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바로 지금 여기서, 누구든 "내가 있다"로 깨달아 있다.

무한진인 2015. 10. 25. 09:39

질문자 : 진인은 자신이 깨달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나요?

마하리지 : 자기 자신의 지각성(앎)을 인식할 때, 그것이 바로 '내가 있다'는 느낌인데,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네는 그 깨달은 상태에 있는 거야. 그러나 자네는 욕망과 마음의 개념들을 통해서 그것을 보고 판단하려고 하니깐, 그것을 깨달아서 내면 속에서 고요하게 안정되어 있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야.

깨달은 이의 상태에서는 어떤 것에 대한 욕구가 전혀 없고, 자기 자신을 알려는 욕구조차도 없어. 자네는 몸-감각 기관에 집착되어 있어서, 백 살까지 살았어도 여전히 더 살기를 원하게 될거야.

질문자 : 선생님, 선생님을 찾아온 저희같은 무지한 구도자들에게 어떤 측은한 생각이나 걱정 같은 것을 전혀 느끼지 않으십니까? 

마하리지 :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나는 지(知)의 태양자체이므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지켜 볼 뿐이야.

질문자 : 점성학, 별들, 행운과 악운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마하리지 : 모든 것은 자기가 현재 있는 그 자리가 중요한 것이야. 자신의 ​옳바른 정체성을 일지 못하는 사람은 자연히 점성술,별, 운명 따위를 알려고 하겠지만, 진아 안에 단단히 자리잡은 사람에게는 그 어떤 것도 관심을 두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 그런 사람은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어.

질문자 : 절대적 상태는 영원합니다. 그러한 영원한 상태에서 어떻게 존재성과 같은 찰나적이고 일시적인 상태가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마하리지 : 그런 일시적인 상태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어떤 원인이 있어야겠지. 예를 들어 친한 친구 두 사람이 있는데, 서로 사이좋게 지내다가, 갑자기 말다툼을 벌이게 되었는데, 여기서 분명 어떤 갈등의 원인이 있었겠지. 어떤 알력이나 오해가 있었을 것이야, 마찬가지로 다섯가지 원소와 현상계가 그 절대적 상태에서 일어나게 한 어떤 원인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겠지. 이 제1원인은 설명을 넘어서 있어요.

친한 친구끼리 의견차나 알력 때문에 서로 등을 맞대고 돌아서듯이, 최초의 원소들인 지,수,화,품,공은 서로간의 마찰과 상호간섭에 의하여 절대본체로부터 생겨난 것이야. 그 과정이 계속되면서 다종다양한 형상들이 창조되어, 식물계와 동물계가 생겨난 것이야. '바나스빠띠'라고 불리는 식물계는 덤불, 초목, 나무 등이 있는데, 이것들은 한 곳에서  자랄 뿐 이동하지 않지. 진화의 다음 단계는 '바짜스빠띠'라고 불리는 단계인데, 여기에는 세균, 벌레, 동물과 인간들이 우굴대고 있어. 이런 종들은 이동과 의사소통의 특권을 가지고 있어.

인간은 신체적으로는 동물이지만 뛰어난 종이어서 '브리하스빠띠'라고도 불리는데, 인간은 의식이라고 하는 고도로 진화된 내거(內居)원리가 있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지혜를 얻고 그 자신을 초월하여 지고자에 도달할 수가 있어요.

그런 과정에서 처음에는 몸-마음에 조건지워져 있던 의식이 보편적 의식으로 발전하는데, 그래서 브리하스빠디라고 부를 가치가 있다는거야. 이 말의 뜻은 "무한한 크기의 주체'라는 것인데, 이것은 일체에 두루한 원리를 의미하는 것이야. 결국은 마지막에 보편적 의식은 절대자 속으로 가라앉게  되는 것이지.

질문자 : 생명기운이 몸을 떠날 때는 어떤 신체적 고통이 있는가요?

마하리지 : 개념들에 관련되어 있는 사람은 죽을 때 고통을 받을 수 밖에 없어. 그 고통의 강도는 그가 붙들고 있는 개념들의 의미에 따라 다 달라. 신에게 헌신하고 있고 개념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은 마치 잠이 들듯이 행복하고 평화롭게 죽는다구. 잠이 들 때 자네는 고통을 느끼나?

시인-성자 뚜가람은 그가 지은 시에서 말하기를, 식물들은 우리의 친척이자 우리의 조상이라고 했어. 어째서 그랬나? 식물들의 기운이 동물계인 바짜스빠띠과와 인간들의 브리하스빠띠과의 창조에 절대적인 필수요건이기 때문이야.

