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금강경의 "구경(究境)에는 내가 없다"에 대하여(1)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35)
제17분 究竟無我分(구경무아분)
爾時 須菩提白佛言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云何應住
이시 수보리백불언 세존 선남자선여인 발아누다라삼묘삼보리심 운하응주
云何降伏其心
운하항복기심
佛告須菩提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當生如是心
불고수보리 선남자선여인 발아누다라삼묘삼보리심자 당생여시심
我應滅度一切衆生 滅度一切衆生已 而無有一衆生實滅度者
아응멸도일체중생 멸도일체중생이 이무유일중생실멸도자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유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비보살
所以者何 須菩提 實無有法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소이자하 수보리 실무유법 발아누다라삼묘삼보리심자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於然燈佛所 有法得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어연등불소 유법득발아누다라삼묘삼보리부
不也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佛於然燈佛所 無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불야 세존 여아해불소설의 불어연등불소 무유법득아누다라삼묘삼보리
佛言 如是 如是 須菩提 實無有法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불언 여시 여시 수보리 실무유법 여래득아누다라삼묘삼보리
須菩提 若有法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 然燈佛卽不與我授記
수보리 약유법여래득아누다라삼묘삼보리자 연등불즉불여아수기
汝於來世當得作佛 號釋迦牟尼
여어내세당득작불 호석가모니
以實無有法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이실무유법 득아누다라삼묘삼보리
是故 然燈佛與我授記 作是言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시고 연등불여아수기 작시언 여어내세 당득작불 호석가모니
何以故 如來者 卽諸法如義
하이고 여래자 즉제법여의
若有人言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 實無有法 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약유인언 여래득아누다라삼묘삼보리 수보리 실무유법 불득아누다라삼묘삼보리
須菩提 如來所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於是中無實無虛 是故如來說一切法
수보리 여래소득아누다라삼묘삼보리 어시중무실무허 시고여래설일체법
皆是佛法
개시불법
須菩提 所言一切法者 卽非一切法 是故名一切法
수보리 소언일체법자 즉비일체법 시고명일체법
須菩提 譬如人身長大 須菩提言 世尊 如來說人身長大 則爲非大身 是名大身
수보리 비여인신장대 수보리언 세존 여래설인신장대 즉위비대신 시명대신
須菩提 菩薩亦如是 若作是言 我當滅度無量衆生 則不名菩薩
수보리 보살역여시 약작시언 아당멸도무량중생 즉불명보살
何以故 須菩提 實無有法 名爲菩薩
하이고 수보리 실무유법 명위보살
是故佛說 一切法 無我 無人 無衆生 無壽者
시고불설 일체법 무아 무인 무중생 무수자
須菩提 若菩薩作是言 我當莊嚴佛土 是不名菩薩
수보리 약보살작시언 아당장엄불토 시불명보살
何以故 如來說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하이고 여래설장엄불토자 즉비장엄 시명장엄
須菩提 若菩薩通達 無我法者 如來說名眞是菩薩
수보리 약보살통달 무아법자 여래설명진시보살
제17분 구경에는 나가 없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선남자와 선여인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 나가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다면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마음을 내라. '내가 마땅히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리라. 그러나 이렇게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였지만 실은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라고.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수보리야, 그 까닭은 아뇩다라삼보리를 일으킬 어떤 한 법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이 있느냐?
"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에는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아뇩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도 없읍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여, 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만한 어떤 법도 있지 않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라면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하시기를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하시지 않으셨을 것이지만, 실로 어떤 법이 있지 않은 경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기에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수기하셨느니라. 왜냐하면 여래란 모든 법에 여여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말한다면 수보리야,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며,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나를 비방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설한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일체법이라 함은 곧 일체법이 아니니, 그 까닭에 이름이 일체법인 것이다.
수보리야, 예컨대 몸집이 아주 큰 사람의 비유와 같다."
