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금강경의 "일체를 똑같은 하나로 본다."에 대하여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41)
제18. 一體同觀分(일체동관분)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肉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肉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육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육안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天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天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천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천안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慧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慧眼
수보리 어의운히 여래유혜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혜안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法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法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법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법안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佛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佛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불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불안
須菩提 於意云何 如恒河中所有沙 佛說是沙不 如是 世尊 如來說是沙
수보리 어의운하 여항하중소유사 불설시사부 여시 세존 여래설시사
須菩提 於意云何 如一恒河 中所有沙 有如是沙等恒河 是諸恒河所有沙數佛世界
수보리 어의운하 여일항하 중소유사 유여시사등항하 시제항하소유사수불세계
如是寧爲多不 甚多
여시영위다부 심다
世尊 佛告須菩提 爾所國土中 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세존 불고수보리 이소국토중 소유중생 약간종심 여래실지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所以者何 須菩提
하이고 여래설제심 개위비심 시명위심 소이자하 수보리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육안(肉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육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천안(天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여,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혜안(慧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법안(法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법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불안(佛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불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에 대해 여래가 말한 적이 있느냐?"
"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항하의 모래에 대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의 수 만큼 많은 항하가 있고, 그 모든 항하의 모래수 만큼의 부처님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를 얼마나 많다고 하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 저 많은 국토 가운데 있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아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말하는 모든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18분의 제목이 일체동관분(一切同觀分)이라고 했는데, 이 세상 모든 것을 동일한 한 가지로 본다는 뜻입니다. 즉 깨달은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일체가 아무런 차별이나 경계가 없는 동일한 진여(眞如)로 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처님은 5안(五眼)에 대하여 수보리에게 확인을 시킵니다.
즉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이렇게 오안이 부처님에게 있느냐고 수보리에게 묻고, 수보리는 부처님에게 오안이 있다고 대답합니다.
육안(肉眼)은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있는 육체에 붙어 있는 두눈을 말합니다.
모든 모양과 현상을 이 두 눈으로 봅니다.
이것은 오안에서 가장 거친 의식의 형상을 보는 눈입니다.
육안을 요즘 과학용어로 3차원 물질세계를 보는 눈이라고 말해 봅니다.
여기서 안(眼,눈)이라는 것은 좁은 범위로 이해한다면 '본다'는 눈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좀 더 넓은 의미로 '안다' 또는 '비춰어본다' '주시힌다'는 의미로 이해해야겠지요. 또한 의식자체의 비춤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육안보다는 좀 더 미세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천안(天眼)입니다.
천안이란 천인(天人)의 눈, 즉 신인(神人)의 눈입니다.
이 천안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천상세계 또는 신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미세한 의식의 눈을 말하며, 육체의 눈보다 좀 더 미세한 파동의 의식현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죠.
구도자가 '나는 육체다'라는 동일시에서 벗어나 미세한 의식상태까지 깊히 들어 갔을 때에 드러나는 미묘한 의식현상을 주시하는 의식의 눈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육안은 육체의 제한된 조건에 의하여 겉으로 드러난 거친 물질현상만을 볼 수 있다면, 천안은 육안보다는 좀 더 미세하고 넓은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미세한 정신세계범위를 볼 수 있는 눈을 말합니다.
다음에 혜안(慧眼)은 천안 보다도 좀 더 미세하고 넓은 범위를 볼 수 있는 눈(의식)입니다. 즉 혜안이란 개별적인 형상을 보되 그 모양에 속지 않고 전체적인 절대본체입장의 순수한 지혜로써 비쳐보는 눈(의식)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구도자가 "나"라는 개인성이 엷어진 인공(人空) 또는 아공(我空)의 상태에 들어 갔을 때에 드러나는 전체 우주적 자아 또는 "내가 있다"는 순수앎의 상태에서 드러나는 주시자 의식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따라서 이 겉으로 보이는 현상세계는 꿈과 같은 의식의 일시적인 허상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지혜가 생겨서, 진실과 허위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고, '나"와 전체가 일체라는 것을 깨친 지혜의 눈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이 혜안은 앞서 육안, 천안 보다도 더 미세한 파동의 의식상태가 된 것을 말합니다.
