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능엄경

능엄경 공부(34)

무한진인 2015. 1. 31. 19:29

 

[무한진인의 능엄경 공부하기 34회]


6-2-4. 설입(舌入)이 곧 여래장


[본문]

[阿難譬如有人 以舌舐吻하며 熟舐令勞 其人若病하면 則有苦味하고

無病之人이면 微有甛觸인달하야 由甛與苦 顯此舌根하고 不動之時

淡性常在어니와 兼舌與勞 同是菩提瞪發勞相이니라 ]

 아난아! 마치 어떤 사람이 혀로 입술을 핥아 오래되면 피로[勞]가 생기는데, 그

사람이 만약 병(病)이 있으면 쓴맛을 느끼게 되고, 병이 없으면 약간의 단맛을 느끼는 것처럼 이러한 달고 쓴 것[甛苦] 때문에 저 설근(舌根)이 드러나게 되고, 핥지 아니할 때에는 담담함[淡性]이 항상 따르게 되는데, 이러한 혀와 피로가 다 깨달음이 밝음을 고집하여 그로 인한 미혹[勞,피로]으로 생긴 현상이니라.

[해설] 

본래 입술에는 쓰고 단것이 없는데, 혀로 입술을 오래 핥아서 피로가 생기면 병난 사람은 쓴 맛을 느끼게 되고, 병이 안난 사람은 달콤한 감촉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혀가 아무 것도 핥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는 담담한 맛이 항상 있는데, 이러한 쓰고 단맛과 아무 맛도 없는 담담함이 모두 보리 여래장의 피로가 변해서 나타난 것이라고 합니다. 이말은 즉, 보리여래장은 아주 평형되고 안정되어 움직임조차 없는 공진파동성인데, 이 파동성이 어떤 원인으로 평형이 흐트러져 불안정한 파동성이 되면 여러가지 감각작용을 일으킨다는 말과 같습니다.


 [본문]

[由甛苦淡二種妄塵으로 發知居中吸此塵象하니 名知味性이니와 此知味

離彼甛苦及淡二塵코는 畢竟無體니라 如是阿難當知 如是嘗苦淡

非甛苦來 非因淡有이며 不於根出이며 不於空性이니라 何以故 若甛苦

인댄 淡卽知滅이니 云何知淡하며 若從淡出인댄 甛卽知亡이니 復云何

知甛苦二相이리요 若從苦生인댄 必無甛淡及與苦塵이니 斯知味根

自性하리라 若於空出인댄 虛空自味일새 非汝口知이며 又空自知커니

何關汝入이리요]

 이러한 달고 쓴 것[甛苦]과 담담함[淡]의 두 가지 허망한 경계로 인하여 앎이 생서 그 가운데 대상을 흡입하니 이를 맛을 아는 성품[知味性]이라 부르지만 이러맛을 아는 성품이 저 달고 쓰고 그리고 담담함의 두 가지 경계를 여의고는 필경 체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아난아! 응당 이와 같이 달고 쓰고 담담함을 맛보아 아는 성품이 달고

것에서 온 것도 아니고, 담담함으로 인하여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혀[根]에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허공에서 생긴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달고 쓴 맛이 있는 것에서 나왔다면 담담함은 바로 없어진다는 것을 아는데, 어떻게 담담함을 알 것이며, 만약 담담함에서 나왔다면 달고 쓴 것등 맛이 있는 것은 바로 아는 것이 없어질 것이니 어떻게 다시 달고 쓴 두 모습을 말할 수 있겠느냐?

만약 혀에서 생긴 것이라면 반드시 달고 쓴 것 등 맛이 있는 것과 더불어 담담함의 경계가 없을 것이니 이 맛을 아는 설근은 본래 스스로 성품이 없어야 할 것이다.​

만약 허공에서 나왔다면 허공이 스스로 맛보기 때문에 응당 너의 입[口]은 알지

해야 할 것이며, 또 허공 스스로가 아는데 너의 설입(舌入)과 무슨 상관이 있겠냐?

