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능엄경

능엄경 공부(59)

무한진인 2015. 5. 31. 19:56

[무한진인의 능엄경 공부하기 59회]


6) 깨달은 이(여래)는 다시는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다.


[본문]

[富樓那云若此妙覺 本妙覺明與如來心으로 不增不減호대 無狀忽生

山河大地諸有爲相인댄 如來今得妙空明覺이나 山河大地有爲習漏何

當復生 ]

 부루나가 말했다. “만약 이 묘각(妙覺)의 본묘각명(本妙覺明)이 여래

의 마음과 같이 부증불감하여 까닭 없이 문득 산하대지의 가지가지 유

위상(有爲相)이 생겼다면 여래께서는 지금 묘공명각(妙空明覺)을 얻으

셨으니 언제 다시 산하대지를 분별하는 유위(有爲)의 번뇌가 생기겠습

니까?”

[해설]

'묘각(妙覺)의 본묘각명(本妙覺明)'에서, 묘각(妙覺)은 본래부터 일체 중생들이 다 지니고 있는 본래부터 묘(妙)하고 본래부터 깨달아져 있는 각(覺)을 말하며, 이것은 본래부터 밝다(明)는 것을 말합니다. 이 본각명묘(本覺明妙)한 그 자리, 즉 부처님 마음이 중생보다 더 한 것도 아니고, 중생의 마음이 부처님 마음보다 덜한 것도 아니어서 똑같은 것인데, 부처님이 말씀하신대로, 까닭없이 홀연히 산하대지가 생겼다면, 여래께서도 중생처럼 무지했다가 깨달음을 얻었으니, 부처님이 성불하셔서 각(覺)을 증득하신 것이나, 중생이 본래부터 있는 묘각(妙覺)자리가 다 똑같은 것인데, 중생도 본묘각명에서 산하대지가 생겼으니 (부처님이 성불하신 본묘각명도 중생의 것과 같은 것이니)부처님도 중생이 되어 산하대지를 분별하는 분별심이  생기겠습니까? 묻는 것입니다. 즉 부처님이 성불하셨다지만, 언젠가는 다시 중생이 될수도 있습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루나의 질문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부루나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차이점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기 대문에 이런 질문이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잠깐 <기신론(起信論)>에서 본각과 시각의 의미에 대해서 한 구절 인용해 보면 "本覺의 의미란 시각(始覺)의 의미에 대해서 말한 것이니, 시각이 곧 본각과 같기 때문이다. 시각의 의미란 본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不覺이 있고, 불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始覺이 있다고 말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 말은 곧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은 기본적으로 둘다 허상을 초월한 본래 청정순수한 진여(절대본체)의 자리인데, 이것을 파동의식적으로 비유하면 파동성의 움직임이 사라진 절대공진(絶大共振)상태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즉 절대공진상태도 파동성이긴 하지만 파동움직임이 (영원히)정지된 상태입니다.

시각(始覺)이란 본각(本覺)에 의지한 불각(不覺,파동움직임)이 있고 난 후에 얻어지는 절대상태(眞如)이므로 불각(不覺)에 대한 각(覺)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파동의식적으로 말하자면 시각(始覺)이란 파동의 움직임이 있을 때에 그 파동움직임(주파수)이 아주 미세해져서 절대 공진상태에 흡수되어 파동움직임이 소멸된 상태가 아니라 최대 에너지 충전 상태가 되어 파동성의 가장 기본형(바탕)이 된 상태라고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즉 본각(本覺)은 원래 파동성이 없는 절대바탕 상태이지만, 시각(始覺)은 파동의 움직임을 통해서 미세한 파동주파수로 접근하여 절대공진상태에 흡수되어, 원래 파동성이 없는 절대본체상태에 공진되어 일체가 되었으므로 파동성 움직임(不覺)에 대한 각(覺, 휘드백)이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본각은 원래 절대바탕이고 시각은 불각(파동 움직임)을 통해서 그 파동성의 주파수가 극도로 미세해져서 본각의 절대바탕 상태에 공진되어 일체가 된 상태라고 비유적으로 표현 할 수가 있습니다.  

