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금강경의 "구경(究境)에는 내가 없다"에 대하여(2)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36)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선남자와 선여인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 나가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다면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마음을 내라. '내가 마땅히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리라. 그러나 이렇게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였지만 실은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라고.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
이 17분에서 수보리의 첫번째 질문과 부처님의 답변은 금강경 초반의 2분과 3분의 질문과 답변의 내용과 비슷해 보이지만, 미세하게 다른 점이 있읍니다.
먼저 금강경에서 첫 질문인 2분의 수보리 질문과 부처님의 답변을 다시 보겠읍니다.
제 2분에서는 수보리의 질문이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삼먁삼보리심을 내려면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물게 해야 하며, 그 마음을 어떻게 항복받아야 합니까?" 라고 묻고 있읍니다.
즉 구도자가 처음에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해서 어떻게 수행해야 하느냐고 묻는 것이죠. 따라서 아직 구도자가 보리심을 일으키기 전, 수행 초보자의 자세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7분의 수보리의 질문에서는 "이미 아뇩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선남자 선여인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며,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되는가?"에 대해서 묻고 있읍니다.
즉 이미 보리심을 발한 보살의 마음자세에 대하여 묻고 있는 것이죠.
제2분에서는 아주 초보자 수준의 구도방법을 묻고 있는 것이고, 이번 17분에서는 이미 구도심을 일으킨 보살의 본격적인 수행수준에 대하여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2분의 질문과 제17분의 질문은 그 수준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17분에서는 구도자의 마음자세에 대하여 좀 더 미세한 측면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제2분의 부처님의 답변에서는 " 그래 착하다 착해!, 수보리야! 그대 말처럼 여래는 모든 보살을 보호하고 생각해 주며 모든 보살을 보살펴준다.
그대는 자세히 듣거라. 그대 수행수준에 맞추어 이야기해 보겠다.
선남자나 선여인이 아뇩삼보리심을 내려면 마땅히 이와같이 머물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한다."라고 답변합니다.
이 답변에서 처음에는 구도자가 부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확신시키기 위해서 보리심을 발하려는 구도자는 믿음을 가지고 깨어있으면, 여래가 항상 보호하고 보살펴 준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서 남녀 구도자가 보리심을 일으키려면 "마땅히 이와같이 머물며, 이와같이 항복받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읍니다.
여래가 "이와같이"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서 그 아뇩다라삼보리심을 어떻게 일으키려 하는가? 하는 그 의문 자체에 깨어있으라는 의미라고 전에 나름대로 해석한 바가 있읍니다.
물론 "이와같이"라는 말씀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답변내용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지만, 구라마집에서는 특별하게 "이와같이"라는 뜻을 지금 현재의 존재성 자체를 가리키는 여어(如語)로써 활용하고 있읍니다. 즉 이 "이와같이"라는 것은 어떤 다른 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수보리가 의문하고 있는 그 마음 자세를 자각하도록 깨우치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상태를 바로 보라고 일깨워주는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이것은 처음으로 구도심을 일으키려는 구도자에게 여래자신에 대한 믿음과 딴 생각하지 말고, 지금 여기서 자기 존재성에 깨어있어라, 는 의미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이 2분의 문답에서는 초발심자가 보살행의 상구보리(上求菩提), 즉 위로는 보리심을 깨닫는 것에 중점을 두었고, 제 17분의 문답에서는 이미 보살심을 발한 보살의 하화중생(下化衆生), 즉 아래로는 중생과 함께 어울리며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데 중점을 둔 듯이 보입니다.
그러면 이번 17분에서 부처님의 첫번째 답변을 보자면,
<만약 선남자 선여인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다면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마음을 내라.>
이 구절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선남자 선여인이라고 했읍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다는 말은 둘도 없는 최고의 대보리심을 얻기 위하여 결심한 사람을 말합니다.
