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능엄경

능엄경 공부(51)

무한진인 2015. 4. 20. 21:58

[무한진인의 능엄경 공부하기 51회]

6-5-7. 식대(識大)가 곧 여래장


[본문]

[阿難識性無源하야 因於六種根塵妄出하니라 ]

 아난아! 인식하는 성품[識性]이 따로 근원이 없고 다만 여섯 가지 근(根)

진(塵)에 의하여 허망하게 나오는 것이다.

[해설]

​"식성(識性), 즉 인식하는 성품"은 전육식(前六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전육식은 육근(六根)과 육진(六塵)의 상호관계에 의해서 잠시 나오는 것으로, 허망하다는 것은 그 고정된 실체(實體)가 없고 계속 변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변하는 것이고, 다른 것에 의존해서 잠시 생긴 것이므로 실(實)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본문]

[汝今遍觀此會聖衆 用目循歷하나니 其目周視호대 但如鏡中 無別分析

커든 汝識於中次第標指호대 此是文殊 此富樓那 此目犍蓮이며 此須

菩提 此舍利弗이니 ]

 네가 지금 두루 이 모임의 성스러운 대중을 살필 때에 눈으로 차례차례로

보게 되는데, 그 눈이 두루 보는 것이 마치 맑은 거울 속을 보는 것과 같아

서 달리 분별할 것이 없겠지만 너의 의식(意識)은 그 속에서 ‘이는 문수

(文殊)이고 이는 부루나이고 이는 목건련이고 이는 수보리이고 이는 사리

불이다’고 지목할 것이다.

[해설]

이제 6근(根) 가운데 눈(眼根)의 보는 작용을 예를 들었습니다. 거울에 영상에 비칠 때에 거울 자체는 그영상이 무엇이다, 즉 사과가 빨갛다는 등 분별을 하지 못하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드러낼 뿐인데(이것은 전오식과 8식의 작용), 눈의 작용이 바로 분별은 하지 않고 거울처럼 영상을 비치기만 한다는 것이죠. 즉 말없이 대상을 비치기만 할 뿐이며, 그러나 사과가 빨갛다, 또는 파랗다 등 분별심을 일으키는 것은 識(6識)이 하는 것입니다. 즉 눈 자체만 가지고는 분별할 수가 없고 의식(意識)이 작용해야 여러사람 가운데 앉아 있는 문수니, 부르나,목건련, 수보리라는 개인 별로 분별하여 알아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此識了知爲生於見 爲生於相 爲生虛空 爲無所因호대 突然而出가 ]

 이 식(識)의 분별해 아는 성품이 견근(見根)에서 생기느냐, 바깥 대상[塵

相]에서 생기느냐, 허공에서 생기느냐, 원인이 없이 돌연히 나온 것이냐?

[해설]

따라서 이 식(識)안에서 분별해 아는 성품이 눈에서 나오는 것이냐, 눈밖의 대상물에서 생기는 것이냐, 허공에서 생긴 것이냐, 여기서 허공에서 생긴 것이냐고 물어 본 것은 눈과 대상을 떠나서 생긴 것이냐, 라고 묻는 말과 같습니다. ​원인없이 갑자기 생긴 것이냐라는 말은 눈이나 대상물이나 허공 등이 없이, 아무 원인도 없이 생겼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미리부터 이렇게 물어 놓는 것입니다.


 [본문]

[阿難若汝識性 生於見中인댄 如無明暗及與色空하야 四種必無하면

汝見하리니 見性尙無어니 從何發識이리요 ]

 아난아! 만약 너의 분별해 아는 성품[識性]이 보는 견근(見根)에서 생긴

면 명(明) 암(暗) 공(空) 색(色)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고, 이러한 네 가

지가 반드시 없다면 원래로 너의 보는 성품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보는 성

품도 오히려 없는데, 어디에서 식(識)의 작용이 발생하겠느냐?

[해설]

만약 분별하여 아는 성품이 보는 눈에서 생긴다면, 대상물인  밝음과 어둠이라는 색과 허공​이 없는데, 즉 눈(根)만 있고 보여지는 대상(塵)이 없는데, 보는 작용이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눈이 무엇을 본다는 것은 보는 주체인 눈과 보여지는 대상이 있어야 본다는 작용이 성립되는데, 명,암,색,공,이런 대상들이 없는데, 어떻게 본다는 작용이 성립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성품이 없는데,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식(識)이 어떻게 작용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본문]

[若汝識性 生於相中인댄 不從見性이리니 旣不見明하고 亦不見暗하며

暗不矚인댄 旣無色空하리니 彼相尙無어니 識從何發하리요 ]

 만약 너의 분별해 아는 성품[識性]이 바깥 대상에서 생긴다면 보는 견근

(見根)과는 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밝음도 보지 못하고 또한

어두움도 보지 못하며, 밝고 어두움에 속하지 않는다면 곧 색(色)과 공(空)

도 보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이 대상을 볼 수 없는데, 식(識)이 어떻게 발

생하겠느냐?

