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금강경

33. 금강경의 "경을 지니는 공덕"에 대하여

무한진인 2014. 2. 4. 20:30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33) 

 

第15分 持經功德分(지경공덕분)

須菩提 若有善男子 善女人 初日分以 恆河沙等身布施 中日分復以恆河沙等身布施

수보리 약유선남자 선여인 초일분이 항하사등신보시 중일분부이항아사등신보시

後日分亦以恆河沙等身布施 如是無量百千萬億劫 以身包施

후일분역이항아사등신보시 여시무량백천만억겁 이신보시

若復有人 聞此經典 信心不逆 其福勝彼 何況書寫 受持讀訟 爲人解說

약부유인 문차경전 신심불역 기복승피 하황서사 수지독송 위인해설

須菩提 以要言之 是經有不可思議 不可稱量 無邊功德 如來爲發大乘者說

수보리 이요언지 시경유불가사의 불가칭량 무변공덕 여래위발대승자설

爲發最上乘者說

위발최상승자설

若有人能受持 讀誦 廣爲人說 如來悉知 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不可量

약유인능수지 독송 광위인설 여래실지 시인 실견시인 개득성취불가량

不可稱無有邊 不可思議功德

불가칭무유변 불가사의공덕

如是人等 卽爲荷擔 如來阿耨多羅三藐三菩提

여시인등 즉위하담 여래아뇩다라삼먁삼보리

何以故 須菩提 若樂小法者 着我見 人見 衆生見 壽者見 則於此經不能聽受 

하이고 수보리 약요소법자 착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 즉어차경불능청수

讀誦 爲人解說

독송 위인해설

須菩提 在在處處 若有此經 一切世間 天人阿修羅所應供養 當知此處 則爲是塔 皆應

수보리 재재처처 약유차경 일체세간 천인아수라소응공양 당지차처 즉위시탑 개응

恭敬 作禮圍繞 以諸華香 而散其處

공경 작예위요 이제화향 이산기처 

수보리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 항아강 모래알 수 만큼의 몸으로 보시하고, 낯에 다시 항아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며, 저녁에 또한 항아강 모래알 수 만큼의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같이 백천만억 겁 동안 몸으로써 보시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진심으로 믿어 거스리지 아니하면 그 복이 앞의 것보다 수숭할진대, 하물며 이 경을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자세히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은 얼마나 크겠느냐, 수보리야, 한마디로 말하면 이 경에는 생각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가없는 공덕이 있으니, 여래는 대승을 발한 이를 위해 이 경을 설한 것이며, 최상승을 발한 이를 위해 이 경을 설한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수지독송하여 널리 남을 위해 설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볼 것이니, 모두가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가이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와같은 사람들은 곧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 것과 같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소소한 법을 즐기는 자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는 것이므로 이 경을 능히 알아듣고 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명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어떤 곳이든 이 경이 있으면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가 응당 공양하니니 마땅히 알라.

이곳은 곧 탑을 모신 곳처럼 여겨질 것이니 모두가 기꺼이 공경하고 절하며 에워싸고 돌면서 가지가지 꽃과 향을 그 곳에 뿌릴 것이다.

 

이 15분에서는 경전을 외워서 자기 것으로 완전히 익히고, 또한 남에게도 설명해 준다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큰 공덕을 받는다고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금강경의 수행법이 나오는데, 첫째는 금강경의 글자를 베껴쓰는 사경(寫經)연습과 둘째는 수지독송(受持讀誦), 즉 기억하고 외워서 항상 머릿속에 지니고 있는 일이고, 셋째는 남에게 금강경을 설명해 주는 일입니다. 남에게 금강경을 해설해주는 것도 일종의 금강경 수행이라고 볼수가 있는 것이죠.

