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 가르침/금강경

금강경의 " 바른 믿음은 드믈다"에 대하여(3)

무한진인 2013. 9. 2. 09:52

 

 

무한진인의 금강경 이야기(14)

 

이번에도 제6분 '바른 믿음은 드믈다'를 계속 이야기해 보겠읍니다. 

 

須菩提 如來悉知悉見 是諸衆生得如是 無量福德

수보리 여래실지실견 시제중생득여시 무량복덕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하이고 시제중생 무부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무법상 역무비법상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卽爲着我 人衆生 壽者

하이고 시제중생 약심취상 즉위착아 인중생 수자

若取法相 卽着我 人衆生 壽者

약취법상 즉착아 인중생 수자

何以故? 若取非法相 卽着我人 衆生 壽者

하이고? 약취비법상 즉착아인 중생 수자

是故不應取法 不應取非法

시고불응취법 불응취비법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이시의고 여래상설 여등비구 지아설법 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황비법

수보리야, 여래는 모두 알고 모두 본다.

이 모든 중생이 이렇게 한없이 복덕을 받을 것이다. 

왜 그런가? 이 모든 중생에게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없고, 법이 아니라는 상도 없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이 모든 중생이 만약 마음에 상을 갖는다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할 것이며, 만약 법상을 갖는다면 아,인,중생,수자에 집착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만약 비법상을 갖는다면 아,인,중생,수자에 집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을 취하지도 말고, 법이 아닌 것을 취하지도 말아야 한다.

이런 뜻에서 여래는 항상 말한다. '그대들 비구는 내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다는 것을 알라.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야?" 

 

[해설]

[須菩提 如來悉知悉見 是諸衆生得如是 無量福德

수보리 여래실지실견 시제중생득여시 무량복덕

수보리야, 여래는 모두 알고 모두 본다. 이 모든 중생이 이렇게 한없이 복덕을 받을 것이다. ]

이 문장에서 <여래(如來)>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공통으로 바탕에 지니고 있는 절대진아를 <여래>라고 부른 것입니다.

여기서 <여래>는 절대진아를 가리키는 일반명사입니다.

이 절대 진아 안에서 모든 것이 나타나므로 여래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본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절대지혜로 비추어 주시한다는 것이죠.

모든 것을 이 여래의 절대지혜가 알고 본다는 것을 깨친 사람은 누구든지 무한한 복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보고 아는 여래(절대진아)를 깨친 사람이야말로 그 자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무한한 복덕을 받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해설서들은 이 문장을 다르게 해설하고 있읍니다.

즉 여래를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해설을 하고 있읍니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모든 것을 알고 본다고 해설들을 하고 있읍니다.

이것은 제 개인적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좀 잘못된 해석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하이고 시제중생 무부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무법상 역무비법상

왜 그런가? 이 모든 중생에게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없고, 법이 아니라는 상도 없기 때문이다. ]

 

위 문장에서 <모든 것을 알고 보는 여래를 깨친 사람은 무한한 복덕을 받는다>에 대하여 그 이유를 부처님이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나라는 생각'이 없고, 사람이라는 생각도 없고,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생각도 없고, 영원히 산다는 영혼이라는 생각도 없으며, 진리(법)라는  생각도 없고,진리가 아니라는 생각도 없기 때문이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상(相)>이라는 것은 외면으로는 모양과 색갈등, 오감으로 나타난 현상이지만, 내면으로는 생각,관념,개념 등을 말합니다.

 

아상(我相), 중생상(衆生相), 인상(人相), 수자상(壽者相), 이 사상(四相)이라는 것은 원래 부처님 생존 당시에는 흰두교, 자이나교, 불교, 베단타 등에서 사용하는 "나(지바)"에 딸린 비슷한 나라는 존재개념의 개념어들을 4가지로 나열해서 부처님이 쓰신 것인데, 중국에서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으로 명확하게 개념이 나누어진 4가지 단어로 바꾸어진 것 같읍니다.

한문 번역에서 아상(我相)은 바로 개체자아인 '나라는 생각'을 의미하고, 인상(人相)은 "사람이라는 생각", 그리고 중생상(衆生相)은 "살아있는 생물체라고 하는 생각", 수자상(壽者相)은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그대로 영원히 산다는, 즉 "나의 영혼은 오래 산다는 생각"입니다. 

부처님은 여래를 깨친 사람은 이러한 여러가지 "나라는 생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잠시 이야기를 다른 샛길로 들어가 보겠읍니다.

일반적으로 "나라는 생각"을 육체의 느낌, 즉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서부터 "나라는 느낌"이 나타나서 이것에 의지해서 생각하고 느끼며 세상 활동하고, 그 안에서 모든 삶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생시의 "나라는 느낌"은 마치 거울을 보면서 거울 속의 상을 보듯이 모든 것이 의식에 의하여 대상화 된 현상(顯相)을 보고 있는 것이죠.