[해설]

만약 분별하여 아는 성품이 보여지는 대상(相)에서 ​생긴다면, 보는 눈(根)과는 상관이 전혀 없으므로, 눈이 앞의 대상(明,暗,空,色)을 보지 못하는데, 보는 작용 속에 들어 있는 분별하는 앎이 어떻게 생기겠느냐는 것입니다. 보는 작용이 성립될 수가 없는데, 어떻게 보는 작용 속에 들어있는 분별심이 작용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해설]

[若生於空인댄 非相非見이니 非見無辯하야 自不能知明暗色空하며 非相滅

하야 見聞覺知 無處安立하리라 處此二非인댄 空則同無하고 有非同物

하리니 縱發汝識한들 欲何分別이리요 ]

 만약 식(識)이 허공에서 생긴다면 대상과도 관계가 없고, 보는 견근(見根)

과도 관계가 없다. 이와 같이 보는 견근(見根)과 관계가 없다면 분별함도

없어서 자연 명암과 색공을 알지 못할 것이고, 대상과 관계가 없다면 반연

이 없어서 보고 듣고 깨달아 안다는 것이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대상과도 무관하고 보는 견근(見根)하고도 무관한데, 허공이

그대로 식(識)이라면 없는 것과 같고, 허공에 식(識)이 있다 하여도 뼈대

[體]를 세울 수 없어 밖의 사물과는 같지 않을 것이니 설사 너의 식(識)이

생긴다 해도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느냐?

[해설]

만일 보는 작용 속에서 분별하여 아는 성품이 허공에서 생긴다고 가정해 보면, 허공은 보여지는 대상도 아니고, 또한 눈과도 직접 관계가 없​으므로, 보는 주체와도 관계가 없고, 보여지는 대상(相)과도 관계가 없는 것이죠.  그러므로 보는 눈과 관계가 없다면 크다, 적다 등을 분별할 수도 없어 당연히 대상(明暗色空)을 알지 못하며 , 대상(塵)이 있어야 아는 성품(識)이 생기는데, 상(相)이 아니라고 한다면 관련됨이 없으므로 6근의 작용인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작용(見聞覺知)이 성립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보는 작용 속에서 분별하고 아는 의식(意識)은 보여지는 대상과도 관계가 없고 보는 눈과도 관계가 없으므로, 허공 자체가 식(識)이라면, 보는 작용 속에서는 분별하여 아는 식(識)이 없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즉 非相非見(비상비견)이면 識이 공(空)하 다는 것인데, 식(識)이 아주 없다는 것이니깐, 분별하는 앎자체가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설사  식(識)이 있다 하더라도, 상(相)과 근(根)을 초월하여 있는 것(空)이므로 실체하지 않는데, 설사 식(識)을 일으킨다해도 상(相)이 없는데 무엇을 분별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식(識)이 있다 하드래도 식(識)이 작용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若無所因호대 突然而出인댄 何不日中 別識明月 ]

 만약 이 식(識)이 까닭 없이 돌연히 나온 것이라면 어찌하여 한낮에는

은 달을 분별하지 못하느냐?

[해설]​​ 

만일 원인도 없이 식(識)이 갑자기 생기는 것이라면, 낮에도 달의 밝음을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대낮에도 달은 떠 있지만, 밝은 달을 보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 있는 것이지, 원인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식(識) 자체가 생긴데가 있다,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있는 곳에만 치우치지, 여기서는 식(識)도 대(大)라고 해서 청정본연하고 전체에 두루 펼쳐져 있다고 말하려고 하니깐, 어디 한곳에서만 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본문]

[汝更細詳微細詳審하라 見託汝晴하고 相推前境하니 可狀成有하고 不相成

어니와 如是識緣 因何所出 識動見澄이라 非和非合이며 聞聽覺知亦

復如是하니 不應識緣 無從自出이니라 ]

 너는 다시 세밀하고 자세하게 살피고 관찰하라. 보는 견근(見根)은 너의

눈[眼睛]에 의탁하고, 대상은 앞의 경계를 가리키는 것이니 가히 설명[形

狀]할 수 있는 것은 다 온 곳이 있을 것이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다 온

곳이 없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다면 의식[識]의 반연[識緣]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식(識)은 움직이는 것이고 보는 성품은 청정한 것이니 화합에서 나온 것

도 아니며, 청문각지(聽聞覺知)도 이와 같다. 그렇다고 이 의식의 반연[識

緣]이 온 곳이 없이 스스로 있는 것도 아니다.

