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능엄경

능엄경 공부(24)

무한진인 2014. 12. 25. 20:19

[무한진인 능엄경 공부하기24]


4-11. 견(見)은 보는자와 보는 대상을 벗어나 있다.


ㅇ. 아난의 질문 - 인연은 제일의제가 아님


[본문]    

<阿難白佛言호대 世尊必妙覺性 非因非緣인댄 世尊云何常與比丘

說見性具四種緣하니 所謂因空因明 因心因眼하시니 是義云何닛고

佛言 阿難 我說世間 諸因緣相이언정 非第一義니라 >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어! 반드시 이 묘한 깨달음의 성품[覺性]

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라면 세존께서는 어찌하여 항상 비구들에게

‘보는 성품이 작용을 하려면 네 가지 인연을 갖추어야 한다 말하자면 허공을

으로 삼고, 밝음을 인으로 삼으며, 마음을 인으로 삼고, 눈을 인으로 삼는다’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아난아! 그것은 내가 세간의 가지가지 인연의 모습[相]

말한 것이지, 제일의제(第一義諦)를 말한 것은 아니다.

[해설]

아란이 물은 각성(覺性)은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눈으로 보는 견식(見識), 즉 안식(眼識)을 말합니다. 부처님이 안식(眼識)을 말씀하셨는데, 아란이 이것을 見性이라고 표현했지만, '보는 성품', 우리가 눈으로 보는 안식(眼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눈으로 보고 인식하려면, 즉 眼識이 생기려면 사종연(四種緣)을 갖추어야 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이것은 소승에서 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즉 안식이 생기려면 공(空)이 있어야 하고, 명(明)이 있어야 되고, 심(心)이 있어야 되고, 안(眼)이 있어야 되는데, 空이 있어야 된다는 것은 막힌 것이 있으면 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明이 있어야 된다는 것은 어두울 때는 보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한 마음도 있고, 눈도 있어야 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心)은 소승에서 하느 말이니까 제6識을 가리킵니다.

아란의 물음이, 見이 인연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왜 부처님께서 4종연(空,明,心,眼)이 있어야 된다고 하셨는지 묻는 것입니다.

그랬드니, 부처님 대답이, 그것은 세간의 생멸법(生滅法)을 이야기한 것이지, 제1의제(眞性)를 말한 것이 아니라고 대답하십니다. 인연으로 생기는 모든 상은 생멸법(生滅法)이므로 네가지 연(緣)을 말한 것이지, 우리의 진성(眞性)자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인연(因緣)이다, 자연(自然)이다, 하는 것들은 세간의 생멸법에 대해서 한 이야기지, 비이원적인 제일의(第一義),진성(眞性)의 견(見)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ㅇ. 망심으로 보는 것과 견성의 차이점

[본문]     

<阿難吾復問汝하노라 諸世間人說我能見하니 云何名見이며 云何不見

難言世人因於日月燈光하야 見種種相名之爲見이오 若復無此三種光

하면 則不能見이니라 >

 아난아! 내가 다시 너에게 묻는다. 모든 세상 사람들은 ‘내가 본다’고 말하는데

어떤 것을 ‘본다’고 하고. 어떤 것을 ‘보지 못한다’ 하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상 사람들은 해나 달이나 등불의 빛으로 인하여

갖가지 모양을 보게 되면 이를 ‘본다’하고, 만약 이 세 가지 빛이 없으면 곧 ‘보

못한다’고 합니다.”

[해설]

아란의 대답이, 빛이 있어야 '본다'고 하고, 빛이 없으면 '보지 못한다'고 대답합니다.

단순히 눈으로 대상을 보는 것만을 말합니다.


[본문]

<阿難若無明時 名不見者인댄 應不見暗하리라 若必見暗인댄 此但無

리요 >

 “아난아! 만약 빛이 없을 때에 ‘보지 못한다’고 하면 응당 어둠도 보지 못해야 것이다. 만약 어두움을 본다면 이는 다만 밝음[明]이 없을 뿐이거늘, 이를 어찌 는 성품[見]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해설]

빛이 없는 것은 단순히 밝음이 없는 것이지, 보는 성품인 見이 없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밝음(明)과 보는 성품(見)은 다르다는 것이죠. 


[본문]

<阿難若在暗時 不見明故 今在明時不見暗相 還名不見이니

相俱名不見이로다 >

 아난아! 만약 어두울 때에 ‘밝은 것을 보지 못한다’하여 이것을 보지 못한다고

지금 밝을 때에 ‘어두움을 보지 못하는 것’도 보지 못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렇다면 결국 밝고 어두움의 두 가지 모양을 다 보지 못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해설]

어두울 때에 밝은 것을 못 보기 때문에 불견(不見)이라고 한다면, 밝을 때에 어두운 것을 못 보니깐, 그것도 불견(不見)이 아니겠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밝은 것도 못보고, 어두운 것도 못 보니깐 두 가지 모양을 다 못본다는  얘기 아니냐는 겁니다.


