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금강경의 "구경(究境)에는 내가 없다"에 대하여(5)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39)
제17분 구경에는 내가 없다(5)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말한다면 수보리야,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며,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나를 비방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설한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일체법이라 함은 곧 일체법이 아니니, 그 까닭에 일체법이라고 부른 것이다.>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라는 말에서 "여래"라는 주체가 있고, "아뇩삼먁삼보리"라는 어떤 관념적인 대상이 있어서 '그것을 얻었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주,객으로 나누어진 이원적인 입장에서 말한 것이지, 절대상태인 비이원적인 깨달음 상태에서는 이치에 안맞는 언구(言句)입니다.
'여래'는 비이원적인 절대상태에 있는 깨달은 붇다를 말하는 것이므로 주체니 대상이니 하는 구분이 될 수가 없읍니다.
'아뇩삼먁삼보리'역시 주,객이 없는 비이원적 절대지혜를 말하는데, 이것이 이원화된 관념적인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죠.
따라서 '여래가 아뇩삼먁삼보리를 얻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비이원적 절대 깨달음"입장에서 보면 이치에 안맞는 말일 뿐더러, "여래"를 마치 주,객 이원적인 상태에서 한 개인주체로 취급하므로 '나를 비방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한다'는 말은 실재(實在)인 비이원적 절대상태의 깨달음 입장에서 보지 않고, 허상인 주객 이원적인 현상세계, 즉 세속적 관념에 물들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이미 여래는 전체와 계합하여 주,객이 사라진 절대상태가 되었으므로 전체와 일체인 상태이므로 어떤 대상(법)이 없으므로 이원화 상대세계에서 말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닫는다,라는 관념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래 입장에서는 무상정등각을 깨달았다는 생각도 없다는 것이죠.
현시대에도 '내가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진실로 깨달은 사람은 자기가 깨달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래가 얻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無實無虛)'는 것은 바로 아뇩삼막삼보리심을 말합니다.
'실다움이 없다'는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이며, 원래부터 항상 있는 그대로 이기 때문에 깨달았다고 새로운 어떤 무엇인가를 얻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성을 깨친다는 것은 실로 새로 얻을 것도 없고 구할 것도 없으며 찾을 것이 없는 아무 것도 없는 원래부터 공(空)한 바탕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헛됨이 없다'는 것은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는 그 공(空)한 마음의 본체바탕에서 수억만가지 다양한 작용이 나툰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진공묘유(眞空妙有)라, 아무 것도 없이 공(空)하지만, 거기서 미묘한 오만가지 다양한 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설한 것이다.>
일체법이란 색,성,향,미,촉법으로 드러난 일체 존재의 모습이며, 색수상행식의 오음인데, 이러한 일체의 현상들이 원래 바탕인 본성의 다양한 나툼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즉 이 세상 모든 것은 바로 절대본성의 다양한 모습입니다.
주,객 이원적으로 드러난 현상계를 어떤 측면에서는 무지(無知)로 인해 드러난 경계라고도 해서, 환상의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베단타에서는 이것을 마야(원래는 없는 환상)의 춤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절대본체가 그 자신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깨닫기 이전인 무지(無知)할 때는 이원적 경계는 무지가 만든 환상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없애야 할 헛것이지만, 절대본체를 깨닫고 나면 그 모든 만상의 경계가 바로 절대본성 그 자체가 스스로를 표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부처님이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 즉 공(空)이 바로 색(色)이며, 색이 바로 공이다, 라는 구절과 같습니다.
소위 간화선의 공안이라는 것을 알음알이로 해설하면 안된다고 하지만, 여기서는 간화선 수행법칙과는 상관없이 이야기해 보겠읍니다.
조주선사에게 어떤 수행자가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이냐고 물었읍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달마대사가 중국에 전해준 불법의 깊은 뜻, 즉 깨달음법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죠. 조주선사가 즉시 앞마당에 서 있는 잣나무를 보며 " 뜰앞의 잣나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이 바로 "일체법이 불법이다"라는 뜻입니다. 궁극을 깨달은 조주선사에게는 이 세상 모든 것, 주변의 자잘한 모든 것이 그 자체가 전부 불법을 머금고 있어서 그 묻는 당초에서 앞바당에 보인 잣나무를 보며 즉각 잣나무라고 무심하게 대답해 주었죠.
그런데 실지로 그 질문한 당사자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잣나무를 보는 자, 모양없는 주시자에 계합할 수 있는 찬스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앞에 보이는 잣나무라는 대상은 단순히 배면의 모양없는 주시자를 가르쳐 주는 표식일 뿐입니다. 꼭 잣나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보이고 알려지는 모든 것이 바로 그 배면의 모양없는 주시자를 가르쳐 주는 화살표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는 말입니다.