[해설]

달고 쓴것 등 맛이 있는 것이 한개, 또한 맛이 없는 것 담담함이 한개, 이렇게 두 가지 경계로 인해서, 혀가 대상을 접촉하여 분별하는 것을 맛을 아는 성품이라고 부르는데, 이 맛을 아는 성품이라는 것이 달고 쓴 것등 맛이 있는 것과 맛이 없는 담담함의 두 가지 경계를 떠나서는 그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맛을 아는 앎 자체는 달고 쓴 맛 등 맛이 있는 것에서 온 것도 아니고, 또한 아무 맛도 없는 담담함에서 온 것도 아니고, 혀 자체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허공에서 생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만일 달고 쓴 것등 맛이 있는 것에서 앎이 나왔다면  아무 맛도 없는 담담함에 대한 앎은 없기 때문에 담담함을 알지 못할 것이며, 만일 맛을 보는 앎이 아무 맛도 없는 담담함에서 나왔다면 달고 쓴 맛 등 맛이 있는 것에 대한 앎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달고 쓴 맛을 알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맛을 보는 앎이 혀 자체에서 나왔다면  달고 쓴 것등 맛이 있는 것과 맛없는 담담함의 두 가지 경계와는 상관이 없으니 맛을 본다는 그 자체의 성품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맛을 아는 앎이 허공에서 나왔다면  허공 자체가 맛을 보기 때문에 사람 입과는 상관이 없어서 입은 알지 못할 것이며, 또 허공 스스로가 아는데, 아난의 혀가 맛보는 작용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是故當知하라 舌入虛妄하야 本非因緣非自然性이니라

 그러므로 응당 이 맛보는 설입(舌入)의 현상이 허망하여 성품이 본래 인연도 아

고 자연도 아닌 여래장 묘진여성(妙眞如性)임을 알아야 한다.

[해설]

그러므로 응당 이 혀의 맛보는  현상(모양,相)은 어디서 온 곳이 없으므로 허망하지만, 그 본래 성품(性) 자체는 인연작용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있는 것도 아닌 여래장 묘진여성이라는 것입니다.

 

 6-2-5. 신입(身入)이 곧 여래장


[본문]

[阿難譬如有人 以一冷手 觸於熱手함에 若冷熱多하면 熱者從冷하고

若熱功勝하면 冷者成熱인달하야 如是以此合覺之觸으로 顯於離知어니와

涉勢若成함은 因于勞觸이니 兼身與勞 同是菩提瞪發勞相이니라 ]

 아난아! 마치 어떤 사람이 찬 손으로 따뜻한 손을 잡았을 때[觸]에 만약 찬 기운많으면 따뜻한 손이 차가와질 것이고, 따뜻한 기운이 많으면 찬 손이 따뜻해지는 것처럼, 이와 같이 손 그 자체에는 분별이 없으나 합하여 느끼는 감촉 때문에 차고 더움의 다름과 합하고 떨어짐의 앎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서로 섭렵(涉獵)하는 세력이 이루어지는 것은 다 피로한 감촉 때문이요, 더 나아가서는 몸과 피로가 다 깨달음이 밝음을 고집[瞪]하여 그로 인한 미혹[勞,피로]으로 생긴 현상이니라.

[해설]

두 손이 똑같이 차고 똑같이 더울 때도 있겠지만,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은 밖에 있어서 하나는 차고 하나는 따뜻한 경우에는, 찬손과 더운 손을 마주대면 찬기운이 많으면 덥던 것이 더불어 싸늘해질 것이고, 만약 더운 기운이 강하면 찬 것이 더워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와같이 두 손을 합쳐서  감촉되는 것을 가지고 찬손은 더운 것을 깨닫고, 더운 손은 찬손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합해서 아는 촉감입니다.