수보리가 말햇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몸이 아주 크다는 것도 실은 큰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큰 몸일 뿐입니다."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아서 만약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에 들게 했다'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고 이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않는 이를 보살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다'고 한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하리라'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무아의 법에 통달하였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진실로 보살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17분을 구경무아(究境無我)라고 제목을 붙혔는데, 수행의 궁극의 목적은 "내가 없다"(無我) 라는 것을 또 다시 반복해서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어떤 구도자가 심오한 경지의 구경(究境)을 깨쳤다 하드라도 아직 "나"라는 상(相)이 남아 있다면 진정한 궁극의 깨달음을 얻었다 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깨달았다는 사람에게 깨달았다는 자기 만족의 찌꺼끼가 남았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깨달아진 것이 아니라, 상상적인 깨달음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깨달았다는 "나"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금강경 전체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두 가지 말씀은 <상(相)에 머물지 말라>는 것과 <아상(我相)에서 벗어나라>는 말씀입니다.
<상에 머물지 말라>는 것은 모든 나타난 상(相)은 이원화적인 대상(對象)인 것입니다. 사실 나라는 느낌의 아상(我相)도 하나의 의식의 대상(對象)일 뿐입니다.
이 마음에 나타난 마음과 세상 등,모든 것은 상(相)일 뿐이지 상(相) 아닌 것이 없읍니다. 어떤 상(相)이든지 항상 변화하는 파동의식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 보이는 것으므로 그 자체는 고정된 실체성(實體性)이 없는 허상의 그림자라고 볼 수 있읍니다. 모든 상(相)이 다 오원소 파동의식들이 움직이면서 서로 서로 인연관계로 간섭하여 잠깐 동안 보여지는 그림자 허상입니다.
그것이 설사 무한한 공(空)의 느낌일지라도 일종의 흐르는 상(相)이므로 의식의 대상화된 상태입니다.
이 마음과 감각에 나타난 세상 모든 상(相)은 원래는 없었으나 몸과 마음으로 인해서 새로 생긴 주객 둘로 나누어져서, 한쪽은 "나"라는 상이고 다른 쪽은 대상(對象)으로의 상(相)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주체나 대상 둘 다 실재(實在)하지 않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실재(實在)한다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으며, 상(相)이 없는 것(無相)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상(相)으로 나타난 아상(我相)과 상(相,對象))은 의식의 파동성 흐름에 의해서 항상 변하는 것이죠.
따라서 실재성이 없는 환(幻)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상(相)에 집착하여 머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상(相)에 집착하지 않고 머물지만 않는다면 "나"라는 가상 주체인 아상(我相)도 자연히 그 존재가 희미해지게 되어 있읍니다.
또한 <아상에서 벗어나라>는 말은 금강경에서 "아상,중생상,인상,수자상을 없애라"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아상>을 벗어나면 자연히 아상에 딸린 나머지 인상,중생상,수자상도 같이 사라지게 되어 있읍니다.
주객(主客)이원화 세계에서 주체라고 여겨지는 이 아상(我相)은, 대표적인 것이 "내가 있다 라는 생각" 이 기본이 됩니다.
"내가 있다"는 것은 개인적인 육체의식의 "나" 뿐 만 아니라, 감각세상으로 나타난 이 전체 우주세상도 다 포함되고 있는 우주적 존재의식을 말합니다.
이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은 가장 미세한 파동성의식의 움직임으로써, 그러한 진동의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있다"라고 느껴지는 것인데, 그 "내가 있다"라는 진동 움직임의 의식 파동장(波動場)범위 안에서 이 몸과 마음과 함께 이 세상 전체도 환(幻)의 그림자로서 나타나는데, 이것은 마치 종류가 다른(오원소) 파동성 움직임들끼리 서로 서로 복잡하게 인연성으로 얽혀서 파동뭉치들의 변화하는 간섭(干攝)무늬가 만들어지듯이, 그렇게 그려진 그림자들입니다.