다음에 법안(法眼)이란 구도자가 이 세상 전체가 연기적인 공(空)임을 깨친 단계에서 저절로 드러나는 법공(法空)의 주시자 상태로써, 전체가 오직 일체라는 것(空)을 알며,이 경지에서는 본래부터 참된 진여성품이 모든 중생들에게도 이미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깨쳤기 때문에, 인연있는 중생들을 제도해 가는 보살의 자비로운 평등한 의식이라고 할 수 있읍니다.
다음에 불안(佛眼)은 최상승 깨달음의 상태인 부처님의 눈인데, 전체가 하나다 라는 것을 완전히 통달한 절대무아상태(人法空,俱空)의 최종 주시자상태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이 불안(佛眼)이 앞서 법안,혜안,천안,육안보다 가장 미세하고 가장 넓은 본바탕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불안 안에 나머지 사안(四眼)이 차례대로 모두 포함된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
오안을 가장 미세하고 넓은 범위 순서대로 나열하면, 불안>법안>혜안>천안>육안,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따라서 가장 거친파동의 의식수준이 육안이라면 좀 더 미세하고 넓은 범위의 파동의식이 천안, 그 다음 더 미세하고 더 넓은 의식법위가 혜안, 그 다음 법안, 불안 순서로 가장 미세하고 넓은 범위이면서 모든 눈(의식)을 포함한 것이 바로 깨달은 부처님이 지닌 불안(佛眼,절대무아)이라는 것입니다.
즉 거친 육체의식부터 가장 미세한 바탕의식까지 의식의 전체 스펙트럼을 다섯단계로 나누어 오안(五眼)이라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왜 수보리에게 갑자기 여래에게는 육안,천안,혜안,법안, 불안이 있느냐고 뜬금없이 물어보면서 수보리로 하여금 직접 대답하도록 확인을 시켰을까요?
그 이유는 아래 문장에서 나옵니다만, 우선 의식의 여러가지 다양한 미세함의 단계, 즉 의식에는 거친 육체의식부터, 보이지 않는 미세한 의식의 정도에 따라 여러 계층과 다양한 차원이 있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수보리로 하여금 직접 대답하도록 질문한 것입니다.
깨치지 못한 중생인 우리가 아는 세계는 단순히 육안에 보이는 이 물리적 현상세계와 육체마음만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세상만 있지만,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신(神)의 세계,영(靈)의 미세한 세계와 순수한 지혜의 눈으로 보이는 세계, 보편적 존재의식의 세계, 절대본체의 세계 등, 의식이 순수함의 정도에 따라서 더욱 더 미세하고 깊은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입니다.
즉 의식의 파동성의 미세함에 따라서 아주 다양한 차원의 수많은 미묘한 의식세계가 깊게 펼쳐져 있음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오안(五眼)은 의식의 미세한 정도에 따라서 부처에게 그것을 보는 눈이 다양한 수직적인 의식단계 또는 다단계 차원마다 주시의식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참고로 베단타 수행체계에서는 의식의 수준을 다음과 같은 단계로 나누고 있읍니다.
육체(육체껍질)-> 미세체(생기껍질,마음껍질,지성껍질) -> 원인체(지복껍질)-> 대원인체(존재의식)-> 진아(절대바탕)
즉 크게 구분해서는 육체의식, 미세체 의식, 원인체의식, 초원인체 의식, 진아, 이렇게 다섯단계로 구분하지만, 좀 더 세밀하게 구분하면, 육체각, 생기각, 마음각, 지성각, 지복각,존재의식,절대의식,이렇게 7개 단계로 구분을 합니다.
또한 수능엄경이나 화엄경에 보면 구도자가 발심을 하고 나서 점차적인 수행단계를 거치는데 총 57단계로 분류하고 있으며, 이것을 크게 분류해서 4단계로 나누면, 범부위(凡夫位), 현위(賢位,三賢), 성위(聖位), 불위(佛位)가 되는데, 범부위 이전에 수행자로써의 기초자세를 익히는 삼점차(三漸次, 修習,進修,增進)를 가장 처음에 붙히면, 삼점차->범부위->현위->성위-> 불위. 이렇게 크게 5단계로 분류가 됩니다.
또한 범부위는 욕애건혜(欲愛乾慧)와 십신위(十信位)가 해당되며,
현위(賢位)는 십주위(十住位,下賢), 십행위(十行位, 中賢), 십회향위(十回向位,上賢)가 있으며, 성위(聖位)는 사가행(四加行), 십지위(十地位,十聖), 등각(等覺)이며,
마지막으로 묘각위(妙覺位)가 불위(佛位)라고 합니다.