즉 시각(始覺)은 본각도 깨닫고, 불각도 깨달은 것이므로 다시는 불각의 미혹함이 없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자기 자신을 되돌려 비춰 보는 것(反照)을 자각(自覺)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마음의 작용을 전자기기의 작동 원리로 비유해 보자면 전기기기의 자기제어회로에서 그 장치의 출력에서 다시 자기입력으로 신호를 되돌리는 것을 휘드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만일 자기 출력에서 자기 입력으로 되돌리는 휘드백 량이 같으면 어떤 파동주파수를 발생하는 발진기가 되는 것이죠. 따라서 이때 어떤 특별한 주파수를 가진 전자 진동이 입력과 출력사이를 어떤 시간간격을 가지고 계속 회전하는데, 만일 이 입력과 출력 사이에 걸리는 시간이 제로(0,완전자각상태)라면 이때는 절대공진상태가 됩니다. 따라서 이때는 입력과 출력이라는 이원화 상태가 사라지고, 입력 출력이 오직 일체가 되어 입출력이 사라집니다. 둘이 있던 것이 하나가 되는 찰나에 하나조차도 사라지는 것이죠. 이 상태를 우리의 정신작용에 비유하자면 바로 절대 자각(絶大自覺)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상태가 바로 진여 또는 절대바탕상태라고 비유적으로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이 절대본체 외에 어떤 파장(주파수,시간성)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움직임이라면 이것은 파동성의식이 되어 존재의식 이후의 현상화 상태의 이원적인 의식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우리의식의 자각상태를 전자기기의 자기제어원리로 비유하는 것은 좀 더 알기 쉽게 이해하자는 의미로 비유를 내세운 것이지, 우리 의식과 자각을 전자기기 자동제어장치의 동작원리와 똑 같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해하기 쉽게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니 이 점에 대하여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본문]

[佛告富樓那 譬如迷人於一聚落 惑南爲北인댄 此迷爲復因迷而有

因悟而出 富樓那 如是迷人亦不人迷하며 又不因悟이니 何以故 迷

本無根이니 云何因迷이며 悟非生迷커니 云何因悟리잇고 ]

 부처님이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마치 미혹한 사람이 어떤 마을에

서 남쪽을 북쪽으로 잘못 알고 있다면 이러한 미혹은 미혹으로 인하여

있는 것이냐? 깨달음으로 인하여 나온 것이냐?”

 부루나가 사뢰었다. “이와 같이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것은 미혹으로

인한 것도 아니요, 깨달음으로 인한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미혹이

본래 뿌리가 없는 것인데 어떻게 미혹 때문이라고 하며, 깨달음에서는

미혹이 생길 수 없는데 어떻게 깨달음이라고 하겠습니까?”

[해설]

부처님이 ​답변을 하시는데, 그냥 직접적으로 말하면 이해가 잘 안될 것 같으니깐, 이해하기 쉬도록 비유를 써서 가르쳐 줍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으로 간 동네에서, 남쪽을 북쪽이라고 잘못 알고 있으면, 이 미혹은 본래 미(迷)한 것으로 인해서 지금 미(迷)가 생겼느냐는 것이죠. 이 미혹(迷惑)은 지금 방금 생긴 미(迷)가 아니라, 본래 부터 아무 것도 몰라서 남쪽을 북쪽이라고 하고 있느냐,  혹은 분명히 남쪽인 줄 아는 거기서 북쪽이라고 하느냐?고 묻습니다.

부루나가 말하기를,  이와같이 사람이 잘 몰라서 미혹되는 것은 원래부터 미혹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알고았다(悟)는 것으로 인한 것도 아니라고 미리 답부터 내놓고, 이유는 뒤에 댑니다. 즉 본래부터 미혹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와서 그렇게 미혹된 것이지, 그 미혹 이라는 것이 그 원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오기 전에는 이 사람이 미혹되지 않았으니깐, 원래부터 미혹되어 남쪽을 북쪽이라고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남쪽을 북쪽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미(迷)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깨달음(悟)에서 생긴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다른 곳에서는 분명히 동서남북을 잘 알던 사람이니깐 깨달아 있는 것(悟)인데, 그렇게 오(悟)하던 사람이 지금 여기와서 미(迷)했으니깐 오(悟)에서 생겼다고 할 수가 있지만, 그것은 다른 곳에서 오(悟) 한 것이지 이곳에서는 오(悟)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悟)로 인하여 미(迷)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니 미(迷)는 까닭없이 생긴 것이지 원인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부루나의 대답입니다.

[본문]

[佛告彼之迷人 正在迷時 焂有悟人하야 指示令悟하면 富樓那

意云何此人縱迷於此聚落 更生迷不不也世尊이시여 ]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저 미혹한 사람이 정말로 미혹하였을 때에

득 어떤 깨달은 사람이 옳게 지시하여 그리하여 깨닫게 한다면 부루나

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이 가령 지금 깨달았는데도 옛날

의 미혹 때문에 마을에 대하여 다시 미혹이 생기겠느냐?