따라서 아상(我相)이 없어야 된다는 것은 이 "내가 있다"는 미세한 파동 움직임의 우주적 자아의식까지도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아상"을 벗어난다는 것은 육체를 가진 개체의식 뿐 만이 아니라, "내가 있다"는 미세한 우주적 자아의식에서 조차도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무아(無我) 상태라는 것은 의식의 파동성은 있되 파동성 움직임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의식이 파동성 움직임이 없다고 완전히 죽은 의식이냐 하면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절대 무아상태는 바로 파동성이 극도로 한점에 집적되어 잠재해 있는 것처럼 침묵하고 있어서 파동성의 움직임만 없을 뿐이고, 모든 종류의 파동성 움직임이 바로 여기서 발산되어 나오는 모든 의식의 근원인 것이죠.
그래서 의식의 파동성 움직임이 바로 금강경에서는 상(相)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이 파동성 움직임에서 벗어나야지 움직임없는 전체성의 근원, 무아(無我)가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체라고 여겨지는 이 가상의 "나"가 사라지면 상(相)이라는 대상도 같이 사라지게 되어 있읍니다. 그건 바로 파동성의식이 조용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체인 "나"와 대상인 상(相)은 항상 같이 붙어 다니는 한쌍이므로 만일 대상인 어떤 상(相)에 집착하지 않으면, 주체인 아상(我相)도 나서지 않습니다.
"나"가 있으면, 동시에 상(相)도 나타나게 되어 있고, 어떤 상(相)이 있다면, 동시에 보는 주체인 "나"도 드러나게 마련이죠.
또한 상(相)에 머물지 않으면, 주체인 "나"도 없으며, 주체인 "나"가 없으면, 역시 특정한 상(相)에 머물지 않게 됩니다.
결국은 상(相,대상)에 머물지 않는 것이나, 아상(我相)을 버리는 것이나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아상(我相)이든 모든 대상(對相)이든 간에, 그것이 인연법에 의해서 감각기관과 의식 상에 임시로 잠깐 드러나 보이는 파동적 연기성(緣起性)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고정된 실체가 없고 뜬구름이나 안개처럼 항상 진동하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잠깐동안 드러나 보이는 그림자이기 때문에, "나라는 아상'이 있다고 집착하거나, 어떤 한 대상(相)에 집착하게 되면, 그것이 환(幻)의 "나"에게 고통을 만들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있지도 않은 가상의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실체가 없는 환상(相)을 쫏아 다니는 이 삶 자체가 바로 고통이라는 말입니다.
원래는 없었던 환상의 "나"가 무시로 진동하며 흐르는 실체없는 환(幻)의 그림자같은 상(相)을 붙잡으려고 쫏아 다니며 집착을 하니, 그것이 바로 스스로 고통을 만드는 행위라는 말입니다.
이 중생의 삶이 꿈같은 환상이며, 고통을 스스로 만들고 있다 라는 것을 스스로 이해할 수 있다면, 비로소 석가부처의 가르침에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본래의 자기인 참나를 깊히 탐구하려는 열의가 생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에서 말하는 '보살이 아뇩다라사먁삼보리심을 발(發)한다'라는 말입니다. 구도자가 초발심(初發心)을 일으킨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 수행방편으로 가르쳐 주는 내용이 금강경에서는 집중적으로, 그림자인 상(相)에 집착하지 말고 타파하라는 것이며, "나"라는 아상에서 벗어나라고 계속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금강경에서는 자꾸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해 가면서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비슷한 말씀을 계속 반복하고 있읍니다만, 배우는 사람들은 이 반복되는 비슷한 말씀들을, "에~이, 전에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면, 주책 늙은이 잔소리지 잔소리, 싱겁게스리 똑 같은 잔소리가 여기 또 나왔군,"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그냥 무시하고 지나 갈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말씀을 듣는 신선한 태도로 이 기회에 그 말씀의 구절들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깊히 새겨들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번 회는 17분 본문 전체를 게재하느라 글 분량이 많아져서 다음 회부터 각개 문장별로 풀어가면서 이야기를 해 보겠읍니다. -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