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금강경의 "상(相)을 떠난 자리가 적멸(寂滅)이다"에 대하여(6)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32)
須菩提 如來是眞語者 實語者 如法자 不誑語者 不異語者
수보리 여래시진어자 실어자 여법자 불광어자 불이어자
須菩提 如來所得法 此法無實無虛
수보리 여래소득법 차법무실무허
須菩提 若菩薩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入闇 則無所見
수보리 약보살심주어법 이행보시 여인입암 즉무소견
若菩薩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有目日光明照 見種種色
약보살심부주법 이행보시 여인유목일광명조 견종종색
須菩提 當來之世 若有善男子善女人 能於此經 受持讀誦 則爲如來 以佛智慧
수보리 당래지세 약유선남자선여인 능어차경 수지독송 즉위여래 이불지혜
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
실지시인 실견시인 개득성취무량부변공덕
수보리야,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여법한 말을 하는 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진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수보리야, 만약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러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데 들어가면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햇빛이 비침에 밝은 눈으로 가지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수보리야, 다음 세상에서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서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나니,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수보리야,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여법한 말을 하는 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다. > 이 문장은 부처님이 스스로 자기의 말을 굳게 믿게끔 확신을 다져주는 문장입니다.
사실 금강경 내용은 보통 범부들이 지성으로써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내용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부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끝까지 읽기도 어려운 내용입니다.
금강경 내용을 보면 모든 상을 버리라고 했다가, 또는 어떤 때는 모든 상은 상이 아니라고 했다가, 중생은 수행을 해서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가,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고 했다가, 또 깨달음이라고 말하면 깨달음이 아니라고 한다든가, 겉으로 나오는 말씀 내용만 알아 듣고서는 도저히 그 방향을 걷잡을 수가 없는 것 처럼 들리지만, 실은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서, 또한 듣는 사람의 근기에 맞추어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러나 항상 말로 할 수 없는 그 '하나'만을 말씀하신 것이지 다른 어떤 것도 헛되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말을 듣고는 부처님의 말씀은 이랬다,저랬다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어서 진실한 말인지, 아니면 지나가는 헛말인지 아리송하다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겠죠.
그래서 부처님 스스로가 금강경 듣는 사람들에게 확실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하여 자신은 참다운 말만을 하는 사람(眞語者)이고, 그리고 실질적인 말을 하는 사람(實語者)이며, 그리고 항상 진리의 말을 하는 사람(如法者), 그리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不誑語者), 그리고 금강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不異語者)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십니다.
위 문장에서 진어자,실어자,불광어자,불이어자라는 말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겠지만, 여법자(如法者)라는 단어는 좀 생소하죠. 이 여법(如法)이라는 것은 선불교의 활구화두(活句話頭)와 같은 직접 절대본체를 표현한 말을 말하며,예를 들면 금강경에서 <여래가 A라고 말한 것은 A가 아니다, 그 이름이 A라고 한다>라는 문장이나 < 불가사의(不可思意)하다, 즉 생각할 수가 없다. 말로 할 수가 없다(不可說), 모르겠다,> 또한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의 우주>같은 무한량을 표현문장도 여법어(如法語)라고 볼 수가 있겠읍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금강경 오가해에서 육조혜능은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읍니다.
"참다운 말(眞語)란 일체 유정(有情),무정(無情)이 모두 불성이 있음을 설한 것이요, 실다운 말(實語)이란 중생이 악업을 지으면 결정코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 것이요, 여법한 말(如法語)이란 중생이 선법을 닦으면 결정코 즐거움의 과보를 받는 것이요, 속이지 않는 말(不誑語)이란 반야바라밀법이 삼세제불을 출생하되 결정코 헛되지 않음이니라. 말이 다르지 않다는 것(不異語)은 여래가 하신 언설이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으며 나중도 좋음을 설하시니, 뜻이 미묘하여 일체의 천마외도들이 능히 초월할 수 없고 부처님의 말씀을 파괴할 수 없음이니라"라고 했읍니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진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깨달으면 얻을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공허한 것도 아니다'라는 이말도 바로 금강경의 핵심 아니, 불법의 핵심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진리는 실다움도 없다(無實)- 이 말은 자성(自性)의 본체는 모양이 없기 때문에 찾으려 해도 찾을 수도 없고, 얻으려 해도 얻을 수 없는 까닭에 실다움이 없다(無實)라고 말하며, 이 실다움 없는 그 자체가 바로 참다운 모양(法身,眞實)이라고 합니다.
진리는 헛됨이 없다(無虛)- 자성으로부터 나오는 작용은 무한량으로 아주 분명하게 나투기 때문에 헛된 것은 아니지만(無虛), 그러나 그 작용은 찰나 찰나에 변화무쌍하므로 고정된 실함이 없이 공(空)해서 참다운 모습이라고 볼 수가 없읍니다.
육조혜능의 해설을 들어 보겠읍니다.
"무실(無實)이란 법(法)의 체(體)가 공적(空寂)해서 상(相)을 가히 얻을 수 없도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항하사 같은 성덕(性德)을 갖추고 있어서 그것은 써도 다하지 못한 까닭에 무허(無虛)라고 말했도다. 그 실(實)을 말하고자 하면 상(相)은 가히 얻지 못하고 그 허(虛)를 말하고자 하면 쓰되 끊어질 사이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유(有)라고 말하지 못하며 무(無)라고도 말하지 못하니, 있으되 있음이 아니고 없으되 없음이 아님이라. 말로써 미치지 못하는 것은 오직 그 참다운 지혜로다. 만약 상(相)을 떠나서 수행하지 않으면 여기에 이를 수가 없느니라."