 “그렇지 않겠습니다. 세존이시어!”

[해설]

그 미혹한 사람이 남쪽을 북쪽이라고 잘못 알고 있을 때에, 문득 먼저 알고(깨닭고)있는 사람이 가르쳐 주어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해 준다면, 또다시 남쪽을 북쪽이라고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부루나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즉 처음엔 몰라서 남쪽을 북쪽이라고 그랬지, 한번 안 후에는 그 마을에서 북쪽을 남쪽이라고 잘못 알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한번 깨친 사람은 다시는 미(迷)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된 후에는 산하대지를 분별하는 유위 분별상이 안생긴다는 것입니다.​


[본문]

[富樓那十方如來 亦復如是 此迷無本性畢竟空하니 昔本無迷호대

有迷覺하나 覺迷迷滅하면 覺不生迷니라 ]

 “부루나야! 시방의 여래도 역시 그러하니라. 이 미혹은 근본이 없

서 그 성품이 필경에 공한 것이니 옛날에는 본래 미혹이 없었으되, 지금

미혹하여 흡사 미혹과 깨달음이 따로 있는 듯하지만, 만약 미혹을 깨달

아 미혹이 없어지면 다시는 미혹이 생기지 않느니라.

[해설]

북쪽을 남쪽으로 잘못 아는 그 미(迷)는 본래 미(迷)할 근본원인이 없어서, 본래 공(空)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본래 공(空)하다는 말은 남쪽을 북쪽이라고 생각할 때에 남쪽이 북쪽으로 되지 않고, 공연히 생각만 그렇게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전에는 본래 미혹되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마치 미혹된 것처럼 잠깐 미(迷)해 보이는 것일 뿐, 또한 迷한 것을 깨달으면 미(迷)한 것이 없어지니깐, 미혹과 깨달음이 ​따로 따로 있는 듯 하지만, 만약 미혹함을 깨달아서 미혹이 없어지면, 깨달은 자리에서는 다시 미혹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부처님이 다시는 중생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한 가지 비유입니다.


[본문]

[亦如翳人 見空中華라가 翳病若除하면 華於空滅하니 忽有愚人於彼空華

所滅空地 待華更生하면 汝觀是人 爲愚爲慧 ]

 이는 마치 눈에 티끌이 들어 병이 난 사람이 허공의 꽃을 보는 것과 같아서

눈병이 만약 없어지면 그 꽃은 허공에서 저절로 없어지리니 갑자기 어떤 어

리석은 사람이 저 허공의 꽃이 없어진 빈자리에서 그 허공의 꽃이 다시 생기

기를 기다린다면 너는 그러한 사람을 볼 때에 어리석다고 하겠느냐, 지혜롭

다고 하겠느냐?

[해설]

눈병 때문에 허공꽃이 보이던 사람이, 눈병이 나면 허공꽃이 저절로 없어지는데,

그러면 더 이상 허공꽃이 왜 생기지 않는가 의심할 필요도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이 비유는 여래가 명각명공(妙覺明空)을 얻으면 또 다시 허망하게 산하대지와 온갖 유위법이 바라지 않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눈병이 다 나서 허공꽃이 보이지 않는데, 다시 허공꽃이 나오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죠.

깨닫고 나서 모든 마음의 대상이 다 허망한 환상이라는 것을  알게되면 대상에 대한 욕망도 사라져버린다는 것입니다.


[본문]

[富樓那言 空元無華어늘 妄見生滅하니 見華滅空호미 已是顚倒어늘 㩽令更

하면 寫實狂癡이니 云何更名如是狂人 爲愚爲慧니잇고 ]

 부루나가 말하였다. “허공에는 본래 꽃이 없거늘 허망으로 인하여 생멸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꽃이 허공에서 없어짐을 보는 것이 이미 전도인

데 다시 나오기를 바란다면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어찌하여 다시

이와 같은 미친 사람을 ‘어리석다, 지혜롭다’하고 논할 수 있겠습니까?”

[해설]

부루나가 대답하기를  원래부터 허공에는 꽃이 없었는데, 허공에서 꽃이 있다가 없어졌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인데, 다시 허공꽃이 나오기를 바란다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죠. 이런 미친 사람을 어떻게 어리석으니 지혜로우니 하는 말로 표현한다는 자체가 잘못됬다는 것입니다.


 [본문]

[佛言如汝所解인댄 云何問言諸佛如來妙覺明空 何當更出山河大地 ]

 부처님이 말씀하셨다.“네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그와 같다면 어찌하여

‘제불여래의 묘각명공(妙覺明空)에서 어느 때에 다시 산하대지가 나옵

니까?’하고 묻느냐?