합하지 않을 때는, 찬손도 찬것을 모르고 더운 손도 더운 것을 모르는데, 이것을 마주 갖다 대서 합하면, 그 합할 때에 깨닫는 감각을 가지고서, 떼었을 때에 아는 것을 나타낸다는 말씀입니다. 찬손은 더운 것을 깨달을 것이고, 더운 손은 찬것을 깨달을 것이니깐, 합해서 깨닫는 것을 가지고, 떼었을 때도 이것은 차다, 이것은 덮다 하는 것을 알게 되는 도리가 자연히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섭렵하는 세력이 이루어진다는 말은, 찬 기운이 많으면 더운 손도 차지고, 더운 기운이 많으면 찬손도 더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감촉의 변화나 몸의 감촉들이 모두 보리 여래장이 피로해서 발생한 상이라는  말은, 원래 보리여래장은 움직임조차 없는 완전 절대공진상태의 순수한 파동 에너지가 한곳에 뭉쳐진 것이지만, 어떤 이유로 일부분이 공진에너지의 평형이 깨쳐서(피로해져서) 불안정한 파동에너지를 일부 일으켜서 공진에너지 밖으로 일부 변형된 파동에너지가 튀어 나온 현상이 나타난 것이 바로 감각기관과 감각현상들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본문]

[因于離合二種妄塵으로 發覺居中吸此塵象하니 名知覺性어니와 此知覺

離彼離合 違順二塵畢竟無體니라 如是阿難當知是覺非離合來

違順이며 不於根出이며 又非空性이니라 何以故若合時來인댄 離當

已滅이니 云何覺離리요 違順二相亦復如是니라 若從根出인댄 必無離合

違順四이니 卽汝身知元無自性이요 必於空出인댄 空自知覺커니 何關

汝入이리 ]

 여의고 합하는 두 가지 허망한 경계로 인하여 분별이 생겨서 그 가운데 대상을

하니 이것을 아는 성품[知覺性]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아는 성품의 실

체가, 의고 합하는 것과 어기고 따르는 두 가지 허망한 경계를 떠나서는 필경

실체가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아! 이러한 아는 성품[知覺性]이 여의고 합하는 곳에서 나온 것도

니고, 어기고 따르는 것으로 인하여 있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이 아는 성품이 합할 때에 온 것이라면 떨어질 때에는 곧 합을 따없어질 것이니 어떻게 떨어짐을 알며, 어기고 따르는 두 가지 경계도 마찬 가지이니라.

 만약 아는 성품[知覺性]이 몸에서 생긴다면 반드시 떨어지고 합하고 어기고 따

[離合違順] 네 가지 경계와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이니 너의 몸이 아는 것은

자성이 없을 것이다.

 만약 허공에서 나왔다면 허공이 스스로 아는데 너의 신입(身入)과 무슨 상관이

느냐?

[해설]

떨어지고 합쳐지는 두 가지 허망한 경계에 대한 분별이 생겨서, 그 이 분별감을  대상으로 받아 들여 ​이것을 촉감을 아는 성품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촉감을 아는 성품의 실체는, 떨어지고 합하는 것과 자기 몸에 알맞게 여기고 자기 몸에 거슬리게 느끼는 두 가지 허망한 경계를 떠나서는, 그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감촉을 아는 지각성은, 떨어지고 합하는 것에서 온 것도 아니고, 자기 몸에 알맞는 것과 자기 몸에 거슬리는 것 등으로 인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만약 촉감을 아는 성품이  합할 때에 생기는 것이라면, 떨어질 때는 그 앎이 없으므로 떨어진 것을 알지 못할 것이며, 떨어질 때에 촉감을 아는 성품이 생긴 것이라면 합할  때는 앎이 없으므로 합한 것을 알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촉감을 아는 성품이 몸에서 생긴 것이라면, 떨어지고 합하고, 몸에 적합하고 거슬르고 하는 네 가지 현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이므로 너의 몸이 그 촉감을 안다는 그 성품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허공에서 촉감을 아는 자성이 나왔다면 허공 스스로 아는데, 너의 몸에서 느끼는 촉감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是故當知하라 身入虛妄하야 本非因緣非自然性이니라 ]

 그러므로 응당 느끼는 신입(身入)의 현상이 허망하여 성품이 본래 인연도 아니연도 아닌 여래장 묘진여성(妙眞如性)임을 알아야 한다.

[해설]

그러므로 당연히 몸으로 느끼는 촉감의 현상(모양,相)은 어디서 온데가 없으므로 허망한 것이고, 그 본래 성품(性)은 인연작용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있는 것도 아닌 여래장 묘진여성임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