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의 "불국토를 꾸미다"에 대하여(2)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23)
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 淸淨心 不應住色生心
시고 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생 청정심 불응주색생심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須菩提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爲大不 須菩提言
수보리비여유인 신여수미산왕 어의운하 시신위대불 수보리언
甚大世尊 何以故 佛說大身 卽非大身 是名大身
심대세존 하이고 불설대신 즉비대신 시명대신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 마하살은 마땅히 이와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마땅히 형색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어야 하고, 소리,냄새,맛,감촉,마음의 대상에도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어야 한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네 생각은 어떠한가? 그 몸을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전번회에서 보살은 정토를 장엄하면서도 정토를 장엄했다는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읍니다. 그래야지 진실로 불국토를 장엄한 것이라고 했읍니다.
즉 마음이 완전히 순수해져서 우주 전체와 일체가 된 공(空)을 이루었다는 것은 자기가 그런 절대 공(空)의 경지에 들었다는 생각조차 없어야 진실로 절대 공(空)에 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한 생각도 없어져야 완전히 순수한 상태의 청정한 마음을 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체험을 해서 깨달았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진정한 깨달음의 상태가 아니며, 어떤 의식변화의 대상에 미혹되어 있는 것이며, 깨달았다는 생각조차 없어야 청정한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청정한 마음을 낼려면 당연히 겉모습이나 형태에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하고, 소리나 냄새,맛, 감촉, 여러가지 마음의 대상에 대하여 주의를 두고 머물지 말아야 대상에 영향을 받지 않는 청정한 마음을 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 마하살은 마땅히 이와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마땅히 형색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어야 하고, 소리,냄새,맛,감촉,마음의 대상에도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어야 한다."
그다음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라는 말은 금강경에서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우연히 육조혜능이 듣고 발심을 해서 더 불교 공부를 하기 위해서 오조를 찾아가서 배우게 된 계기가 된 말입니다. 말하자면 혜능이 발심의 계기가 된 금강경 구절이 바로 이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라는 구절입니다.
<마땅히 머문바 없이>라는 구절은 "어떠한 마음의 대상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즉 형색에 머무르지 않고, 소리,냄새,맛,감촉,마음의 대상에 머무르지 말라는 말입니다. 형색,소리,냄새,맛,감촉, 마음의 대상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의 에고에서 나오는 업식에 끄달려 탐진치(耽嗔痴)를 부리는 속세심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마음을 내어라>라는 구절은 요즘 말로 "전체적으로 자연스럽게 주시하라"라는 말입니다. 즉 "대상에 따라가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말없이 지켜보라"는 뜻입니다.
"마땅히 머문바 없이"란 본각의 자성자리라고 말할 수 있겠고, "그 마음을 내어라"라는 말은 그 본각의 자성자리에서 저절로 비추는 지혜(반야)의 성품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읍니다.
즉 만사에 응하고 포용하되 머물지 않는 마음으로 만물에 얽매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원래 보통사람 마음은 항상 머물지 않고 움직입니다. 그러나 항상 움직이되 이것 저것 밖으로 향해서 대상만을 따라다니며 움직입니다.
따라서 '대상에 머문바 없이 움직일려면' 마음의 주의를 밖의 대상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주시자쪽인 내면을 향하고 있어야 하며, 항상 머물러서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주시하는 주시자 입장이 되라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대상에 일일히 따라다니지 말고, 말없이 지켜보는 관조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보이는 대상에 끄달리지 말고, 내면에서 말없이 지켜보는 모양없는 앎(주시자)을 자각하라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테두리 없는 맑은 거울면은 어떤 대상(像)이 다가와도 모든 것을 차별없이 있는 그대로 포용하고 반영해 주면서도, 전혀 대상에 영향받지 않고, 항상 무심하게 비추어 주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또한 바닷물에 거센 바람이 사납게 몰아쳐서 아무리 거친 파도가 일렁여도 바다 자체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거기 그대로 무심하게 편안히 누워 있는 채로 펼쳐져 있는 것이나 비슷합니다.
제 5분에 나오는 <모든 상을 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이라는 문장이나 이번 10분의 <마땅히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내라>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이라는 문장은 둘 다 대략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읍니다.