[해설]

세밀히 관찰해 보면, 보는 것은 눈으로 因하고, 보여지는 앞에 있는 대상경계인데, 대상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 형상이 있는 것이니, 어딘가에서 나온 데가 있는 것이고, 형상이 없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나온데가 없는데, 그런데 식(識)은 어디서 생긴 것이냐고 묻습니다. 즉 보는 주체(눈)도 아니고, 대상(境)도 아니고, 어디서 식(識)의 반연되어 생기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은, 즉 본래부터  있는 것이지, 어딘가에서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는 말과 같습니다.

보고 분별하는 식(識)은 움직이는 것(의식파동성)이고, 앞에서 보는 성품인 견(見)은 거울과 같아서 움직임이 없이 청정한 것이라고 했는데, 움직이는 것(聽聞覺知)과 청정한 것(見)이 성질이 서로 어긋나므로 서로 화합(化合)할 수가 없으며, 청문각지(聽聞覺知), 즉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는 六識도 또한 각각에 딸린  견(見,주시작용)이 공통으로 붙어 있어서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원래는 육식의 작용을 견문각지(見聞覺知)라고  불러야 되겠지만, 근본바탕의 주시작용인 보는 성품의 견(見)과 육식의 견문각지(見聞覺知)의 견(見)자가 헷갈릴 수 있으므로,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해서 청문각지(聽聞覺知)라고 해서,견(見)자를 청(聽)자로 글자를 바꾼것 같습니다.


[본문]

[若此識心本無所從인댄 當知了別見聞覺知 圓滿湛然하야 性非從所라

兼彼虛空 地水火風으로 均名七大 性眞圓融하야 皆如來藏이라 本無

生滅이니라 ]

 만약 이 식심(識心)이 본래로 온 곳이 없는 것이라면 응당 요별하여 견

각지하는 것도 원만하고 담연하여 그 성품이 본래 온 곳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응당 저 허공이나 지수화풍과 함께 균등히 칠대(七大)라고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품이 참되고 원융하여 모두가 여래장이어서 본래

생멸이 없기 때문이다.

[해설]

이 분별하여 아는 마음의 뿌리가 어디서 왔는지 찾을 수가 없으므로, 그 식심이 반연된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6근의 작용도 역시 그 근원이 어디서 나온지를 찾을 수 없으므로, 전체에 두루 펼쳐져 있고 담연하여 본래부터 나온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서의 저 공대(空大), 지대(地大),수대(水大),화대(火大),풍대(風大),와 바로 앞의 견대(見大 또는 根大)와 함께, 이번의  식대(識大)를 포함에서 칠대(七大)라고 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도 성품이 순수하고 전체에 골고루 펼쳐져 있어 모두 여래장이므로 본래 생멸이 없기 때문에 대(大)자를 붙혀줄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어디서 나왔는지 증명이 되면,生하고 滅하는 것이어서 다시 그것이 나온 근원으로 되돌려 보낼 수가 있는데, 견(見)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대상(相)에서 나온 것도 아니므로, 어디에서 나온 데가 없으므로, 생멸이 없는 원만하고 담연한 것이므로 식(識)도 또한 오대와 견대에 이어서 식대(識大)라고 대(大)자를 붙여줄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阿難汝心麤浮하야 不悟見聞發明了知가 本如來藏하나니 汝應觀此六

處識心하라 爲同爲異아 爲空爲有아 爲非同異아 爲非空有아  ]

 아난아! 너의 마음이 거칠고 들떠서 보고 듣고 드러내 아는 것이 그대로

본래의 여래장임을 알지 못하는구나! 너는 응당 보고 듣고 알고 하는 이

육처(六處)의 식심(識心)이 저 근진(根塵)과 같은가, 다른가? 그 자체가

공(空)인가, 유(有)인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가? 공도 아니

고 유도 아닌가? 이를 잘 관찰해 보아라.

[해설]

아난의 마음이 밖으로 움직이는 대상에만 팔려 있어서 헤메고 있으므로, 보고 듣고 명확하게 이해하는 마음이 그대로 청정본연한 여래장 그 자체임을 아직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견문각지하는 6식의 작용이 여래장 그 자체임을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이 보고 듣고 아는 육식의 마음이 저 6근, 6진과 같은가 다른가 묻습니다. 즉 분별하는 마음의 근원(識心)이 감각기관 또는 그 대상과 같은 것이나 다른 것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또한 식심(識心)이 공(空)하냐, 아니면 형상이 있냐,고 묻습니다.