천상의 신들이 지구상에 화현하려면 인간의 형상을 취해야 하고, 식물의 기운을 섭취함으로서 자신의 몸을 유지해야하지. 신의 상태에 도달하려면 자네가 인간의 몸과 의식을 가져야 해.

하지만 최고의 상태에 안주하려면 다른 어떤 것도 할 필요가 없고, 이런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모든 일이 저절로 올바르게 일어나서 자네의 영적인 길 안내를 해주게 되어 있어.

방금 자네에게 다섯가지 원소(기본파동의식)들의 작용의 결과이자 음식기운으로 된 몸의 결과인 존재성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하지만 절대자로써의 '자네'는 그 몸이 아니고, 내면에 있는 존재성조차 아니야. 그런데 왜 그것이 떠나는 것에 대해서 걱정을 하고 있는가?

질문자 : 저희가 태어나기 때문에, 저희는 죽을 것이고 - - - ,

마하리지 : 궁극을 깨달은 이는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아. 그러나 그의 육신이 떨어져 나갈 때 주위 사람들은 슬픔에 잠겨 울지도 모르지만.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의 몸을 자기라고 동일시하나깐 그렇잖아. 따라서 그들은 깨달은 진인도 몸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알아야 돼 ! 

                                                                -THE NECTAR OF IMMORTALITY- 

[한담(閑談)]​ 

위의 대담록 번역문 중에서 한 대목을 뽑아서 한담(閑談)을 펼쳐 보겠습니다.

마하리지 대담록 문장에 나타난 겉모양의 내용은 일상용어로 쉽게 써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의미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가 있죠. 하지만 마하리지의 말씀 속에서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곳, 말이 나오기 이전의 그 곳을 가리키는 포인트를 잘 캐취하고 알아차려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말로 표현된 겉으로 나타난 의미만을 볼 뿐이지, 마하리지가 말씀하시는 평범한 대화 속에서 그 심오하고 감추어진 의미를 잘 파악들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마하리지의 평범한 한 구절 말씀 속에 묻어있는 말 이전을 알아차리는 것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마하리지 : 자기 자신의 지각성(앎)을 인식할 때, 그것이 바로 '내가 있다'는 느낌인데,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네는 그 깨달은 상태에 있는 거야. 그러나 자네는 욕망과 마음의 개념들을 통해서 그것을 보고 판단하려고 하니깐, 그것을 깨달아서 내면 속에서 고요하게 안정되어 있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야.

깨달은 이의 상태에서는 어떤 것에 대한 욕구가 전혀 없고, 자기 자신을 알려는 욕구조차도 없어. 자네는 몸-감각 기관에 집착되어 있어서, 백 살까지 살았어도 여전히 더 살기를 원하게 될거야. >


위의 문장에서 "자기 자신의 지각성(앎)을 인식할 때, 그것이 바로 '내가 있다'는 느낌인데,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네는 그 깨달은 상태에 있는 거야."라는 문장에 대해서 검토해 보겠습니다.

<자기 자신의 지각성을 인식할 때>라는 말씀에서, 보통 사람들은 이 문장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아마도 '자기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아는 상태' 즉 '자신이 현재 깨어있는 상태를 인식할 때"정도로 알겁니다. 즉 자기 자신이 지금 살아있어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 이것 저것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또잇 또잇 하게 알고 있을 경우라고 모두들 이해하고 있을 겁니다.

이것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이해하면 전적으로 마음을 통해서 대상적인 깨어있음만을 아는 것입니다.