 

<수보리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 항아강 모래알 수 만큼의 몸으로 보시하고, 낯에 다시 항아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며, 저녁에 또한 항아강 모래알 수 만큼의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같이 백천만억 겁 동안 몸으로써 보시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진심으로 믿어 거스리지 아니하면 그 복이 앞의 것보다 수숭할진대, >

<수보리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 항하강 모래알 수 만큼의 몸으로 보시하고, 낯에 다시 항아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며, 저녁에 또한 항아강 모래알 수 만큼의 몸으로 보시하여,>라는 말은, 단 한 순간도 끊어지지 않고 연속으로 수없이 자기 몸을 희생해서 보시를 한다는 극한 표현입니다.

아침,점심,저녁이라고 하루를 세때로 나누어 말한 것은 "하루 종일" 또는 "온종일" 끊어지지 않고 연속해서 행한다는 것이고,

"항하강 모래알 수 만큼의 몸으로 보시를 하고"라는 말은, 헤아릴 수 없이 반복해서 자기 몸을 희생하여 여래에게 보시한다는 것입니다.

항하강 모래알 수 만큼의 몸으로 보시한다는 것은, 수없는 윤회의 생을 거치면서 계속, 자기를 희생해서 보시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수많은 생애를 거쳐서 자기 목숨을 수없이 희생하며 여래에게 보시한다는 뜻도 있읍니다.

즉 < 이와같이 백천만억겁 동안 몸으로써 보시하더라도>라는 것은 수없이 반복되는 윤회의 전생에서 헤아릴 수없이 반복해서 자기 목숨을 희생해서 여래에게 보시를 한다하더라도 -- 라고 표현한 것으로서, 최고의 유위적(有爲的)인 보시행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몸으로 보시한다는 것은 "내가 있다"는 에고의 마음을 가지고 보시를 하기 때문에 유위적(有爲的)인 보시가 되는 것이죠.

이렇게 유위적인 보시를 해도 유한한 공덕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러나 아무리 훌륭하고 헤아릴 수 없는 수의 유위적 보시를 하더라도, 금강경을 진심으로 믿어서 실천을 하여 "나"가 사라진 무위(無爲)의 무량한 복덕을 얻는 것 보다 못하다는 것을 표현한 내용입니다. 

자기 몸을 희생해가며 "내가 있다"는 에고적인 마음으로 보시하여 얻는 유위(有爲)의 공덕을 쌓으면 죽어서 천상세계 수준 정도는 갈 수 있겠지만, 윤회의 수레바퀴의 범위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죠.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진심으로 믿어 거스리지 아니하면 그 복이 앞의 것보다 수숭할진대>

- 진심으로 믿음을 거스르지 않는다면(信心不逆)- 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 원본이나 다른 역본에는 모두 "비방하지 않는다면"으로 번역되어 있읍니다.

현장본에도 불생비방(不生誹謗), 산스크리트 원본은 "비방하지 않으면" 기타 다른 역본도 모두 "비방하지 않으면"으로 되어 있읍니다만, 이 구라마즙본만 신심불역(信心不逆)으로 되어 있으므로, 그 뜻은 "비방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읍니다. "비방하지 않는다"는 뜻은 금강경을 완전히 믿고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비방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금강경에 대해서 전혀 모르거나 무관심해서 비방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겠죠.

 

금강경을 공부해서 완전히 믿어서 실천하게 된다면, 금강경을 저절로 비방하지 않게 되므로, 앞의 몸으로 보시하여 얻는 유위의 복덕보다 더 큰 무위의 복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금강경을 배워서 얻는 무위의 복덕은 윤회의 수레바퀴 자체를 훌훌 벗어나 절대참나의 깨달음(해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오직 개인인 "나"의 복덕을 위하여 몸으로 보시를 하는 유위의 보시보다 훨씬 큰 공덕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으로 보시하는 유위의 공덕보다 금강경을 배워서 굳게 믿고 실천하여 얻은 무위의 복덕이 더 수숭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 경을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자세히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은 얼마나 크겠느냐,>

그렇다면 금강경의 가르침을 배워서 실천하여 그 공덕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으로 금강경을 공부해야 되는가?  