[본문]

<若復二相自相凌奪이언정 非汝見性於中暫無이니 如是則知二俱名見이언

云何不見이리요 >

 이와 같이 두 가지 현상[二相]이 서로 빼앗음이 있을지언정 너의 보는 성품[見

性]그 가운데에서 잠시도 없어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점에서 두 가지 현상을

모두 본다해야지, 어찌 보지 못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해설]

두가지 현상이 서로 빼앗음이 있다는 것은, 밝음이 오면 어둠이 있던 것을 없애 버리고 밝음이 차지해 버리고, 어둠이 오면 밝음이 있던 것을 없애버리고 어둠이 차지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서로 없애고 자리를 차지하지만, 밝은 것이 오면 밝은 것을 보고, 어두운 것이 오면 어두운 것을 보는, 그 견성은 없어지지 않고 항상 그대로 지켜본다는 말씀입니다. ​


 [본문]     

<是故阿難汝今當知하라 見明之時 見非是明이며 見暗之時 見非

이며 見空之時에도 見非是塞이며 >

 그러므로 아난아! 네가 지금 밝은 것을 볼 때에도 보는 성품[見]은 밝음에서

것이 아니고, 어두운 것을 볼 때에도 보는 성품은 어두움에서 온 것이 아니며,

또한 허공을 볼 때에도 보는 성품은 허공에서 온 것이 아니고, 막힌 것을 볼 때에도 보는 성품은 막힌 것에서 온 것이 아니다.

[해설]

즉 밝음을 볼 적에는 보는 자(能見)은 밝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밝음은 보여지는 대상이고, 見은 보는 자이므로, 보여지는 대상과 보는 자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밝음,어둠, 허공, 막힘, 등은 보여지는 대상(所見)이고, 보는 자인 견(能見)은 이런 대상에서 온 것이 아니고 완전히 별도로 떨어져 있다는 것이죠.​


[본문]      

<四義成就 汝復應知하라 見見之時 見非是見이니라>

 또한 명암공색(明暗空塞)의 이 네 가지 이치를 통해서 너는 응당 보는 것을

에 그 보는 성품은 그(대상을 보는) 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해설]

밝음을 볼 적에 見은 밝음이 아니고, 어둠을 볼 적에 見은 어둠이 아니며, 空을 볼 적에 見은 空이 아니며, 막힘을 볼적에 見은 막힘이 아니라는 것을 잘 숙지해 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밝음을 보는 자를 보는 것은 ​그것들(밝음,어둠,공,막힘)을 보는 자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즉 밝음, 등을 보는 그 보는 자,능견(能見)이 다시 대상(所見)이 되어 보여지는 것이고, 그것을 보는 자는 바로 진성(眞性)자리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 보는 자는 (명암공색을) 보는 자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명암공색을 보는 자는 주,객 이원화로 나눠진 제이월(第二月)과 같은 허상이지만, 그 보는 자를 보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眞性의 見, 최종 주시자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맨 뒤에 있는 보는 자를 본다고는 하지만, 실지로 눈처럼 보는 것이 아니라, 인식한다는 또는 (배경에)존재한다는 것에 가깝습니다. 요즘 정신적인 용어로 보통 주시자라고 쓰고 있읍니다. 주시자는 어떤 특정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말없이 지켜보는 眞性의 見을 말합니다.어둠이나 밝음을 보는 자는 눈의 작용인데, 그 눈의 작용을 다시 주시하는 주시자가 진성(眞性)의 견(見)이라는 말씀입니다.


ㅇ. 보는 성품은 능견과 소견을 벗어나 있다. 

[본문]     

<見猶離離見하야 見不能及커니 云何復說因緣自然及和合相이리요 汝等

狹劣無識하야 不能通達淸淨實相이기에 吾今誨汝하노니 當善思하야

得疲怠菩提路하라 >

 보는 성품은 이와 같이 능견(能見)과 소견(所見)을 여의어서 망견(妄見)으로는

능히 미칠 수 없는데, 어떻게 다시 이 보는 성품을 ‘인연이다 자연이다 화합의 현

이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너희들 성문(聲聞)들이 용렬하고 무식하여 아직 청정한 실상을 통달하지 못하였

기에 내가 지금 너희들에게 가르쳐 주려고 한다. 응당 잘 듣고 사유하여 미묘한

달음의 길에서 물러나지 말라.”

[해설]

우리의 眞性을 깨닫는 이 見(주시작용)은 육안으로 보는 범위를 벗어나 있어서,

눈으로 볼 수가 없는데, 다시 말하면, 주,객 이원적인 영역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이원적인 현상의 개념어인 인연이다, 자연이다,화합의 현상이다 하는 개념적인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란도 아직은 성문이고, 보살들도 아직은 성문단계에 있는 구도자들이므로 "너희들 성문들이--"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해서 무식하다고 하면서, 즉 아직 주객이원적인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비이원적인 절대진리를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해서 부처님께서 지도해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부처님 말씀을 잘 새겨듣고 깊히 사유하여 깨달음을 구하는 여정에서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