야부스님이 이르되 " 물속의 짠맛이요, 단청색깔 속에 들어있는 아교풀의 투명함이로다."
또한 " 단단하기는 철과 같고 부드럽기는 연유와 같으니, 볼 때엔 있는 듯하고 찾아보면 또한 없도다. 비록 그렇게 서로 항상 따르나, 또한 그를 아는 이 아무도 없도다, 얏~"
<수보리야, 만약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러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데 들어가면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햇빛이 비침에 밝은 눈으로 가지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금강경에서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상(相)에 머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상(相)에 머물지 말라는 말은 다른 말로 어떤 특별한 한 대상에 이끌리지 말라는 말씀이죠. 그런데 상(相)이란 이원화된 상(對相)인데, 이 대상이란 "나"인 주체가 있기 때문에 대상인 "그것"이 생기는 것으로,"나와 너" 또는 "나와 그것"이라는 주,객 이원화상태에 동전의 양면처럼 갈라져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만일 금강경에 말한대로 상(相)에 머물지 않으면, 특별한 대상이 없으므로 "나"라는 주체라고 할만한 것도 없읍니다. 즉 마음에 상(相)을 안두면 대상이 없으므로, 특정 대상과 상대성인 주체인 "나"도 그 존재가 미미해집니다. 이렇게 상(相)은 바로 이원화 대상을 말하며, 대상에 마음이 머물지 않으면 대상없는 주체는 자연히 주체로써의 작용을 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상태가 오래 유지되어 안정되면 주체와 대상이 하나가 되어 비이원적(非二元的)인 본래 자성을 깨치게 됩니다.
위 문장 <만약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러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데 들어가면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러 보시하면~>이라는 말은,
마음이 어떤 특정한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고 집착하면서 보시한다는 말인데, 이때는 자기가 불쌍한 사람을 도와준다는 행위자로써의 주체라고 여기며,도와주는 대상이 있고, 무엇으로 도와준다는 생각이 있다면 이것은 주,객 이원화의 좁은 분별심의 굴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대상에 얽매여서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와 비슷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특정대상 이외에는 다른 것은 보지 못하고, 전체성의 보편적인 의식을 모르므로 마치 어두운 암흑 속에 있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특정대상에 집착하여, 보시하는 "나"가 남아 있는 이원화 분별상태를 말합니다. "나"가 남아 있어서 의도적으로 보시를 하는 유위행(有爲行) 경우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만약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햇빛이 비침에 밝은 눈으로 가지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만약 보살이 어떤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이라는 말은 마음에 어떤 대상에도 집착없이 넓게 보고 또한 무엇을 보시한다는 마음도 없이 무심으로 보시를 한다면~, 이라는 말입니다. 이 경우는 어떤 특정한 한 대상을 상대로 보시하는 주체인 개인적인 나가 없는 비이원적 전체적인 상태에서 넓은 마음의 보시행을 말합니다. 보시를 하되, 보시하는 주체인 "나"도 느끼지 못하고, 보시받는 어떤 다른 사람도 느끼지 못하는 무심의 보시행으로서,무엇을 보시한다는 생각도 없이, 보시하는 자,보시받는 자, 물건, 이 세가지가 일체가 되어 무심으로 자연스럽게 보시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삼요소가 일체가 되어 주는 자도 없고 받는 자도 없는 일체가 되었을 때는 자성에서 직접 비치는 보편의식 속에 있으므로 마치 햇빛이 비치는 밝은 눈으로 가지가지 사물이 저절로 넓게 보여지는 것과 같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주객 이원적인 상태를 벗어난 비이원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보시하는 주체인 "나"가 없으므로 자연스러운 무위행(無爲行)의 보시라고 볼 수가 있겟읍니다.
<수보리야, 다음 세상에서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서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나니,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이 열반하고 난 뒤 그 후세에도 일반 중생들도 금강경을 외우며 공부하고 완전히 이해하며 공경하면 자성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서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나니, 헤아릴 수 없는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여래>는 바로 항상 변함없는 절대본체, 즉 누구나 지니고 있는 자성, 진리를 말하며, 절대 본체에서 비추는 순수지혜로 저절로 자각(自覺)하고, 반야지혜가 비추어짐으로써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금강경을 외우고 받아 지닌다고 해도 공덕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던가, 수행하는 "나"가 남아 있으며, 의도적인 수행을 한다고 한다면 아직은 생사(生事)의 언덕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깨달음이라는 상(相)을 지니고, 깨달을 '나'가 남아있는 한에는 금강경의 수숭한 공덕을 얻기는 어렵겠죠.
일체 모든 것을 놓아 버릴 때에 바로 눈 앞에 실상(實相)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합니다.
깨닫고자 하는 마음조차 놓아 버릴 때에 깨달음이 온다고 하며, 갖고자하는 욕심을 포기할 때에야 비로소 얻는다고 합니다.
"나"라는 에고의 좁은 테두리를 지워 버리면, 전체적인 '나'가 저절로 드러나며, 아울러 반야지혜가 빛을 발할 겁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