즉 두 문장 다 대상에 이끌리지 말고, 내면으로부터 비추어 보라(回光返照)는 말씀이지만, 앞의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은 수동적인 자세로써 자기 자신조차도 부정하는 측면에서 말한 것이고,
뒤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은 좀 더 적극적인 자세를 갖고 능동적인 측면에서 회광반조(回光返照)하라고 표현한 것이라고 볼수 있겠읍니다.
<응당 머문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라는 구절에 대해서 금강경 오가해에 나온 내용들을 여기 일부 옮겨 보겠읍니다.
함허스님 설의 : 모름지기 공연히 풍파를 쫓지 말고(대상만을 이리저리 쫏아다니지 말고) 항상 멸진정에 머물러(주시자입장이 되어) 모든 근기에 응해야 함이니, 이것은 가히 어두운 가운데서 밝음이 있는 도리로다.
또 무소주(無所住,머뭄바 없이)란 마침내 내외가 없고 중간도 비어서 사물(事物)이 없는 것이 마치 거울이 텅 비고 평평한 거울대와 같아서 선악시비를 가슴 속에 두지 않는 것이요, 생기심(生起心, 마음을 내라)이란 머무는 바 없는 마음으로서 사(事)에 응하여 물(物)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니라. -이하생략
야부스님 : 뒤로 물러서고 물러설지어다.
보고 보아라. 단단히 굳은 돌이 움직인다.
함허스님 설의 : 밝은 가운데서 자취를 머물지 말고 도리어 어두운 곳을 향해 돌아 오도다. 잘 보아라. 동(動)할 수 없는 것이 지금에 동(動)하니, 동(動)하는 것이 도리어 동함이 없어야 비로소 옳은 것이다.
야부스님 : 고요한 밤 산당(山堂)에 말없이 않아 있으니
적적(寂寂)하고 요요(寥寥)함이 본래 그대로 로다.
무슨 일로 서풍(西風)은 임야(林野)를 흔들어대어(動하여)
한 소리 찬 기러기가 장천(長天)을 울게 하는가.
함허스님 설의 : 본래 스스로 동함이 없거늘 어찌 모름지기 동하리오
모름지기 믿을지어다.
사해(四海)에 물결이 고요하면 용이 숨어서 잠을 자고
구천(九天)에 구름 개이면 학이 높히 날도다.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네 생각은 어떠한가? 그 몸을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에서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몸이 수미산만 하다고 말한 것은 육체적인 몸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법신(法身) 즉 절대 공(空)을 비유해서 말씀한 것입니다.
육근, 육진, 육식을 전부 넘어서면 마음이 청정해지고 남은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 무한하고 공적한 이름 없는 체(體)가 바로 편의상 그 이름을 법신(法身)이라고 부르고 있죠.
그 몸이 수미산만 하다는 말은 수미산은 이 세상의 산봉오리 중에서 가장 높고 크므로 "아주 큰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이렇게 당연한 사실을 가지고 새삼스럽게 수보리에게 수미산한 몸이 있으면 그 몸이 크냐고 물어 봅니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수미산한 몸이 크냐고 물어 본 자체가 바로 그 넘어를 가리켜 보여주는 "손가락"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그러니깐 수보리가 당연히 크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크다"라고 비교 분별하는 말(토끼뿔,거북이털)을 의도적으로 쓰는 것은 바로 그 말을 하는 입장(그 이전,보는 자)에서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법신의 상태를 보여주려는 의도인 것입니다.
이어서 수보리는 그 이유가 부처님께서 큰 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큰 몸(형상있는 몸)이 아닌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큰 몸이라는 이름을 앞에 내세워서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한 무형의 법신을 가리켜 보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털이 난 거북이가 있다'고 말하면서 상대방 주의를 끌게한 다음 본인이 스스로 거북이 털이 헛것임을 알게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그런데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법신이란 것이 사실은 모양도 없고 크기도 없이 무한해서, 아무 것도 아님이라고들 합니다만-,
하지만 대부분의 구도자들에게는 온통 거북이 털과 토끼뿔만 눈 앞에 가득 차 보이니, 과연 어느 곳을 향해야 할까요?
육조스님은 이 구절의 해설에서, 몸뚱이는 비록 크나 내면의 마음이 좁으면 큰 몸이라 이름할 수 없고, 내면의 마음이 커서 허공과 같아야 비로소 큰 몸이라 이름하니, 몸뚱이는 비록 수미산 같드라도 마침내 큰 몸이 되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허공처럼 무한해야 큰 몸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