즉 금강경을 공부하는 구체적인 공부방법을 여기서 예시하고 있읍니다.

첫째는 서사(書寫),즉 금강경의 글자를 베껴 쓰면서 그 깊은 뜻을 스스로 새기는 연습을 하는 사경(寫經)공부방법을 말하고 있읍니다.

금강경의 글자를 한글자 한글자 정성스럽게 베껴 쓰는 과정에서 그 금강경 가르침에 몰두할 수가 있고 더욱 깊은 이해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보통 책을 읽을 때에 대략 소설책 읽어나가듯이 주루룩 단번에 읽어내려가는 것이 대부분인데, 사경을 하면서 한글자 한글자를 꼼꼼히 쓰고 이해하면서 그 뜻을 색이면 저절로 마음에 친숙해지고 그 깊은 뜻을 파악할 수가 있겠지요. 

둘째는 수지독송으로써, 금강경을 외워서 완전히 자기 것으로 익히는 공부 방법입니다.수지독송이라는 말이 단순히 금강경 작은 책자를 항상 몸이 지니고 다니면서, 수시로 소리내서 읽는 것이 아니라, 금강경 전 내용을 완전히 외워고 기억해서 마음 속에 명확하게 항상 간직하고 잊지 말라는 말입니다. 즉 금강경을 완전히 외워서 언제 어디서든지 금강경을 잊지 않고 생각하며 마음 속에 그 가르침을 항상 지니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 경우는 금강경의 글자를 의미로 이해하기 위해서 외우고 독송하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자기가 이해한 것을 남을 위해서 해설해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경연습과 수지독송으로 완전히 내면에서 익은 열매를 남을 위해 다시 보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수행방법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금강경을 오랫동안 공부하면 저절로 내면에서 금강경의 향기가 피어나게 되며, 그 지혜의 향기를 다시 남에게 되돌려서 회향(回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스로 깨달음의 땅을 다져서 굳어지게 하는 것이죠. 이것은 금강경 공부로 인해 내면에서 어떤 지혜의 결실이 이루어지면 아마도 저절로 드러나서 베풀어지는 자비행이 아닌가 합니다. 금강경을 공부해서 깨달음을 얻는다면 '모두가 하나'라는 자비심이 나오게 되고 따라서 자연적으로 그 깨달음의 향기가 저절로 퍼져 나가겠지요. 그래도 금강경에서는 남을 위해서 해설해주어, 금강경의 반야지혜를 널리 퍼트리라고 다시 한번 일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수보리야, 한마디로 말하면 이 경에는 생각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가없는 공덕이 있으니, 여래는 대승을 발한 이를 위해 이 경을 설한 것이며, 최상승을 발한 이를 위해 이 경을 설한 것이다. >

일상 삶에만 뭍혀사는 보통사람은 금강경 내용이 도데체 무엇을 말하는지 전혀 알수 없읍니다. 즉 보통사람이 쓰고 있는 이원적인 지성으로는 아무리 따지고 분석하고 펼쳐보아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래서 금강경 자체가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그런데 설사 금강경 내용을 머리로 이해했다고 해도 실은 전혀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원적인 지성의 이해일 뿐이며,금강경에서 가르쳐 주는 반야지혜는 오직 모름 속에 가만히 잠겨서 정혜(定慧)를 유지해야 드러날 조건이 됩니다. 마치 어려운 화두를 드는 것이나 다를 바 없이 공부를 해야 합니다.

