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금강경

금강경의 "가르친 그대로 받아들여 실천하라"에 대하여

무한진인 2013. 11. 7. 19:25

 

 

 

무한진인 금강경 이야기(25) 

 

제13. 如法受持分(여법수지분)

爾時 須菩提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云何奉持

이시 수보리백불언 세존 당하명차경 아등운하봉지

佛告須菩提 是經名 爲金剛般若波羅密 以是名字 汝當奉持 所以者何

불고수보리 시경명 위금강반야바라밀 이시명자 여당봉지 소이자하

須菩提 佛說般若波羅密 則非般若波羅密 是名般若波羅密

수보리 불설반야바라밀 즉시반야바라밀 시명반야바라밀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所說法不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소설법부

須菩提白佛言 世尊 如來無所說

수보리백불언 세존 여래무소설

須菩提 於意云何 三千大千世界 所有微塵 是爲多不 

수보리 어의운하 삼천대천세계 소유미진 시위다부 

須菩提言 甚多世尊 

수보리언 심다세존 

須菩提 諸微塵 如來說非微塵 是名微塵 如來說世界 非世界 是名世界

수보리 제미진 여래설비미진 시명미진 여래설세계 비세계 시명세계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見如來不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견여래부

不也世尊 不可以三十二相得見如來不

불야세존 불가이삼십이상득견여래부

何以故 如來說 三十二相 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 

하이고 여래설 삼십이상 즉시비상 시명삼십이상 

須菩提 若有善男子善女人 以恒河沙等身命布施 

수보리 약유선남자선여인 이항하사등신명보시

若復有人 於此經中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甚多

약부유인 어차경중 내지수지사구게등 위타인설 기복심다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하오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아지니면 되겠읍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밀이니 마땅히 이 이름대로 받아 지니라. 그 까닭은 무엇인가.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진리를 설한 바가 있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한 바가 없읍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미진(微塵)을 많다고 하겠느냐?"

"아주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이 모든 미진을 여래는 미진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이것은 이름이 미진일 뿐이다. 여래가 말하는 세계 또한 그것이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일 뿐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읍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32상이란 곧 상이 아니라 그 이름이 32상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목숨을 바쳐 보시했다 할지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그 복이 더 많으리라."

 

이 13분에서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마음에 새겨서 간직해야 되는가를 다루는 내용입니다.

금강경의 10분까지는 "상(相)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라"는 이론적인 기초 가르침에 해당한다면, 11분부터는 대상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는 실천행에 대해서 다룬 것이지만, 11분과 12분에서는 금강경 실천에 대한 확산과 중요성을 강조한 내용이고, 본격적으로 실천수행은 이 13분의 내용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어떤 불교학자는 금강경은 이 13분까지가 옳바르게 암송된 것이 기록된 것이고, 이후부터는 비슷한 내용들이 여러 암송자들에게서 중복된 것을 그대로 기록한 것으로 14분부터는 별 가치가 없는 내용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고, 만일 그렇다면 금강경이 이 13분까지만 있다면 단순히 소품(小品)에 지나지 않아서 불교역사이래 경전 중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경전까지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여하튼 금강경 내용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에 이1~ 13장까지가 주요핵심내용이 다 들어 있고 이후부터는 앞의 내용들이 거의 반복되는 내용으로 볼 수도 있읍니다.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하오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아지니면 되겠읍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밀이니 마땅히 이 이름대로 받아 지니라. 그 까닭은 무엇인가.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그 동안에 부처님에게 들은 수숭한 법문에 감동하여, 부처님에게 경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요청하면서 아울러 이 가르침을 어떻게 마음 속에 깊히 새겨서 잃어버리지 않도록 할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면서 그 이름과 같이 받아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이라는 뜻은 '금강같이 단단한 지혜를 완성시키는 가르침'이라고 해석할 수 있읍니다.

