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금강경

금강경의 "무위의 복덕은 수숭하다"에 대하여

무한진인 2013. 10. 18. 18:54

 

 

무한진인 금강경 이야기(24) 

 

제 11분 無爲福勝分(무위복승분)

須菩提 如恒河中所有沙數 如是沙等恒河 於意云何 是諸恒河沙 寧爲多不 

수보리 여항하중소유사수 여시사등항하 어의운하 시제항하사 영위다부

須菩提言 甚多世尊 但諸恒河 尙多無數 何況其沙

수보리언 심다세존 단제항하 상다무수 하황기사

須菩提 我今實言告汝 若有善男子善女人 以七寶滿爾所恒河沙數三千大千世界

수보리 아금실언고여 약유선남자선여인 이칠보만이소항하사수삼천대천세계

以用布施 得福多不

이용보시 득복다부

須菩提言 甚多世尊 佛告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於此經中 乃至受持四句偈等

수보리언 심다세존 불고수보리 약선남자선여인 어차경중 내지수지사구게등

爲他人說 而此福德 勝前福德

위타인설 이차복덕 승전복덕

"수보리야, 항하에 있는 모래알 수만큼 많은 항하가 있다면 네 생각은 어떠하냐?

그 모든 항하의 모래가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읍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항하의 수만하여도 셀수없이 많겠거늘 하물며 그 모래이겠읍니까"

"수보리야, 내가 이제 진실한 말로 너에게 이르노니,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칠보로써 저 항하강 모래수만큼 많은 삼천대천세계를 가득채워서 보시한다면 그가 얻은 복덕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읍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슴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이 복덕이 앞에서 말한 복덕보다 더 뛰어나다."

 

이번 11분은 제목이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이라고 붙혔는데, 무위(無爲)는 유위(有爲)의 반대이며, 억지로 행하지 않고 저절로 모든 행위가 조화롭게 이루어지는 것이며, '내가 있다'는 생각이 없는 자연스러운 절대바탕의 마음상태를 말합니다. 

무위복(無爲福)은 수행과는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원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복입니다.

"내가 있다"라는 생각이 사라진 상태에 도달하면 저절로 무위복을 얻는 것이므로, 이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어 마음의 본성을 깨우치도록 인도하는  것이 바로 금강경 내용입니다.

따라서 금강경의 내용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가르쳐 주는 것이 마음의 본성을 깨우치도록 가르쳐 주는 법보시이므로, 이것이 어떤 엄청난 믈질적 보시를 하는 것보다 더 가치있고 수숭(勝)하다는 의미에서 제목을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이라고 붙힌 것 같읍니다. 

 

"수보리야, 항하에 있는 모래알 수만큼 많은 항하가 있다면 네 생각은 어떠하냐?

그 모든 항하의 모래가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읍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항하의 수만하여도 셀수없이 많겠거늘 하물며 그 모래이겠읍니까"

항하(恒河)는 인도 대륙에 있는 갠지스강을 말합니다. 인도 말로는 강가(Ganga)라고 부릅니다. 갠지스강은 히말리아에서 발원해서 네팔과 캐시미르 사이로 흘러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지금 인도의 수도인 뉴델리를 통과해서 동쪽으로 흘러서 벵골만으로 빠지는 강입니다.

석가모니가 지금의 네팔근처에서 태어났으므로 아마도 이 갠지스강 유역 강변 지역들을 오르내리면서 일생동안 가르침을 많이 펼쳤던 것 같습니다.

이 강이 인도 북쪽 내륙지역을 통과하기 때문에 유역에는 아주 모래가 많이 쌓여 있는데, 굵은 모래도 아니고, 아주 가는 모래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경에 자주 나오는 말 중에서 셀수없을 정도의 무한량(無限量)을 말할 때는 갠지스강 모래알수로 비유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갠지스 강변의 모래알 수도 셀수 없이 많은데, 그 모래알 수 만큼의 갠지스강이 있다고 한다면, 그 모든 갠지강의 모래알이 얼마나 많겠느냐고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묻읍니다.

이렇게 뻔하게 알고 있는 이야기를 수보리가 직접 대답하게끔 묻는 것은 수보리가 직접 그 무한량의 느낌을 마음으로 상상하여 생각의 한계를 넘어 가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금강경의 특이한 교수법이기도 합니다.

즉 "생각도 할 수 없는 무한량"을 상상하므로써 결국은 생각할 수 없는 그 넘어를 생각하며, 그 생각의 주의촛점이 뒤퉁수 뒤쪽으로 자연히 향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이 무엇인가 생각할 수 없는 무한한 것을 상상할 때에는 대개 시선이 뒤퉁수 뒤쪽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것은 마치 죽은 사람이나 까무러친 사람의 눈동자가 뒤로 넘어가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산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있던가, 짝사랑하는 애인을 혼자서 한숨 푹 푹 쉬어가며 그리워 할 때, 끝없이 펼쳐진 바다 수평선 그 넘어 미지의 세계를 말없이 그리워하며 바라 본다든가, 산정상에서 끝없이 펼쳐져 있는 산능선 넘어 넘어 고향집을 그리워하며 바라 볼 때에는 그 눈동자 시선의 촛점이 뒤퉁수 넘어 쪽을 향하는 경우가 많읍니다. 