[해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부루나가 위의 대답과 같이 이해한다면 모두 여래가 깨달은 묘각명공(妙覺明空)에서 다시 산하대지(대상화)가 나오냐고 묻는 것은 잘못된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깨달아서 비이원화의 절대본체가 된다면 더 이상 이원적인 대상화되는 분별심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문]

[又如金鑛雜於精金이나 其金一純하면 更不成雜이며 ]

 또 이는 마치 광석에 순금이 섞여 있다가 그 금이 완전하게 순금이 되면

다시는 섞이지 않는 것과 같으며,

[해설]

금이 섞인 광석을 제련하여 순금이 되면 다시 불순물이 섞인 금광석으로 되지는 않는 것과 같이

깨달아서 완전히 순수한 의식이 되면 더 이상 이원화 대상에 미혹되지 않는다는 비유입니다. ​


[본문]

[如木成灰하면 不重爲木인달하야 ]

 마치 나무가 불에 타서 재를 이루면 다시는 나무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해설]

깨달은 사람은 이원화 마음이 전부 소멸되어 무심이 되면, 더 이상 마음​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밝은 대낯에 떠 있는 하얀 달처럼, 절대 참나의 빛으로 인해 이원화 분별마음은  그 빛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한번 깨달으면 더 이상 어리석음(迷)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죠.


 [본문]

[諸佛如來菩提涅槃 亦復如是니라 ]

 여러 부처님과 여래의 깨달음과 열반도 이와 같느니라.

[해설]

보리와 열반을 증득한 후에는 다시 번뇌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대답했습니다.

부루나가 질문한 것에 대하여 부처님이 네 가지 비유를 들어서 깨달음을 이루면 다시는 전도된 대상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했읍니다.

즉 첫번째 비유에서, 남과 북의 방향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일단 옳바른 방향을 제대로 깨달으면 다시는 착각해서 방향을 잘못 헷갈리지 않으며,

두번째 비유에서, 한번 눈병이 났던 사람이 눈병을 제거하여 허공꽃을 보지 않게된 경우를 들어 여래가 묘각명공을 얻으면 다시 허망한 산하대지와 유위법을 낳지 않음을 밝힙니다.

세번째 비유에서, 이는 마치 금이 섞인 원광석을 제련하여 순금으로 만들어 놓으면 다시 불순물이 섞인 광석으로 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며,

네번째 비유에서, 불탄나무가 재가 된 것이 다시 생나무로 되지 않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들어서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여기서 부처님이 든 네 가지 비유를 둘로 나누어, 방향을 착각한 비유와 허공 꽃의 비유는 보리(菩提)를 설명한 것이라는 것이며, 순금의 비유와 불탄나무의 비유는 열반을 설명한 것으로 세밀하게  분석하여 보는 분들도 계십니다.

여기서 보리는 불성의 지(智), 동(動), 용(用)의 측면, 즉 작용측면을 말하며, 열반은 이에 상응하여 불성의 본체, 즉 이(理), 정(靜), 체(體)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래 청정하고 진공인 본각의 자리에서 세계와 중생의 일체 유위상이 형성되고 상속되는 연유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습니다. 본래부터 밝은 각(覺)을 허망하게 밝히려함으로서 주관과 대상의 이원화라는 무명(無明)이 생기고, 이에 따라 대상을 분별하는 마음이 생기고 허망한 지성의 능력이 생깁니다. 또한 분별은 같고 다름(同異)를 낳으니, 같고 다름이 서로 간섭하여 또 다른 파동성의식의 같고 다름을 잃으키므로서 점점 요란 뻑적지근해지고 그로 인해 피로가 생기고, 그로인해 피로와 갈등 번뇌가 쌓이는 허망한 세계의 그림자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허망한 파동의식, 즉 존재의식의 풍륜(風輪,파동)이 세계를 떠받치고 있고, 그 허망한 의식의 파동성 움직임으로 인해 세계가 상속되고, 중생들은 서로 비슷한 업과에 따라서 胎,알,濕,化의 형태로 윤회를 거듭하며, 殺,盜,淫의 業을 서로 주고 받으니 이로서 세계, 중생, 업의 전도가 유전하며 파동성 의식의 파도를 타고 끊임없이 돌고 도는 윤회의 수뢰바퀴를 맴돕니다. 이러한 전도된 현상은 모두 허망한 망견(妄見)으로 생긴 것이며, 이를 깨닫고 보리와 열반을 얻어서 다시는 이러한 전도된 윤회의 쇠사슬로부터 벗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