선사들의 화두에서 거의 모든 대답은 이렇게 말없이 배면에서 지켜보는 앎, 즉 주시자에 계합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말입니다.
선스승은 비이원적인 깨달음의 입장에서 모든 것이 불법이지만, 깨닫지 못한 제자의 입장에서는 자칫 "뜰앞의 잣나무"를 그냥 앞에 보이는 대상으로서의 "잣나무"으로만 취급하므로 배면의 모양없는 주시자에 계합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때는 그 선문답의 내용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그 의문에 집중해서 스스로의 이원적인 마음을 근원으로 파고 들어가야겠지요. 반면에 아주 도기가 무르익은 높은 근기의 제자는 조주스님의 "잣나무"라는 한마디에 즉각 계합되어 전체와 하나가 될 수 있겠죠.
구도자가 어느 정도 수준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면 이 세상 모든 것, 하찮은 들풀, 기어 다니는 벌레 등 무엇이든지 화두(話頭)가 됩니다. 이럴 때는 밥 먹고 화장실 가고, 걷고 보고 듣는 모든 일상사가 바로 화두이며, 공안이고, 깨달음을 이끌어 주는 스승이 되는 것이죠.
깨달은 선사들이 말하는 것은 어떤 현상이나 물건을 가리키든 간에 그것은 그 대상적인 현상이나 물건이 아니라, 배면의 모양없고 말 없는 주시자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또하나 예를 들어보면 어느 날 조주스님에게 어떤 수행승이 묻습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물으니, 조주선사가 앞에 놓인 책상을 가리키며 "상(床)다리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그 수행승이 알아들은 듯이,"그게 바로 그 뜻입니까?"하고 되묻습니다. 그 수행승은 조주선사가 정말로 눈앞에 보이는 책상다리를 가리켜서 말하는 줄 알고 다시 확인해 보는 것이죠.
그러자 조주스님이 "그것이라면 빼 가지고 가거라"라고, 비록 조주스님이 눈앞에 있는 책상다리를 가리켰지만, 이 수행승은 그 조주스님의 말씀이 배면의 모양없는 주시자를 가리키는 것인줄 모르고, 눈치없이 현상적 대상인 책상다리인 줄 잘못 이해한 것이죠. 그래서 조주스님이 책망하듯이 "그 책상다리인 줄 알았으면 책상다리를 당장 빼 가지고 가라"고 책망을 주는 것이죠.
<이른바 일체법이라 함은 곧 일체법이 아니니, 그 까닭에 일체법이라 부른 것이다.>
위의 "일체법이 불법"이라고 말하니깐, 어떤 사람들은 다시 주,객 이원화 상태에 머물러서 관념적인 대상화 생각을 할 수가 있을 것을 염려해서, 그 말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다시, "일체법"이라는 대상화 관념을 타파해 주기 위해서 "일체법은 일체법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일체법이라는 대상적인 관념 때문에 주,객 이원화 상태로 하강(下降)하는 것을 즉각 가로막고, '일체법'이라는 의미의 관념을 지워주기 위해서 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생각없음"이 되어, 그 생각의 넘어, 바탕의 주시자쪽으로 마음의 주의가 향하게 되겠죠.
다시 말하면, "일체법이라 함은 일체법이 아니다"는 일체법이라는 관념(의미)의 대상을 없애고, 말없이 지켜보는 주시자 바탕으로 물러나게 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말없이 지켜보는 모양없는 배면의 주시자를 "무엇"이라고 부르면서 가리킬 수가 없으니깐, 일단 '일체법'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나서, 나중에는 그 '일체법'이란 의미는 지워 버리고, 그냥 의미없는 '소리'일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에서 활용하고 있는 아주 특별한 교수법이며, 금강경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앞서 <A라고 하면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라고 부른 것이다>라는 본인 부로그 포스트에서 좀 자세하게 다룬 적이 있읍니다만, 여기서도 다시 한번 이야기 해 보겠읍니다.
<일체법이라고 말한 것은 일체법이 아니니, 그 까닭에 일체법이라고 부른 것이다>
보통 일체법이라는 것은 색,성,향,미,촉,법으로 드러난 모든 존재와 현상을 말하며, 또한 색수상행식의 의식현상으로 나타나는데, 우주의 모든 물리적 정신적 현상을 말하는 것이죠.
