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금강경

금강경의 "깨달음은 상(相)이 없는 것이다"에 대하여(2)

무한진인 2013. 9. 28. 10:37

 

 

ㅇ.수다원

須菩提 於意云何 須陀洹 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수보리 어의운하 수다원 능작시념 아득수다원과부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須陀洹名爲入流 而無所入 不入色聲香味觸法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수다원명위입류 이무소입 불입색성향미촉법  

是名須陀洹

시명수다원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이 생각하기를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노라'고 생각하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이름이 '흐름에 든 자'를 말하오니 실은 들어 간 바가 없읍니다.

그는 형상에 들지 않았으며, 소리,냄새,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 대상에 든 것도 아니기에 수다원이라 이름 합니다."

 

이 9분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깨달음의 수준 단계, 즉 수다원, 사다함,아나함,아라한 같은 깨달음의 과위(果位)라는 것은 아예 없다는 것입니다.

수다원은 그 산스크리트어의 뜻이 "흐름에 들어간 자"인데, 성인의 흐름에 처음으로 들어 갔다는 것(預流)입니다. 이는 역류(逆流)라고도 부르는데, 생사의 흐름을 거슬러서 육진(六塵)에 물들지 않고 한결같이 무루업(無漏業)만 닦아서 거칠고 무거운 번뇌가 생기지 않게 하여 더 이상 하류인 지옥,아귀, 축생등의 몸을 받지 않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이 생각하기를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노라'고 생각하겠느냐?"

깨달음에 처음 들어온 자가 스스로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구나"라고 스스로 생각하겠느냐고 물은 것이죠.

그랬더니 수보리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이름이 '흐름에 든 자'를 말하오니 실은 들어 간 바가 없읍니다."라고 대답했읍니다.

수다원에 들었다는 것은 모든 상(相)이 상이 아님을 깨달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상(相)이 없음을 깨달았으면 어떤 과(果)도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얻은 바가 없음을 안 것입니다. 따라서 수다원이라는 어떤 특별한 상(相)에 든다는 생각도 없어야지요. 이것이 바로 진짜 수다원에 든 상태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그래서 수보리 대답에 " 어디에 들어간 다는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죠.

만일 자기가 "내가 수다원 수준까지 올라왔구나"라고 생각한다면 그 상태는 "나"라는 아상(我相)이 아직 남아 있으므로, 수다원까지 올라온 상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이어서 수보리가 그 이유를 말합니다.   

"그는 형상에 들지 않았으며, 소리,냄새,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 대상에 든 것도 아니기에 수다원이라 이름 합니다."

상(相)이 상(相)이 아닌 줄 깨쳤기 때문에 상(相)에 속지 않았고, 색(色),성(聲),향(香),미(味), 촉(觸), 법(法)등, 감각기관과 마음의 대상에 미혹되지 않으므로 깨달았다는 것이지, 어떤 상(想)이 있는 체험단계에 들어가서 수다원이라고 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무슨 체험이나 상(相)을 보고 깨달았다고 남한테 말한다면, 이것은 깨달음에 너무 집착해서 스스로 마음에서 만들어낸 깨달음 유사체험에 대한 상(相)일 수가 있읍니다.

진실로 깨달은 사람은 자신이 깨달았다는 생각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특별한 상(相)이나 체험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면, 그것은 전에는 없었던 상(相)이나 체험이 어떤 수행행위로 인해서 새로 생겨난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소멸되는 일시적인 상태이므로 항상 있는 평상심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상(相)이 상이 아닌 줄 알고,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않는다면,

이것은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다원은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상태이나 아직 욕계의 업이 다하지 않았으므로 완전한  공(空)에 안정되게 도달한 상태는 아닙니다.

다만 성인의 부류(無爲)의 흐름에 방금 들어온 상태인 것입니다.

아직도 천상(욕계,색계,무색계)과 인간계를 일곱번 들락 날락해야 소승과위에서 가장 높은 아라한에 도달한다고 알려져 있읍니다.

 

ㅇ. 사다함

<須菩提 於意云何 斯陀含 能作是念 我得斯陀含果不

수보리 어의운하 사다함 능작시념 아득사다함과부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斯陀含名一往來 而實無往來 是名斯陀含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사다함명일왕래 이실무왕래 시명사다함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이 생각하기를 '내가 사다함과를 얻었노라'고 말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은 이름이 '한번 갔다 오는 자'를 말하오나 실은 가고 온다는 생각이 없기에 그 이름을 사다함이라 하였을 뿐입니다.">

 

처님이 수보리에게 묻읍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이 생각하기를 '내가 사다함과를 얻었노라'고 말하겠느냐?"

사다함은 아나함보다 훨씬 업이 많이 녹아서, 죽어서 천상에 올라갔다가 바로 인간 욕계에 한번만 내려 왔다가 업의 빚을 다 갚으면 더 이상 인간계에는 다시는 내려오지 않고 천상에서 수행해서 삼계를 벗어난다하여 일왕래(一往來) 또는 사다함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물음에 수보리가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은 이름이 '한번 갔다 오는 자'를 말하오나 실은 가고 온다는 생각이 없기에 그 이름을 사다함이라 하였을 뿐입니다."

만일 사다함에 도달한 사람이 "내가 사다함에 도달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사다함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짜로 사다함에 도달한 사람은 사다함이라는 어떤 과위(果位)의 상(相)도 없는 것이죠. 따라서 어떤 상태로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아나함이든 사다함이든 어떤 깨달음의 단계나 수준이라는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가 어떤 깨달음 수준의 단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그 단계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상상하고 스스로 생각한 것일 뿐 입니다. 아직도 이원적인 분별심의 꿈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죠.

 

한편 육조혜능 스님이 금강경오가해에서 사다함에 대해서 해설한 것을 일부 인용해 보면,

<대승(大乘)에서 사다함이라 함은 눈으로 모든 경계를 볼 적에 마음에 일생일멸(一生一滅)만 있고, 제이의 생멸이 없는 고로 일왕래(一往來)라고 하니, 앞생각이 망(妄)을 일으키면 뒷생각이 곧 그치게 하고, 앞생각이 집착이 있으면 뒷생각이 곧 그 집착을 떠나게 해서 실로 왕래가 없으므로 사다함이라 말하느니라>

이것은 육조스님이 소승의 "사다함"이라는 명칭을 다시 마음의 주시작용으로 비유해서 말씀하신 내용이며, 앞생각이라는 것은 상(相)에 끄달리는 이원적인 분별심을 말하는 것이고, 뒷생각이란 형상없고 말없는 주시자 의식(반야지혜)을 말합니다. 즉 분별생각이 일어나거나 어떤 상(相)에 집착심이 일어나면, 말없이 항상 지켜보는 주시자의식으로 단번에 되비쳐서 없앤다는 것으로, 일단 망상이 일어나기만 하면 즉시 반야지혜로 비쳐서 없애버리는 반야지혜의 회광반조(回光返照) 작용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항상 깨어서 반야지혜로 이원적인 망상이 일어나는 쪽쪽, 어떤 상(相)에 집착하는 즉시, 반야지혜(주시자의식)의 빛으로 되비쳐서 저절로 녹여 버리는 자유자재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대승의 사다함 수준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육조혜능스님은 기존의 불교용어들을 모두 마음의 주시작용(반야지혜)으로 대체하여 설명하므로써 모든 것은 마음의 작용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진리를 항상 사람들에게 기회있을 때마다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