대보리심이란 바로 자기 개인성을 완전히 희생해서 전체 중생을 위해 보시행으로써 헌신하고 제도한다는 대승불교 보살정신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보살의 헌신적인 보시행을 실천하는 남녀 구도자를 말합니다. 이런 구도자들은 아래와 같이 마음을 머물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마땅히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리라. 그러나 이렇게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였지만 실은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라고>
위의 문장은 두 문장인데, 각 문장이 시제(時際)가 완전히 다릅니다.
첫번째 문장인 '내가 마땅히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리라.'에서는 주,객 이원화 상태에서 강하게 결심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즉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한다는 것은 일체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서 청정한 열반에 들게 하겠다는 결심입니다.
멸도(滅度)란 말은 모든 중생을 싸그리 죽여서 없앤다는 말이 아니라, 열반을 말하는 것으로써 구도자가 적멸의 청정한 경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구도자 한 사람이 어떻게 이 우주전체의 수억천만 중생을 한꺼번에 멸도시킨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보살심을 일으킨 구도자가 개인성을 우주전체성으로 완전히 전환시킨다는 말입니다. "나는 우주전체다"라는 큰 보살의 마음을 품으면 모든 중생이 자기 자신이 되며(우주적인 보리심), 그 큰 우주마음의 보리심을 품고서 적정(寂靜)의 열반에 들게 되면, 이것이 바로 모든 중생을 멸도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마땅히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리라"라는 의미로써, 구도자는 아주 큰 대승적 마음을 품고 우주전체와 일체가 되어 열반에 모든 중생과 함께 들어가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문장에서 <그러나 이렇게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였지만, 실은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라고>
그런데 앞에 첫번째 줄은 주체인 "나"가 있고, 대상인 "멸도에 들게할 일체 중생"이 있어서 주,객 이원화로 분리된 상태에서 결심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번 두번째 말씀에서 " 이렇게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였지만~" 이라는 문장은 ' 드디어 큰 보리심을 품고 비이원적인 열반상태에 진입을 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무상정등각보리심, 절대상태)으로 진입을 하니 "나"가 사라지므로서, 일체 중생도 함께 사라져서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객(主客) 이원적(二元的)인 현상세계에서는 주체인 "나"와 대상인 "제도할 일체 중생"이 있어서 큰 보리심을 품고 수행을 한 결과, 무상정등각 보리심에 도달하다보니, "나"도 없어지고, 일체 중생도 모두 사라져서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나"가 없으니 자연히 "중생들"도 없으므로, 실제로는 제도한 중생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뇩삼먁삼보리심을 깨닫고 나면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최종 깨달음이란 바로 "자기와 세상이 아무 것도 아닌 것(無)"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체 중생을 멸도해 들게 했지만, 실은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고 말씀한 까닭은, 바로 깨달으면 "나"라는 아상(我相)이 없어졌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야부스님은 이 금강경 구절에서~
"만일 어떻게 머무는가 묻는다면,
중(中)도 아니고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다.
머리엔 작은 풀도 덮지 않고 발은 염부제도 밟지 않았도다.
가늘기는 작은 먼지를 쪼갠 듯하고
가볍기는 나비가 춤을 추기 시작한 것과 같도다.
중생을 다 멸도 하되 멸도함이 없는 것을 알면
이것이 바로 흐름을 따르는 대장부로다."
- 한마디로 바르게 머무는 것은 "무주(無住)에 머문다",
즉 '머문바 없는 데에 머문다'는 것입니다.
또한 야부스님이 " 어느 땐 달이 하도 좋아서 창주 지나가는 줄도 몰랐다"라고 하니, 함허스님은 설의에서~
" 철선을 끌고 바다에 들어가니 낚싯대 드리운 곳에 달이 훤히 밝았도다.
성품이 달빛에 차갑게 비치는 그림자를 사랑하여 신선이 사는 곳을 지나도 혼연히 알지를 못하도다. 다시 알지어다. 도중에 도리어 청산(靑山)의 일을 기억하니 종일토록 행하고 행하여도 그 행함을 알지 못하도다."