이렇게 수능엄경에서는 수행에 따라서 그 수준단계를 총 58단계로 니누어 자세히 설명하고 있읍니다. 따라서 금강경의 오안(五眼)은 이러한 여러 수행단계에 나타나는 특별한 의식의 주시특성을 크게 다섯단계로 나눈 것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말하자면 오안(五眼)은 의식의 바다에서 수직적 깊이가 점점 깊어감에 따라서 의식의 미세한 단계별에 적용되는 주시특성을 묘사한 것이라면,
다음에 나올 항하수 모래알의 세계로 표현한 것은 의식의 바다에서 표면의 광대한 넓이 안에 존재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우주세계를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읍니다.
참고로 오안에 대해서 육조혜능의 설명을 들어 보겠읍니다.
모든 사람이 다 오안(五眼)이 있건만 미혹에 덮힌 바가 되어서 능히 스스로 보지 못함일세, 그러므로 부처님이 가르쳐 주시는 미한 마음을 없애버리면 곧 다섯눈이 뚜렷히 밝아져서 생각생각에 반야바라밀법을 수행케하시니, 처음의 미한 마음을 없애는 것을 육안(肉眼)이라 함이요,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어서 연민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천안(天眼)이라 함이여, 어리석은 마음이 나지 않음을 혜안(慧眼)이라 하고, 법에 집착한 마음을 없애는 것을 법안이라 하도다. 미세한 번뇌까지 영원히 다 없애서 뚜렷히 밝게 두루 비추는 것을 불안(佛眼)이라 한다.
또 이르되 색신(몸) 가운데서 법안이 있음을 보는 것을 육안이라 하고, 일체 중생이 각각 반야의 성품을 갖추고 있음을 보는 것을 천안이라 하며, 반야바라밀법이 능히 삼세(三世,과거,현재,미래)의 일체법을 냄을 보는 것을 혜안이라 하고, 일체의 불법이 본래 스스로 갖춤을 보는 것이 법안(法眼)이라 하며, 성품이 밝게 사무쳐서 능소를 영원히 없앰을 보는 것을 불안(佛眼)이라 이름 하느니라.
아래 문장은 이 세상에 다양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량의 우주세계가 널려 있음을 묘사한 내용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에 대해 여래가 말한 적이 있느냐?"
"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항하의 모래에 대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의 수 만큼 많은 항하가 있고, 그 모든 항하의 모래수 만큼의 부처님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를 얼마나 많다고 하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금강경에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를 묘사할 때에 항하강의 모래알 수라고 표현을 많이 합니다.
항하강은 인도말로 갠지스강이라고 부르며, 인도 북부의 히말리아산에서 발원을 해서 인도 대륙으로 구불구불 내려오는 길고 큰 강인데, 히말리아 산간지역이 워낙 높은 곳이기 때문에 많은 량의 흙이 떠내려와서 강하류인 인도평야지역에 쌓이는 모양입니다. 더우기 모래알이 마치 미세한 밀가루같이 가는 모래이기 때문에 한줌의 모래일지라도 모래알수로 따지자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숫자라고 볼 수 있읍니다.
부처님이 생전에 순회 법문을 하시던 모든 지역이 바로 갠지스강이 흐르는 인근지방에서 펼쳐졌으므로, 그래서 부처님이 법문을 하실 때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숫자를 표현을 할 때마다 자주 '항하강의 모래알수'를 비유해서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셀수없을 정도로 많은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항하가 있고, 또 그 모든 항하강의 모래알 한 알마다 우주 은하 세계가 또 그렇게 수없이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우주세계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죠.
그 당시, 전혀 과학이 발달되지 않은 오천년전에 이미 부처님은 셀수없는 우주은하계가 무한하게 펼쳐져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신 것을 보면 참으로 대단한 지혜의 눈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읍니다..
