질적으로 자기의 본래 상태, 즉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면서, 전체성이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원화적인 지성(知性)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성을 벗어나야 하므로 결국은, 자기의 참나가 무엇인지 이해한다는 것은 비이원성(非二元性)상태에 진입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하리지는 그 상태에 들어가는 방편으로 <잉태되기 8일전의 자기의 상태>를 탐구하라는 것입니다. 그 상태는 지성으로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므로, 그 알수 없는 상태를 계속 파고 들면 그 상태에 안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는 가지고 있되,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3~4살 이전의 젖먹이 때 아기상태와 같은 자연스러운 상태가 되라는 것입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3살이전까지는 우리는 육체는 가지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아주 자연스러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상태에 까지 수행을 해서 가라는 것입니다.
수행을 해서 마하리지가 말씀하시는 "내가 있다"는 존재핵점까지 도달하면, 그때부터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추구할 것이 없겠죠. 그러면 존재핵점, "내가 있다"는 뿌리는 어다쯤 일까요?
바로 육체가 잉태되고 어머니 뱃속에 태아상태로 있던 시절, 그리고 육체가 태어날 때, 또한 육체가 있지만 아무 것도 모르던 갓난아기 젖먹이 시절의 자연스러운 의식상태가 바로 그 "내가 있다"핵점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때는 내가 나인지도 잘 모르던 시대였습니다. 그 이후에 3살~4살 사이에 점점 개인성이 커가면서 지성이 발달되고 에고의 덮개가 씌워지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수행한다는 것은 바로 이 3살 이후에 에고의 덮개가 쒸워진 것을 벗겨내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3살 이전에는 무엇을 하든 무위(無爲)적이지만, 3~4살 이후는 점점 유위(有爲)적이 되어 에고가 강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3살 이전의 아무 것도 모르면서 무위적인 상태, 즉 "내가 있다"는 근원으로 가는 것이 1차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입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