그 지혜라는 것이 '모든 상(相)을 제거하는 지혜'를 말하는데, 모든 상(相)을 제거하려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강한 것이어야 하겠죠. 그래서 현상세계에서 가장 강한 물질이라는 금강,즉 다이아몬드처럼 다른 물질을 자르면서도 그 자체는 흠집이 전혀 나지 않는 다이아몬드를 비유해서, 다이아몬드처럼 가장 강한 지혜(반야)라고 해서 "금강반야"라고 말하는 것이고, '바라밀'은 '완성', 즉 고통 속의 이 사바세계에서 저 고통이 없는 건너편 세계로 건너간다는 것, 이것을 반야 바라밀, 즉 지혜의 완성이라고 부릅니다.

 

참고로 삼장법사 현장(玄奬)이 한역한 것은 제목을 능단금강경(能斷金剛經)이라고 지었는데, 이 뜻은 '모든 상(相)을 능히 짤라버릴 수 있는 금강같은 단단한 지혜의 가르침 경'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 금강반야바라밀(金剛般若波羅密經)이라는 이름과 같이 받아 지니라고 말씀한 뜻은 '모든 상(相)을 짤라버릴 수 있는 날카롭고 단단한 지혜를 완성하라'는 의미라고 말할 수 있겠읍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그 이름의 뜻처럼 간직하고 마음에 깊히 새기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다시 그 말씀하신 내용을 잘못 알아들을 것 같아서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라고 다시 강조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반야바라밀(지혜의 완성)이라는 말의 관념에 끌리지 않아야 바로 진실한 지혜의 완성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읍니다. 

 

여기서 '여래가 말씀하신 반야 바라밀'이라는 구절이 중요합니다.

여래는 바라밀을 완성한 분입니다. 따라서 여래가 말씀하시는 것은 모두가 모양없는 여래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라는 말뜻이 아니고, 모든 의미가 사라진 모양없는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보통 이것을 공(空)이라는 관념어로 부르기는 하지만, 그렇게 부르면 또 공(空)이라는 관념이 머리 속에서 생겨서 집착하므로, '공(空)이라고 말하는 것은 공(空)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야바라밀이라고 말한 것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의 특징이 상(相)을 짤라버리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럼 반야바라밀이 아니면 뭐냐?"라고 물을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거기에 대한 답이 없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답하면 또 그 상(相)에 이끌리겠죠. 그래서 <~ 아니다> 라고 딱 짤라버립니다.

 

그러면 <여래가 말한 반야 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다>라는 말을 쉽게 이미지회해서 풀어 보겠읍니다. 물론 지난번 <A라고 말하는 것은 A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포스트를 통해서 자세히 다루어 보았읍니다만, 이번에도 다른 비유를 하나 들어서 쉽게 이해해 보겠읍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해한다는 것이 바로 또 다른 상(相)을 덧붙히는 꼴이 되어 실은 헛된 짓이지만, 일단 지적인 이해를 하고 나서 본인이 알아서 버려여 할 것이지만, 다시 비유적인 이야기로 전개해 보겠읍니다. 

 

기신론에서는 여래장을 깨끗한 거울에 비유합니다. 즉 "깨달음의 바탕에 관한 모습은 네 가지 큰 뜻이 있으니, 허공과 같으며 깨끗한 거울과 같다."라는 구절이 있어서 이 모든 마음과 세상의 바탕인 제9식인 여래장을 거울과 같이 비유한 내용이 있읍니다. 

또 <능가경>에서는 "비유하면 깨끗한 거울에 여러가지 색이 나타나듯이, 현식(現識, 제8식)이 있는 곳에 나타나는 것도 이와같다"라고 되어 있읍니다.

말하자면 마음의 바탕을 깨끗한 거울면으로 비유를 하고 이원화적인 상(相)을 거울에 비친 그림자로 비유를 해 보자면, <반야바라밀>이라는 관념은 여래식이라는 거울면 위에 나타난 관념의 그림자입니다.