그 자체가 공(空)도 아니고, 유(有)도 아니고,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가?라고 묻습니다. 즉 이원화 현상에서 말할 수 있는 모든 논리적 표현을 다 동원하여 표현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원화적인 모든 논리적 표현을 적용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汝元不知로다 如來藏中 性識明知 覺明眞識 妙覺湛然周遍法界

하야 含吐十虛이니 寧有方所리오 循業發現하거늘 世間無知하야 惑爲因緣

及自然性하나니 皆是識心分別計度이요 但有言說都無實義니라 ]

 너는 원래 이 여래장 가운데 성품이 식(識)의 진공(眞空)의 명지(明知)와

성품이 각명(覺明)의 진식(眞識)이 묘하게 깨어 있어 담연(湛然)하고 법계

에 두루 함을 알지 못하는구나!

 앞에서와 같이 식의 성품이 본래 법계에 두루 하고, 사방의 허공을 머금고

토하는 것인데, 어찌 장소가 따로 있겠느냐? 이러한 식(識)이 다 업에 따라

나타난 것이거늘, 세상 사람들이 무지하여 이것을 ‘인연의 성품이니 자연

의 성품이니’하고 미혹하는 것이다. 이는 다 식심(識心)으로 분별하고 계

탁한 것이니 다만 언설(言說)이 있을지언정 도무지 실다운 뜻이 없다.

[해설]

'여래장 가운데 "성품이 識의 眞空인 明知'라는 것은, 제9識(또는 8식)의 본바탕의 성품은 움직임없는 절대 공진상태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품의 잠재되어 있는 작용(用)이 식(眞識)이라고 하는데, 이 순수한 식(眞識)은 바로 여래장 속에 잠재해 있는 파동성의 순수한 씨앗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여래장 속에 잠재해 있는 의식의  씨앗은 원래  움직임없는 순수한  공(空)이므로  진공(眞空)이라고 한 것이고, 이 잠재된 순수한 파동성 씨앗 자체가 순수한 자각의 빛으로서 명지(明知)라고 한 것이죠. 즉 체(本體) 입장에서 본 용(用)을 말하며, 공(空)의 식(眞識)을 표현한 것입니다. 체(體)와 용(用)이 공진 합일되어 동일한 상태를 말합니다.

"性品이 覺明의 眞識"도 여래장의 바탕 성품은 움직임이 없지만, 용(用) 측면에서 본다면 그 본바탕 성품을 자각의 빛(覺明)이라고 하고, 각명을 용(用)적인 측면에서 순수한 의식(眞識)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태양이 태양빛이고, 태양빛이 태양 그자체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깐 이 절대 본체의 여래장 속에서 청정 본연한 밝은 앎과 순수한 의식이 묘하게 깨어 있어서 전체에 두루 펼쳐져 있다는 것입니다.

십방 허공을 포함하기도하고 토해내기도 한다는 것은 여래장의 한점으로부터 온세상이 만들어졌다가 없앴다가 한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한 생각에 파동성의 온세상 그림을 토해내어 보여주고, 한생각에 온세상의 파동성 그림을 한모금을 마셔버린다는 것입니다.

마치 여래장 한점의 불랙홀로부터  온 우주가 흘러 전체에 퍼져 나오거나, 온 우주가 단번에 흡수되는 것처럼, 전체 파동생기력을 마치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처럼 내뿜었다 들이쉬고, 내뿜었다 들이쉬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식(識)이라는 것이 (안식,이식,비식 등등 처럼)어떤 특별한 장소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식(識)이 어디에나 공통적으로 편재해 있지만, 그러나 식(識)이 중생의 마음 먹은데 따라서 자기가 한 행동의 업에 따라서 작용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하고 깨끗한 業에는 선식(善識)이 나타나고 ,오염된 업을 따르면 이원적이고 타락한 중생의 마음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식(識)이 비이원적이며 순수하고 청정하게 전체에 두루하여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인데, 세상사람들은 이러한 진리를 모르고서, 자기의 오염된 분별심에 의해서 이원적인 현상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니, 이것을 인연으로 생긴 것이니, 자연적인 것이니 하며, 단편적인 대상화 개념으로만 잘못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편협한 분별심으로만 따질려고 하니 말과 허황한 개념만 만들고 있을 뿐, 실(實)한 것은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고 허망한 말장난으로 시간만 보낸다는 것입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