즉 주의가 대상을 향해있기 때문에 이원적인 분별앎에 젖어 있는 상태입니다. 만일 이렇게만 이해하면 마하리지의 진짜 말씀하시는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관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새벽에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에 맨먼저 정신이 깨어나자마자 "내가 있다"는 느낌이 맨처음에 나타난 다음에 이어서 눈을 그대로 감은채로 어떤 생각이 나고 있던가, 아니면 눈을 뜨고는 어떤 생각이 나타나던가, 방안을 두리번거여 본다던가 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잠에서 처음으로 깨어나는 순간,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에 순수한, 대상없는 "내가 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마하리지는 위의 문장에서, 지금 이 잠에서 깨어나는 첫 순간의 "내가 있다"는 느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는 마음의 어떤 대상도 없고, 나라는 생각도 없으므로 보통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 상태는 마음 이전의 "내가 있다"이므로 내면의 "내가 있다"가 깨어나는 순간 극히 찰나시간에 나타납니다. 그 후로는 마음과 대상에 의해서 그 순수한 "내가 있다"바탕이 가려집니다. 즉 일단 깨어난 후 자기가 깨어났다고 인식한 후 마음이 움직이고 마음의 대상들이 나타나면 그 순수한 "내가 있다"뿌리는 마음의 장막 뒤편으로 가려집니다. 따라서 완전히 깨어난 마음 상태에서는 "모르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아까 처음 깨어나는 순간에 잠깐 드러났던 순수한 "내가 있다"는 없어진 것이 아니고, 그대로 배면에 있으므로 그로 인해서 마음이 대상을 알고 생각이 흐르며 움직이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 배경에 순수한 "내가 있다" 뿌리가 없으면 마음의 움직임도 없고, 대상도 알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다  마음 앞에 드러나 느껴지는 대상적인 느낌만을 대부분 "내가 있다"는 느낌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말로 표현하자면 이 생시상태의 모든 마음 작용도 "내가 있다"의 활동이지만, 그러나 "내가 있다"는 뿌리 그자체는 아닙니다. 마음 이전, 말이 나오기 이전, 말을 듣는 자는 "내가 있다"는 바탕을 말하는 것이지, 밖으로 드러나서 대상화된 마음의 느낌이 아니란 말입니다. 모든 드러난 것은 마음이든, 세상이든 그림자같은 헛것(환)이며, 마음이면의 드러나지 않은 것은 무조건 실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있다"도 드러나지 않은 마음이전의 뿌리가 진짜이고, 마음 위에 드러나 느껴지는 내가 있다는 느낌은 환(幻)의 그림자같은 가짜입니다.

마하리지가 말씀하시는 "내가 있다"는 앎이란 항상 이 드러나지 않은, 말이 나오기 이전의 바탕, 항상 있는 마음작용의 백그라운드를 말합니다. 그 순수한 "내가 있다"는 개인적인 존재느낌이 아니라, 전체 우주적인 무한한 느낌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는 모른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그것이 비록 육체에 의해서 생기긴 했지만, 그 의식 자체는 기본적으로 전체 우주적인 보편의식입니다. 그런데 보통 이것을 깨닫지 못한 우리 범부들은 항상 개인적인 느낌이나 마음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나타난 것에 걸려서 깊히 내면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모든 마음의 느낌이전에 전혀 알 수 없는, 마치 깊은 잠속에서는 자기 존재조차 모르는 것 같은 그런 것이 바로 이 순수한 "내가 있다"의 뿌리입니다. 그러나 그 "내가 있다"는 지금 현재 항상 여기 있지만. 그러나 모양과 색갈이나 속성이 전혀 없습니다. 

마음 이면에 항상 "내가 있다"가  있습니다. 그것을 알던 모르던 상관없이, 느끼던 못느끼던 상관없이 항상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죠. 그래서 항상 컴컴하게 모르는 내면에 자기 주의를 향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있다"를 마음으로 느끼거나, 어떤 마음상태을 가지고 아, 이것이 "내가 있다"이구나,하고 생각한다면, 절대로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어떤 상태나 느낌을 "내가 있다"라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순수한 "내가 있다" 뿌리가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조차 모르는 상태가 지속되어야 합니다.

"내가 있다"가 되라는 것은 마음의 주의를 아무 것도 모르는 컴컴한 내면으로 파고 들라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행여나 자기 마음에 나타나는 어떤 고요한 상태나 느낌, 평안한 경지를 "내가 있다"로 잘못 알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수행자가 순수한 "내가 있다" 뿌리에 도달했다면, 자기의 개인성이 없어지고, 전체 우주허공과 하나가 되어 무한성이 되므로 육체적인 개인적 느낌에서 벗어나게 됨니다. 다시 말하면 이 온갖 형태의 삼라만상의 경계가 실체가 없는 꿈결같은 환상의 그림으로 보게 됩니다. 따라서 대상에 대한 욕망이 저절로 서서히 녹아서 풀어지고, 억지로 하려는 행위(有爲行)가  줄어들면서, 생각과 말수(언어)가 적어지게 됩니다. 말하자면 '나'라는 것을 앞에 내세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소박해지고 겸손해지고 아량이 넓어져서 자기에게 인연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도와 주려는 자비마음이 저절로 생깁니다. 그리고 모든 마주하는 사물이나 사건에 대하여 중도의 입장에서 최선의 적정한 판단과 결정이 항상 저절로 자연스럽게 아주 잘 이루어집니다. 그렇다고  궁극에 까지 도달한 것은 아직 아닙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