따라서 여래가 말한 <반야 바라밀>은 이름만 있을 뿐 실은 여래가 가리킨 손가락은 <반야바라밀>이라는 관념의 그림자가 비쳐진 배면의 모양없는 <여래식>을 보라고 가르쳐 준 것이죠.

모양없고 알 수 없는 여래식은 이원화 세계에서는 도저히 말로 가르쳐 줄 수가 없으므로 <반야바라밀>이라는 관념의 그림자로 임시로 가르쳐 주었지만, 곧이어 그 그림자를 바로 치워버리면서 바로 보라고 말한 것이 바로<여래가 말한 반야 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 바라밀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거울면에 비추어진 어떤 물체의 상도 거울자체일 뿐이고, 그 비추어진 그림자는 실체가 없는 헛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진 어떤 상(相)이던 그 상 자체는 마음바탕인 여래식일 수 밖에 없으며,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진 모든 대상과 관념은 실체가 없는 헛것일 수 밖에 없읍니다.

바로 그림자의 이름만 있을 뿐 실제로 있는 것은 모양없고 특성없는 마음의 바탕인 거울면, 여래식 밖에 없읍니다.

그림자가 비치던 비치지 않던 상관없이 항상 있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의 바탕인 여래장 밖에 없읍니다.

 

그래서 그림자(相) 입장에서 보면 모두가 각개 그림자가 실재(實在)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거울면(여래식) 입장에서 보면 그림자(相)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고 오직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항상 금강처럼 변함없고 단단한 여래식(반야) 밖에 없읍니다. 거울면에 무엇이 비치든 그것은 거울면일 뿐입니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도 사실은 거울일 뿐이고, 벽도 거울이고,하늘도 거울이며, 물도 거울이고, 태양도 거울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과 감각기관에 비친 모든 삼라만상, 하늘,바다, 태양,건물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모양없는 여래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배경이라는 여래장은 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모양이 없어서 항상 변하지 않으므로 바로 실재(實在)하는 바탕이라는 것입니다.

그 변하지 않는 바탕 위에서 온갖 변하는 상(相)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가지 조건들이 상호 관련되어 나타나서 일시적으로 흘러가는 그림자일 뿐으로 실재성(實在性)이 없기 때문에 환상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반야바라밀이라고 부르는 것도 실은 하나의 관념적인 상(相)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 뿐인 반야 바라밀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원화 상대적 세계에 있는 무지한 사람들의 시선을 모든 것의 바탕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하나의 가짜 미끼(이름)일 뿐입니다.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위의 본문 문장에서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하는 문장은 구라마집본에는 빠져 있는 문장인데 후대에 추가로 붙인 문장입니다. 그러나 산스크리트 원본이나 티벳본,현장본에는 그대로 있는 문장입니다. 따라서 구라마집에서는 일부로 뺀 문장이므로 후대에 원상복귀해 논 것 같읍니다. 이 문장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는 문장입니다. 반야바라밀이라는 그 이름이 실없는 관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 것일 뿐입니다.

즉 진정한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라는 생각조차 없을 때에 진정한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입니다. 진실로 깨달은 것은 자기가 깨달았다는 생각조차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 진실한 깨달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진리를 설한 바가 있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한 바가 없읍니다." 

다시 부처님이 수보리가 자세가 흩트러지지 않았나 확인해 봅니다. 즉 여래가 진리를 설한바 있느냐?고 물어 봅니다. 지금까지 쭉 부처님은 진리를 설해 왔죠. 그런데 사실은 너와 나라는 이원화 세계에서는 부처와 수보리 사이에 대화형식으로 진리를 주고 받았지만, 여래의 비이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너와나'라는 상대적 세계가 아니므로 진리를 설하고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죠. 비이원적인 진리상태에서는 아무도 없고 어떤 움직임이나 행동도 없읍니다.

그래서 수보리는 여래께서 설한 바가 없다고 대답합니다.

아직까지 수보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상대성의 이원화 세계, 관념의 세계에 빠져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해 줍니다. 