-보리심을 발한 보살이 몸을 이끌고 생사의 바다에 들어가니, 궁구하는 곳에 반야의 지혜가 훤하게 비친다. 반야의 빛에 의지하여 주변의 경계에 물들지 않아서 무슨 일을 하든 간에 항상 근본과 일체가 되므로 종일토록 어떤 일을 행해도 자기가 일을 행한다는 자체를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다음 문장에서<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나'라는 아상(我相)이 없어졌기 때문에, "나를 따라서 줄줄이 생겨난 인상(人相, 사람이라는 생각), 중생상(衆生相,살아있는 생명체라는 생각), 수자상(壽者相,죽지않는 영혼이 있다는 생각)도 저절로 따라서 사라지는데, 이렇게 아상, 중생상, 인상, 수자상이라는 "내가 있다"는 생각이 모두 없어졌기 때문에, 제도한 중생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주체가 없어지면 "대상"도, 남도 없어져서 모두가 하나로 녹아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구도자로써 이러한 아상,중생상,인상,수자상이 아직 남아 있다면 진정한 깨달은 보살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육조스님은 여기서
"보살이 만약 중생을 가히 제도할 게 있다고 보면 이는 곧 아상이요, 능히 중생을 제도하는 마음이 있으면 곧 인상이요, 열반을 가히 구한다 이르면 곧 중생상이요, 열반을 가히 증득할게 있다고 보면 곧 수자상이니, 이 네 가지 상이 있다면 곧 보살이 아니니라" 고 했읍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보시행을 하면서 "내가 불쌍한 사람을 도와 주었다" "내가 보시를 했다"라는 생각을 한다면 이는 "나"를 없애는 참된 보시행이 아니며, 아상을 더욱 키우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내가 깨달았다"고 주장하고 다닌다면 깨달은 "나"가 아직 남아 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깨달았다고 볼 수가 없읍니다.
요즘도 깨달았다는 스승들이 자기가 견성했다고 제자들을 뫃아놓고 수행단체를 만들고 선원을 차려서 여러사람들을 가르쳐 주는 경우가 흔하게 많읍니다만, 극히 일부의 어떤 사람들은 남이 보기에는 그들의 언행이 참으로 시시 때때로 아슬 아슬하고 위태해 보이기도 하고, 같은 구도자 입장에서 보기에 참으로 민망스럽게 보이는 경우도 많은 것 같읍니다..
어떤 자칭 스승이라는 사람은 석가부처가 100% 깨달은 수준이라고 친다면 자기는 대략 70% 정도 수준에 도달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보았는데, 참으로 어이 없는 웃음이 나올 뿐입니다.
"나는 이 정도 수준으로 깨달았다"라는 말 자체가 이치에 안맞는 말입니다.
깨달으면 "나"가 사라져야 할 텐데, 어째서 깨달은 "나"가 자신을 앞세우겠읍니까?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나"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고, 깨달았다는 생각조차 없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깨달음이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깨달으면 자기 자신조차 없어졌는데 또 어찌 무엇을 얻었다고 말할 수가 있겠읍니까? 그 이유에 대하여 금강경 본문의 다음 구절에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깨달은 직후의 자기 심정을 묘사한 선시 한구절을 감상해 보겠읍니다.
경허선사가 대오하고 나서 지은 오도송에 이런 구절이 있읍니다.
<사방을 둘러 보아도 사람이 없어
의발(衣鉢)을 누구에게 전하랴
의발을 전하려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 없네.>
깨닫고 나니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사람이 없었겠읍니까? "나"라는 개인성의 느낌이 없어졌기 때문에 전체가 하나가 되었다는 느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의발(衣鉢)"은 깨달은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수해 준다는 상징으로 가사와 바리때를 말하는데, 깨닫고 보니 전체가 하나로 여겨져서 법을 전해줄 사람(상대)도 없다는 것을 표현한 오도송입니다.
경허스님이 이 오도송에 다시 또 스스로 덧글을 붙혔 놓았는데,
<봄산에 꽃은 웃고 새는 노래하며
가을 밤에 달 밝고 바람은 맑으니
이러한 때에 무생(無生)의 한 곡조를 얼마나 불렀던가.>
라고 했읍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