요즘에는 우주과학이 발달하고 허불망원경이니 전자망원경, 은하탐사위성등이 있어서 이런 첨단과학장비를 통하여 수천만개의 별이 돌아가는 우주 은하계가 또한 수천만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게 펼쳐져 있다는 것이 점점 과학적으로 밝혀지고 있지만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 저 많은 국토 가운데 있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아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말하는 모든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의식의 바다에서 수직적으로는 의식의 미세함의 깊이에 따라서 육안,천안,혜안,법안,불안으로 볼 수 있는 다양한 의식의 계층 또는 차원이 있고,
또한 의식의 바다에서 수평적으로는 항하수 모래알 한알마다 항하수 모래알 수만큼의 우주 은하계가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그 수많은 세상에 있는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부처님이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은, 그 중생들의 다양한 마음들이 모두 똑같은 하나의 진여(眞如)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의식차원과 헤아릴 수 없는 우주세계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중생들의 다양한 마음은 단하나의 여래의 마음바탕에서 나온 것일 뿐이지, 그와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은, 그것은 거울에 비친 그림자같은 헛것이며, 오직 있는 것은 그 이전에 있는 형상없는 여래의 마음바탕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그 수많은 중생의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중생들의 마음 이전에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중생들의 마음 그림자가 나타난 것이죠. 따라서 그 '무엇인가'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그냥 "마음"이라고 표현하고 나서 곧바로 "마음이 아니다"라고 부정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남는 것은 말로 표햔할 수 없는 "그것"(바탕)만 남는 것이죠.
<그 까닭은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수억천만의 이 우주세계에 살고 있는 중생들의 다양한 마음은 마음이 아니고 그 이름만 마음이라고 했느냐 하면, 그것은 마음의 본체인 여래심(바탕)이 아니고, 일시적으로 그림자가 비쳐져 나타난 헛것이기 때문에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과거의 마음은 이미 지나간 것이어서 얻을 수가 없고, 현재의 마음이라는 것은 모양이 없어서 공(空)하기 때문에 얻을 수가 없죠.
왜냐하면 현재라고 여기는 순간에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리므로, 현재에는 모양없는 무심밖에 없고 움직이는 마음은 있을 수가 없읍니다. 또 미래의 마음이라는 것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상상만 있을 뿐 실체가 없어서 얻을 수가 없읍니다.
사실 엄밀히 따진다면 과거 마음은 기억인데, 이것은 현재 앞에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는 꿈과 같은 기억내용이고, 미래 마음이라는 것은 일종의 환상같은 상상 내용인데, 이것도 현재 앞을 순간적으로 지나 가는 그림자이며, 현재마음이라는 것은 아무 그림도 없는 백지스크린과 같은 무심(無心)바탕인데, 이 무심의 바탕 위에서 과거마음과 미래마음의 그림자가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과거마음과 미래마음은 환상같은 허황된 그림자이고, 현재마음이란 모양없는 무심이므로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고, 붙잡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죠.
또한 무심(無心)바탕은 자기자신의 모양없는 참나이므로, 자기가 자기를 대상으로 삼아서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렇게 과거,현재,미래라는 삼세는 시간의 흐름의 현상인데, 그 자체가 무상(無常)하므로, 시간을 따라서 의식 공간에 나타난 생각이나 상상,관념,현상등은 모두가 허상(虛像)이므로 붙잡을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현재라는 느낌이나 현재의 마음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실은 과거의 마음일 뿐이며, 현재라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마음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치 현재에 움직이는 마음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은 기억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마음에 대상으로서 현재 무엇인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현재의 상태가 아니라 이미 과거의 것이 대상으로서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진짜 현재점에서는 아무 것도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죠.
이원화 대상이 있는 한, 무엇인가 느끼는 한, 그것은 현재가 아니고 과거의 그림자를 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움직이는 주객 이원화 현상세계 속에서 무상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구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과거,현재,미래의 마음이라는 것은 변화하는 현상세계의 대상적인 관념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 말한다면, 과거,현재,미래의 마음, 즉 현상적인 대상으로 나타난 유위법(有爲法,有心)은 모두가 실재(實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실재(實在)한다는 것은 항상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절대무아란 무위법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무위법은 유위법의 본체이고, 현상으로 드러난 대상인 유위법은 무위법의 작용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타난 현상의 유위법(有心)을 통해서 무위의 도(無心)를 구해야 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현상의 유위법(有心)을 억지로 완전히 없앨 수는 없는 것이고, 유위법(有心)을 그대로 둔채 그 속에서 무위의 도(無心)를 구해야 합니다.