당연히 그래야 부처와 수보리 간에 진리에 대한 대화가 통하고 있는 것이죠.

말이라는 것은 이원화의 상대적인 세계에서의 행위이지, 비원적인 여래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일체(一切), 한몸인데 누가 누구에게 깨달음을 설하고 말고가 있겠읍니까.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미진(微塵)을 많다고 하겠느냐?"

"아주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이 모든 미진을 여래는 미진이 아니라고 말하나니,이것은 이름이 미진일 뿐이다. 여래가 말하는 세계 또한 그것이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일 뿐이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이 우주 전체에 있는 미진(微塵)이 많다고 하겠느냐?고 물어 봅니다. 여기서 미진이라는 것은 우리가 얼뜬 생각하기에 먼지알갱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단순히 먼지 알갱이라기 보다 요즘 과학적인 용어로 원자나 분자같은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입자를 말한다고 볼 수 있읍니다.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의 최소단위를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런 뻔히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을 부처님이 왜 수보리에게 새삼스럽게 묻느냐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 알아 볼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추정해 보면, 삼천대천세계라는 것은 현대과학지식으로 말하자면 수천억개의 은하계 전체를 합친 것인데, 수천억개의 은하계 안에 원자 개수가 얼마나 많겠느냐?고 물어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질문을 받았을 때에 수보리는 우선 삼천대천 세계라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불가사의(不可思意)의 크기 안에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원자수를 머리 속에서 헤아려보자니 말이 딱 끊어지고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 잠깐 머물겠지요. 이때의 수보리의 마음상태를 잠깐 그려보자면 순간적으로 생각을 넘어간 삼천대천세계의 크기와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원자의 헤아릴 수 없는 숫자를 상상하느라고 순간적으로 눈동자가 뒤퉁수 뒤로 돌아가 있었을 것입니다.

 

즉 이 말은 무슨 소리냐 하면, 두뇌가 일단 정지되어, 헤아릴 수 없는 내면 속으로 잠깐 주의를 돌리게 해주는 말이라 이겁니다.  

그래서 수보리는 아주 잠깐 동안 부처님의 질문에 생각할 수 없는 생각넘어의 미지의 내면세계에 주의를 잠깐주었읍니다.

부처님이 의도한 것은 바로 수보리를 생각 넘어 생각할 수 없는 곳으로 사고 영역을 확장시켜서 잠깐이라도 그곳을 향하도록 유도한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금강경에서만 특이하게 나타나는 부처님의 교육방법입니다.  

 

수보리가 이내 "대단히 많읍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수보리의 사고 영역이 헤아릴 수 조차 없는 경계까지 최대한 확장된 상태에 있읍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에 부처님이,

"수보리야, 이 모든 미진을 여래는 미진이 아니라고 말하나니,이것은 이름이 미진일 뿐이다. 여래가 말하는 세계 또한 그것이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일 뿐이다."라는 말씀을 하므로서, 최대로 확장되어 있던 수보리의 사고 영역 속에 들어있던 헤아릴 수 조차 없는 무한개 원자수와 생각할 수 조차 없이 광대한 삼천대천세계라는 구조가 일시에 완전히 무(無)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말하지 않은 것, 모양이 없어서 말할 수 없는, 무한한 < ~ ~ 아닌 것>만 남았읍니다.

말하자면 모양없는 여래장의 거울만 남아 있는데, 사실 대상이 사라지면 여래장이니 거울이니 하는 말도 헛말에 불과합니다.

 

그 생각할 수 없는 여래장에 대하여 종경록(宗鏡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고 듣는 자리에 있으면서 보고 듣는 것이 미치지 않으며, 생각하고 추론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생각으로 추론하여 측량할 수 없으니, 모두가 불가사의한 바탕으로 말미암아 본래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생각하는 자리에서 생각할 수 없다. 경에서는 "생각하되 생각할 수 없는 바를 이름하여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금강경에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무한량,무한수의 표현이 자주 나오는 것은 금강경을 읽는 사람에게 생각 넘어에 마음의 주의를 향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임을 알아차려야 되겠지요.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읍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32상이란 곧 상이 아니라 그 이름이 32상이기 때문입니다."