갠지스강의 모래알이 셀수없이 많다는 것도 바로 이렇게 현실 경계 넘어의 보이지 않는 그 경계 넘어로 시선을 돌리게 유도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뻔히 아는 사실을 수보리가 "무한한 수량의 갠지스강 모래"를 스스로 실감있게 느끼도록 유도하기 위해 뻔히 알면서도 수보리가 스스로 대답하도록 의도적으로 묻고 있는 것이죠. 그 사고의 끝은 전혀 모르는 것이지만 그 가능성은 무한히 확장되어 있읍니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의 특유한 교수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보리야, 내가 이제 진실한 말로 너에게 이르노니,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칠보로써 저 항하강 모래수만큼 많은 삼천대천세계를 가득채워서 보시한다면 그가 얻은 복덕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읍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슴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이 복덕이 앞에서 말한 복덕보다 더 뛰어나다."

앞서 수보리가 셀수 없고 상상할 수 조차 없을 정도로 무한량의 경계넘어에 생각의 촛점이 가 있을 때에 " 그 무한량의 모래수만큼 많은 전체 우주공간에 칠보로 가득 채워서 부처님께 보시를 한다면 그가 얻은 복덕이 많겠느냐"고 묻습니다. 

이 구라마즙본에는 누구에게 보시한다는 말을 생략해 버렸는데, 산스크리트 원본이나 티벳본,현장본 같은 데에서는 모두 부처님에게 보시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읍니다.

 

이 물음에서도 거의 무한대의 우주 경계넘어로 확장된 수보리의 사고 공간 속에 그대로 칠보로서 가득 채워 넣어서 그것을 보시하면 그 무한량의 칠보만큼 복덕이 많겠느냐고 수보리에게 물었읍니다.

당연히 지금 수보리 머리 속에는 무한 우주세계 속에 값진 칠보로 가득채워진 물질적 유위복덕이 들어 차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수보리는 많다고 역시 대답합니다.  값비싼 칠보로 무한한 우주공간을 가득 채울 정도로 무한정한 복덕이 머리에 꽉 들어찬 수보리에게, 이때 바로 부처님은 일반 중생들에게 금강경 사구게 한 구절만이라도 설명해 준다면 이 복덕이 값진 칠보로 전 우주세계를 채우는 것보다 그 복덕이 더 뛰어나다고 알려 줍니다.

따라서 수보리 머리 속에서 상상하고 있던 그 무한량의 값비싼 물질적 유위 복덕이 바로 금강경 가르침의 무위복덕(空)으로 순간적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에서 가르쳐 주는 부처님의 아주 특별한 교수방식입니다. 

먼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이고 현상적인 사물에 대하여 무한량의 사고 공간을 펼치게 유도하고 나서, 그 다음에는 그 물질적이고 현상적인 것을 일시에 싹 쓸어 버리고,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는 무위의 공(空)이 대신 들어서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이 복덕이 앞에서 말한 복덕보다 더 뛰어나다."

 

그럼 금강경의 사구게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물론 구라마즙본에서 몇가지 금강경 사구계라는 것이 있읍니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응당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것이며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것이요

응당 머문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어다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 味觸法生心 應無所住 以生其心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 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만약 색신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일체의 함이 있는 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같이 관할지어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위에 열거한 4문장의 금강경 사구게라는 것은 구라마즙 한문본에서 사구게라고 말하는 것이고, 산스크리트 원본이나 티벳본, 현장본에는 이런 형식의 사구게라는 것은 없읍니다.

따라서 위의 본문에서 사구게라고 말하는 것은 위의 구라마즙본의 사구게 뿐만 아니라, 금강경 전체 내용이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옛날 인도어 금강경은 누구나 외우기 쉽게 간단한 노래형태의 사구시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위의 구라마즙본의 금강경 사구게도 금강경의 핵심을 간추린 것이어서 중요한 내용이지만, 다시 금강경의 핵심 내용을 다른 한 마디로 단축한다면 "내가 있다'라는 아상(我相)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모든 상(相)을 실제하는 상(相)이라고 본다면,

그 상태는 "내가 있다"라는 아상(我相)이 남아 있는 것이고,

모든 상(相)을 상(相)이 아닌 것으로 본다면,

이는 "내가 있다"는 아상(我相)이 사라진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모든 상(相)을 상(相)이 아닌 것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만일 구도자가 이런 자세를 계속 견지해 나간다면, 점차적으로 아상(我相)이 엷어집니다.