금강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어떤 다른 생각이나 뜻을 사색을 하지 말고, 오직 모름 속에 꾸준히 잠겨서 깊은 지(止)와 관(觀)을 유지해야만 나중에 그 모름 안에서 모름 자체를 발판으로 그 모름을 전체적으로 벗어나야 이해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학문마냥 극히 일부분의 이원적인 개념을 두뇌로 따지고 풀어서 알았다고 이해하려고 한다면,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대승을 발한 사람을 위한 가르침이며, 최상승을 발한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내용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말하자면 이원화 마음이 정화되어 맑은 순수의식을 지닌 최상승의 구도자를 위한 최고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처음 입문하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경전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온갖 기초수행을 해서, 그 동안 8식에 쌓아온 악습을 깨끗히 정화시키고, 기본적인 마음의 덕(德)과 선(善)을 닦아서 구도자로서의 맑은 기초 정신자세가 굳어진 상근기 구도자들이 마지막 넘어야 할 관문을 가르쳐 주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오직 "모를 뿐"이라는 날카로운 주의를 가지고 천길 철벽 앞에서 발가벗고 얼굴을 마주 대면하면서 공부해야 합니다.

단순히 죽어서 좋은데 태어나길 바라거나, 편안하고 건강하게, 잘 살게 해 달라고 좋은 복을 비는 정도로 공부를 해서는 최상승의 공부가 아니라, 째째한 범부의 기복행위의 수준에만 머물게 될 뿐입니다.

기복적인 수행은 극히 부분적인 유위의 복은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원한 무위의 복덕을 가르쳐주는 금강경을 공부한다면, 적어도 "나"라는 에고를 완전히 버리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금강경을 제대로 공부할 자격이 있다는 겁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수지독송하여 널리 남을 위해 설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볼 것이니, 모두가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가이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와같은 사람들은 곧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 것과 같다.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볼 것이다>라는 말은 금강경을 완전히 수지독송하고 남에게 가르쳐 줄 정도로 익숙해 있으면, 그의 내면에 있는 절대참나(여래)가 그와 연결되어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참나에 가깝게 친해진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참나(여래)는 말이 없지만, 이미 참나가 발하는 반야지혜에 물들어서 생각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그 삼먁삼보리심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열심히 수지독송하며 다른 사람에게 금강경을 설명해 주면 여래의 반야지혜인 아뇩삼먁보리는 미리 따논 당상이라는 것입니다.

반야지혜는 누구나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특히 금강경의 수행을 통해서 드러날수 있다는 것이죠. 그만큼 금강경 수지독송과 다른 이에게 널리 전송하는 공덕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소소한 법을 즐기는 자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는 것이므로 이 경을 능히 알아듣고 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명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소한 법을 즐기는 자"라는 것은 현생에 잘 되게 해달라고 비는 기복행위나 내세에 좋은 곳으로 가게 해달라고 복을 비는 행위를 말하는데, 이 복을 비는 행위는 바로 "나"라는 에고, 즉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는 기복행위로서 소소한 법을 즐기는 째째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금강경은 오로지 "나"라는 에고를 버리고 무한하고 모양없는 무아(無我)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는 경전이므로, 째째하게 자기 개인 복이나 비는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는 금강경의 심오한 의미에 관심도 없고, 알아듣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이 구라마즙본에는 위의 문장에서 약락소법자(若樂小法者, 소소한 법을 즐기는 자)라고 번역되어 있읍니다만, 산스크리트 번역본에는 "확신이 부족한 중생"이라고 번역되어 있으며, 현장본에서도 직역하여 하열신해유정(下劣信解有情, 믿고 받아들이는 능력이 부족한 중생)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읍니다.

따라서 위의 문장에서 "소소한 법을 즐기는 자"라는 뜻은 또 다른 뜻으로 "금강경의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미혹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풀어서 이해해도 되겠읍니다.

 

수보리야, 어떤 곳이든 이 경이 있으면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가 응당 공양하니니 마땅히 알라.

이곳은 곧 탑을 모신 곳처럼 여겨질 것이니 모두가 기꺼이 공경하고 절하며 에워싸고 돌면서 가지가지 꽃과 향을 그 곳에 뿌릴 것이다.

금강경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금강경이 있는 곳에는 천신과 사람과 아수라등 만물이 마땅히 소중하게 공경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금강경 자체가 가장 높은 수숭한 절대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굳게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에 절하고 꽃과 향을 바치면서 공경하듯이 금강경도 부처님의 진신사리 탑처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금강경이 소중한 것이니 철저한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