 

또다시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묻습니다.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

부처님만이 지닌 특이한 몸의 32가지 특징은 제5분에서도 나왔읍니다.  

경전에 보면 부처의 몸에는 32상이 있어서 우리 보통사람과는 다르며, 또 80종의 보기 좋은 행동과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예를 몇가지 들면 부처의 몸은 항상 황금빛이 난다는 것입니다.

발바닥은 마당발 형태인데 발바닥에는 두개의 수레바퀴자국 같은 것이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또 발가락 손가락 사이에 무늬없는 비단같은 그믈, 즉 황금빛의 물갈퀴(오리발 같은 것)가 있다고 합니다.

또 눈동자가 검푸르며, 푸른 연꽃과 같다는 것이죠.

머리 꼭대기 한가운데 살이 솟아 올라 꼭 상투모양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두 눈섭사이에 흰털(白毫)이 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외 여러가지 특징이 있으며, 이러한 32종 80호라는 육체의 특징으로 여래를 판단해 볼 수 있느냐고 수보리에게 물어 본 것입니다. 

 

그랬더니 "가히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읍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32상이란 곧 상이 아니라 그 이름이 32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수보리가 대답을 했읍니다. 즉 부처님의 몸의 특징인 32상을 말하는 것은 그 특히한 부처님의 몸의 특징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32상을 통해서 배면의 여래장을 가리킨 것이지만,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32상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알려 준 것입니다. 말하자면 32상은 거울에 비친 그림자 형상(대상)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거울을 가리켜 준 것입니다. 결국은 거울에 비친 그림자도 거울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되겠죠.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목숨을 바쳐 보시했다 할지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그 복이 더 많으리라."

이 구절에서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목숨을 바쳐 보시한다"는 말은 수천억년 동안 수천만의 전생을 계속 부처에게 목숨을 바친다라는 말씀같습니다. 

즉 남녀 어떤 구도자가 부처를 위해서 수많은 전생동안 계속 부처를 위해서 자기목숨을 희생할지라도, 어떤 한 사람이 남을 위해서 금강경 사구게 한구절만이라도 옳게 가르쳐 주는 것만 못하다는 것인데, 금강경이 이 몸을 벗어나게 해주는 중요한 가르침이 들어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말로 과장하는 것이 중국사람이 세계적으로 아주 대단하다고 하는데, 이 구절을 보면 인도사람에게는 중국사람도 혀를 내두룰 정도로 과장표현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금강경에서 과장된 표현이 자주 나오는 것은 바로 읽는 사람에게 생각할 수 없는 불가사의 경계 넘어로 의식을 확장시켜 주려는 숨은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을 읽을 때에 이런 구절이 나오면 "에~이, 과장도 분수가 있지, 너무 뻥을 치는구만"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경전구절을 비웃으면 절대로 경전을 읽는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은 진지하고 성스러운 존경심을 가지고 읽어야 합니다.

 

경전에 표현한대로 그대로 머릿 속에서 상상하며 따라가면 경전에서 의도한 대로 읽는 사람의 의식 영역이 무의식 영역까지 확장되면서 그 모름의 컴컴함을 넘어가는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경전이 그래서 상식 밖의 과장된 표현을 자주 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익숙하고 현상적인 상식의 경계를 넘어가야지 익숙하지 않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르친대로 그대로 받아지니라(如法受持)"라는 제목도 붙은 것 같읍니다.

 

중요한 것은 금강경의 내용이 이 사바세계를 벗어나는 해탈을 하는데 아주 수숭한 가르침이 있으므로 소중하게 다루고 남들에게 열심히 가르쳐서 다른 사람에게도 무한한 깨달음의 복덕을 얻게끔 보시하라고 강하게 강조하는 충고의 말씀입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