따라서 이러한 금강경 내용들 중에서 단 한문장이라도 남을 위해 가르쳐 준다면 그 만큼 복덕이 전체 우주에 가득차게 칠보로 보시하는 것 보다도 더 큰 복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금강경의 내용이 아주 귀하고 가치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장 고귀하고 값진 보석으로 이 삼천대천세계를 채울 정도로 보시를 한다 해도, 물질적이고 현상적인 보시는 자기 마음의 본성을 깨치도록 가르쳐주는 금강경의 법보시보다 그 가치가 낮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의 사구게 한 구절만이라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면 그 법보시 복덕은 대단히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금강경을 남에게 가르쳐 주거나 해설한 책을 출판 보급해서 중생들을 위해서 보시한다고 큰 복덕을 받을까요?

그냥 금강경 책자를 만들어 널리 보급하거나 중생들에게 금강경 해설을 가르쳐 준다고 해서 그냥 무위의 복덕을 얻는 것을 아닙니다. 

자신이 스스로 금강경 자체를 완전히 소화한 후에 아상(我相)을 비롯한 모든 상(相)을 없애고 나서,  다시 그 얻은 과보를 남에게 보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금강경을 이해하고 나서 남에게 가르쳐주라는 것이 라기 보다는, 완전히 금강경에 말한 모든 상(相)이 헛것임을 깨닫고 나서 그 깨달음의 복덕을 남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입니다.

그까짓 글자해석이나 문장내용을 지식적으로 이해했다고 해서 금강경을 완전히 소화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죠.

 

금강경에 나온 내용대로 완전히 무위 복덕을 받는다는 것은 절대상태의 여래를 깨치고 난 후에 저절로 그 복덕의 기운이 남들에게 전달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바야흐로 삼천대천 세계에 가득찰 만큼 귀한 칠보로 물질적인 보시를 하는 것 보다도 더 큰 무위복덕이 된다는 것입니다.  

무위복덕이란 억지로 남을 가르쳐 주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먼저 깨쳐서 얻은 다음에야 저절로 그 과보의 나눔이 베풀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무위의 복덕이란 보시하는 자와 보시를 받는 대상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로서

자기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보시를 하고 좋은 일을 한다는 생각조차 전혀 없어야 온전한 무위적 보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이 11분의 문장 때문인지는 몰라도 불교 역사이래 불교 경전 중에서 아마도 이 금강경의 해설서가 중국,한국에서는 가장 많이 편찬된 것 같읍니다.

그 옛날부터 수많은 도인들이 금강경을 후배들에게  열심히 가르쳐 주고 또 해설서도 많이 편찬되어 왔읍니다.

현대에도 많은 도인들이 금강경 해설을 하고 또한 해설서도 많이 편찬되었읍니다.

왜냐하면 금강경을 공부해서 남에게 가르쳐 주면 자기의 수행에도 아주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남에게도 이롭게 좋은 길로 인도를 해 주는 것이죠.

 

이번 11분에는 남에게 보시를 하는 것에서 물질적인 보시보다도 금강경 한구절이라도 마음의 본성을 깨우칠 수 있는 법보시를 하는 것이 훨씬 수숭하고 가치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읍니다.

이 11분은 아마도 금강경이라는 경전을 널리 보급시키기 위해서 말씀하신 내용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 휘나레를 장식하는 차원에서 중국 양나라 무제와 달마대사가 처음 대면하여 대화하는 내용을 들어 보겠읍니다.

 

양무제 : "짐이 왕위에 오른 이후로 절을 짓고 경전을 쓰고 수없이 많은 승려들을 만든 일을 가히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달마대사 :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

 

양무제 : "어찌하여 공덕이 없습니까?"

달마대사 : " 이러한 것은 다만 인간으로나 천상에 태어날 수 있는 작은 과보일 뿐이며, 모두가 새서 빠져나가 버리는(漏) 원인일 뿐입니다.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아서 비록 잠깐 있으나 실다운 것이 아닙니다."

 

양무제 : 그렇다면 어떤 것이 참다운 공덕입니까?

달마대사 : 청정한 지혜는 미묘하고 원만하여 그 자체가 스스로 공적하니 이와같은 공덕은 세상의 일로는 구할 수 없읍니다."

 

양무제 : "어떤 것이 성스러운 진리로서 제일가는 도리입니까?

달마대사 : " 넓고 텅 비어 성스럽다고 말할 것이 없읍니다."

 

양무제 : "짐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달마대사 : "모릅니다."

 

양무제가 그 뜻을 알지 못했다. 달마대사가 갈댓잎을 타고 강을 건너 위나라에 이르러 숭상 소림사에 머물면서 벽을 마주보고 앉아서 종일토록 침묵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벽만 바라보고 있는 바라문"이라고 수군거렸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