이것은 말하자면 대상적인 관념으로서 우리 기존의 뇌속에 기억하고 있는데, 이러한 기존의 기억된 대상적인 고정관념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일체법"이라는 대상적인 관념을 말할 때는 "일체법"이라고 생각하던 "주체"도 배면에 함께 있었읍니다. 그런데 다음에 "일체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체법이 아니고, 그 이름만 일체법이라고 하니깐, 그 "일체법"이라는 소리에서 대상적인 관념의 의미가 없어져서 그 관념(의미)을 생각하던 주체도 같이 없어지며, 남는 것은 의미없는 "일체법"이라는 소리와 말없이 그 소리만 듣는 자(주시자) 밖에 없는 것이죠.
즉 "일체법"이라는 의미없는 소리만 듣고 있는 드러나지 않은 주시자만 남습니다.
이것은 마치 수능엄경에서 말하는 이근원통법(耳根圓通法)과도 통합니다. 즉 모든 소리를 듣는 관세음보살이 소개한 이근원통수행법이 금강경에서도 다른 측면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본인 부로그에서 "관음수행법" 참조)
수능엄경 제6권-
그때 관세음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어 절하고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 제가 옛날 헤아릴 수 없는 항아사의 모래수와 같은 겁(劫,시간)을 기억해 볼 때에 어떤 부처님게서 세상에 출현하셨으니 이름이 관세음(觀世音)이었읍니다.
저는 그 부처님으로 인하여 보리심(無上道心)을 발하게 되었으며, 그 부처님께서 저에게 듣고(聞), 생각하고(思), 닦음(修)으로부터 삼마지에 들라고 하셨읍니다.
처음에 듣는 성품의 흐름을 따라 들어가니 들리던 소리(대상)가 없어지고,
소리와 흐름 속으로 들어 갔다는 것조차 조용해져 시끄러음과 고요함의 두 가지 현상이 전혀 생기지 않게 되었읍니다.
이와같이 점차 더 정진하니 듣는 주체와 듣는 대상(소리)이 다 없어지고, 들음이 없었졌다는 것까지 남아 있지 않아서, 깨달음과 깨달을 대상이 함께 공(空)하였으며,공(空)하였다는 자각이 지극히 원만하여 공(空)이라는 생각과 공(空)한 경계가 아주 없어지니, 이와같이 생(生)과 멸(滅)이 다 없어지니 적멸(寂滅)이 눈 앞에 드러났읍니다.
문득 세간과 출세간을 뛰어 넘어 시방이 뚜렷하게 밝아지면서 두가지 특별한 이상한 경계를 얻었으니, 하나는 위로 시방 부처님의 본래부터 묘하게 깨어있는 마음에 합하여 부처님과 같이 자비의 묘력이 동일하게 되고, 둘째는 아래로 시방의 일체 육도 중생의 마음에 합하여 여러 중생으로 더불어 슬픔과 소망이 같아졌읍니다. "-- 이하 생략
전에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진언이나 어떤 만트라, 염불 수행을 할 때에 그 말의 의미를 다 빼버리고 단순히 소리만을 반복해서 관(觀)하다 보면 배면의 침묵하며 지켜보고 있는 주시자 바탕으로 마음이 가라앉아서 순수의식상태가 된다고 했읍니다.
즉 어떤 말이 머리 속에 지나가거나 입으로 왼다고 해도 그 말의 의미로 인해 마음 속에서 어떤 생각(관념)이 번식하고 일어나지 않게 무시하고,말에서 의미를 빼버린 소리만을 관하다보면 마음이 점점 마음바탕으로 가라앉아서 침묵에 안정되는데, 이것이 말의 의미에 의하여 마음에서 망상이 생기거나 번식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움직임을 가라앉혀서 침묵의 순수의식이 됩니다. 이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되면 결국 마음과 존재의식을 넘어가 삼매에 들게 됩니다.
이 관(觀)수행의 과정을 간단하게 이야기해 보자면,
우리의 감각기관과 마음을 통해서 보이고 느끼고 아는 모든 것은 의식의 대상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무엇인가 앞에 알려지는 대상이 있으면 그 이전, 그 배면에는 알려지지는 않지만 아는 주체(주시자)가 있읍니다. 따라서 앞의 알려진 것을 배제(排除)해 나가면 점차로 배면의 주시자쪽, 의식의 내면 깊은 속으로 들어가면서 의식이 점점 더 미세해집니다.