유위법은 원래부터 무위의 바탕 위에 있는 것이므로, 무위의 도는 유위의 현상 속에서 말없이 관찰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움직임 속에서 정지바탕을 관찰하고, 있음 속에서 없음을 관하며, 곡선 속에서 직선을 관하는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시간의 정지를 관하여 그 무심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다시, 과거,현재,미래의 마음과 모든 현상이나 중생의 마음이 실재하지 않고 허상(虛像)이라면, 그러면 실재(實在)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누구에게나 지니고 있는 지금 현재의 자기 마음 속 바탕(無心)에 있읍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이 없는 곳에서 보는 것이죠.
과거의 마음에도 집착하지 않고, 현재의 마음에도 집착하지 않고, 미래의 마음에도 집착하지 않는 그 어떤 것에도 머물지 않는 무심(無心)바탕에 안정 된다면 비로소 일은 끝나게 되겠죠.
다시 말하면, 얻을 수 없는 것, 바로 그것 자체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얻은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 세상 삼라만상 하나 하나와 모든 현상, 그리고 과거,현재,미래의 중생들 모든 마음이 여래(如來) 그 자리로써, 동일한 하나로 볼 뿐입니다.
이 금강경 구절은 덕산선사의 일화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덕산선감(782~865) 선사는 어려서 출가하여 율장을 깊히 공부하고 <금강경>을 많이 연구하여 해설을 잘하기로 소문이 나있었읍니다.
속성이 주(周)씨여서 사람들이 그를 주금강이라고 부를 정도로 유명했읍니다.
그가 금강경에 대한 소(疎,해설서)를 지었는데, 청룡소(靑龍疎)라 하였읍니다.
어느 날 덕산이 자기가 지은 이 책을 걸망에 넣어 짊어지고 길을 가고 있었읍니다.
도중에 점심 때가 되어 배고픔을 느낀 스님은 마침 길가에서 떡을 파는 노파를 만났읍니다.
" 요기하게 떡을 주시오" 노파에게 말했드니 노파가 얼른 떡을 주지 않고 "스님, 걸망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하고 묻는 것이었읍니다.
"아, 불경 가운데 <금강경>이라는 책이 들어 있소." 이렇게 말하자 "금강경에 과거의 마음도 찾지 못하고 현재의 마음도 찾지 못하고, 미래의 마음도 찾지 못한다고 했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 점(點心)을 찍겠읍니까?"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요기하는 것을 한자로 점심(點心)이라고 부른답니다.
그대로 글자를 해석하면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 주금강이 그만 대답을 못하고 말문이 막혀 버렸읍니다.
천하에 금강경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자신이 제일인양 뽐내왔던 주금강 덕산이 그만 길가의 노점하는 노파의 질문에 말을 못하자 노파가 혀를 차면서 " 쯧쯧, 저기 저 절에 용담선사에나 가보시구랴"하고 인근 절의 용담숭신선사를 찾아가 볼 것을 권했읍니다.
그리하여 덕산이 용담스님을 찾아 갑니다.
용담선사를 찾아간 덕산스님은 절 안으로 들어 가지마자 호탕한 객기를 부렸읍니다.
" 용담이라 하더니 용도 없고 못도 없구나" 하고 아무도 없는 절뜰에서 소리를 질러 보았읍니다. 그러자 불당 한귀퉁이에서 스님이 나오며 "그대가 용담에 참으로 잘 왔네"하는 것이었읍니다.
덕산스님은 용담선사의 방에서 밤이 깊도록 법담을 나눴읍니다.
밤이 이슥하여 덕산스님이 이야기를 마치고 방을 나와 객실로 가서 자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읍니다. 막 방문을 나왔을 때 칠흑같은 어둠 때문에 신발을 찾아 신을 수가 없어서 불 붙이는 종이에 불을 붙혀 주기를 용담선사에게 청했읍니다. 용담선사가 불을 붙혀 덕산스님에게 건네주려고 하다 덕산스님이 받으려는 순간 확 불을 꺼버렸읍니다.
그 순간 덕산스님이 활연대오하였읍니다. 이튿날 덕산스님은 자기가 지은 <청룡소>를 법당 앞에서 불을 붙혀 몽땅 태워 버렸읍니다.
위의 <과거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 마음도 얻을 수 없다>라는 금강경 (유위적인)구절의 인연으로, 덕산스님이 깨닫는 (무위적)기연에 대하여 선가에서 전해 내려오는 일화입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