처음에는 몸과 감각기관,세상,사물이 알려진 대상이 되고, 나라는 느낌이 아는 주체인 줄 알았는데, 앞에 알려진 대상들을 점점 소거해 나가면서 의식 깊은 내면 속을 탐구해 들어가면 점차로 마음과 "나라는 느낌"도 사라지고, 광대한 의식의 공간을 지나 아무 것도 알수 없는 컴컴한 암흑동굴 속에 갖혀있게 됩니다. 이 아무 것도 모르는 암흑동굴 속에서 인내를 가지고 얼마동안 잠겨 있으면 드디어 전체적인 앎의 빛이 밝아오는데, 이 상태가 바로 절대진아에서 직접 비치는 진지(眞知)의 상태입니다. 이것을 베단타 스승들은 "내가 있다"는 순수존재의식, 즉 우주적 자아(大我)라고 부릅니다. 이 전체 순수 앎상태에서 그 빛의 근원을 더욱 탐구해 들어가면 드디어 그 순수한 의식의 빛이 나온 절대바탕에 합일됩니다. 그러나 성인들은 이 절대바탕에 안주해 있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그것마저 벗어나 다시 평범한 보통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 바로 최종 해탈을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관(觀) 수행 뿐 아니라, 자아탐구법, 간화선, 염불선, 등 모두가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고 볼 수 있지만, 실제로 구도자들이 체험하는 양상은 개인마다 다를 수도 있겠고, 또 이러한 과정에 특별하게 관심을 줄 필요는 없는 것 같읍니다.
처음에는 움직이는 현상세계(動,소리,대상)를 관(觀)하여 동(動, 현상세계,소리,대상)에서 벗어나면, 고요함(靜,침묵)에 들어가고, 다음에는 고요함을 관하여 근(根,원인체,자기망각)으로 들어가면 인공(人空,나없음)의 상태가 됩니다, 즉 개인 에고가 나온 무지의 뿌리(원인체)에 들어간 것이죠.
다음에는 근(根, 원인체)를 관하여 각(覺, 내가 있다 존재의식)으로 들어가고, 다시 존재의식의 각(覺)을 관하여 공(空, 절대바탕)에 안주하면 바로 법공(法空)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이 절대바탕의 공(空)마저 벗어버리면 (滅) 바로 절대 해탈이라고 부르는 구공(俱空)에 도달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관음 수행법 뿐 아니라, 모든 정신수행법은 동(動,전6식)-> 정(靜,7식)-> 근(根,8식원인체, 忘覺) -> 각(覺,8식,초원인체,내가 있다,眞知) -> 공(空,절대바탕) -> 멸(滅,본래평범한 상태로 되돌아 나옴)의 기본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 <A라고 부르는 것은 A가 아니니, 그래서 A라고 부른다>는 형식의 문장은 이러한 "A"라고 부르는 말의 의미는 무시하고, A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는자 또는 그 소리가 나온 침묵의 본바탕을 관(觀)하다 보면, 저절로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말없이 지켜보는 최종 주시자의 절대바탕으로 가라앉게 됩니다.
보통 다라니 수행이나 염불, 만트라 관수행이 모두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마음이 침묵 바탕(삼매)으로 가라앉는 것입니다.
간화선도 결국은 이와 비숫한 과정으로 최종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
따라서 위의 본문 문장에서 <일체법은 일체법이 아니니, 그 이름을 일체법이라고 부른다>라는 문장은 "일체법"이라는 말의 의미를 지워버려서 생각이 나오지 못하게 하고, "일체법"이라는 의미없는 소리만 관하여 말없는 배면의 주시자상태로 향하라는 말씀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육조혜능대사가 금강경의 " 머문바 없이 마음을 내라"라는 구절을 길에서 우연히 듣고 마음에 불법에 대한 발심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이 "머문바 없이 마음을 낸다"는 유명한 말구절의 상태를 바로 현대적인 정신수행 용어로 부른다면, 배면의 말없는 앎, 즉 말없이 지켜보는 모양없는 주시자 상태를 말합니다.
육조혜능은 단경을 비롯해서 금강경의 해설 여러곳에서 이 배면의 주시자 상태를 <뒷생각(後念)>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여 자주 언급을 했읍니다.
금강경의 어떤 해설에서는 이 후념(後念)이 바로 보리심이라고 혜능이 직접 설명하고 있읍니다.반면에 전념(前念)은 보통 움직이는 대상적인 속세마음을 말합니다.
금강경에서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구절인 "머문바 없이 마음을 낸다"는 말은 바로 말없이 주시하는 <주시자 >상태가 되라는 것입니다,
즉 <나는 ~ 함을 (말없이) 알고 있다 > 또는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을 (말없이) 알고 있다>는 주시자상태를 말합니다.
그 최종적인 주시자 자체가 되면 주시대상,주시작용,주시자자체가 완전히 사라져서 절대본성에 합일되는 것입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