이 경우에 나의 생시상태가 바로 전체세상 그 자체가 됩니다.

그 이전에는 모양없는 주시자(내가 있다)가 모든 것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읍니다.

깨어나기 이전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깊은 잠 속에 있었는데, 우리는 이 깊은 잠 속에 있을 때도 생시 때처럼 나라는 느낌은 없지만, 그래도 그 꿈도 없는 아무 것도 모르는 잠 상태를 보고 있는 "나라는 느낌"이 있다는 것을 깨어나서 무의식 중에 알고 있읍니다.

생시상태와 잠상태 넘어에 "나라는 느낌"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읍니다.

그런데 생시상태와 잠상태 전체가  거울 속의 반사그림자를 보듯이 대상화 되어 있읍니다.

따라서 생시상태와 잠상태에서 느끼는 "나라는 느낌"은 나의 원본(原本)이 아니라, 대상화 된 반사그림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반사 그림자의 원본인 '보는 자'는 어디있는가?

바로 앞에 드러난 모든 현상을 보고 아는 '그것'은 보이지도 않고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있다'는 느낌은 명확하게 알 수가 있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있다"라고 부르고 있읍니다. 

바로 구도자가 처음으로 입문해야 하는 곳이 이 "내가 있다"는 현상계의 주시자입니다. 

일반사람들은 육체 감각으로 나타난 대상화된 느낌을 "나라는 생각"으로 알고 있지만, 구도자는 그 대상화된 현상을 전체적으로 주시하는 "내가 있다"는 느낌을 바로 "나"라고 확신하면서, 그 자리에서 다시 그것이 나온 근원을 찾아 들어 갑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구도자들은 여전히 육체 동일시된 "나라는 느낌"의 대상에 머물러서 "나"를 찾고 있읍니다.

다시 말하자면, 일반인은 대상화 된 "나"인 육체동일시의 개인을 나라고 부르지만, 구도자는 자기 몸과 마음을 비롯해서 그 모든 현상을 말없이 지켜보는 그 알수없고 모양없는 주시자(주체)를 "나"라고 부릅니다.

진짜 "나라는 느낌"은 그 드러난 느낌이 아니라, 그 이전에 있는 '보는 자'가 바로 원래 "나라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앎 표면에 알려지는 것은 아니죠.

그러면 이 "내가 있다"는 주시자 느낌은 어떻게 아는냐?

그것을 알기 위하여는 아무 방편도 필요없고, 일상 삶 속에서 먹고 마시고 걷고 잠자고 하는 그 평범한 삶 속에서 자각하고만 있으면 그 자체가 바로 그대로 주시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볼려고 하면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양도 없고 속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일상적인 관점을 항상 "나는 모든 것을 보는 자이다"라는 관점에 서서, 그 보는 자에 대하여 어떤 관념이나 상상도 하지 말고,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비롯해서 지금 여기서 모든 현상을 말없이 지켜 보는 자가 바로 "나"라는, 마음자세만 명확하게 깨어서 계속 견지해주기만 하면 저절로 모든 것을 보는 자가 되는 것이죠.

먹고 마시고 자고 싸는 그 몸뚱이와 온갖 감정과 희로애락에 이끌려 다니면서도, 동시에 깨어서 자각하거나, 그것들을 대상으로 말없이 지켜보는 보는 자 입장을 항상 견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 것도 건드리지 않고 서서히 보는 자 입장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보는 자(내가 있다)자체는 실체를 찾을 수 없읍니다.

다만 최종 절대바탕으로 가는 과정에서 중간 목표로 정했을 뿐입니다.

이원화 대상으로써 있을 때는 분명히 내가 있다는 주시자가 있어서, 그것을 향해서 추구를 하였읍니다만, 막상 그것에 접근해서 그것이 되는가 하면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읍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있다"는 주시자 자체가  완전히 사라질 때에, 바로 무아(無我)상태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구도자들은 개인과 "내가 있다"는 주시자 사이에서 항상 헤메고 있을 뿐이죠. 

이원화 대상이 있는 한에는 이 "내가 있다"는 주시자는 항상 남아 있읍니다.

"내가 있다"는 주시자가 없었질 때에는 대체로 그것이 비이원적인 바탕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위 금강경 본문에서 말하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모두 이 "내가 있다"는 우주적 존재의식 안에 있는  "나라는 느낌"의 여러가지 형태를 분별하여 이름을 붙힌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들어가서, 

그뿐 아니라, 진리에 대한 생각도 없다(無法相)는 것입니다.

여기서 법상(法相)이란 진리, 즉 절대진아는 어떠어떠한 것이다,하는 관념을 말합니다. 즉 진리는 "공(空)"이다. 또는 진리는 무아(無我)이다. 절대진아는 아무 것도 아니며, 모든 것이다. 절대바탕은 움직임이 없다,등등, 진리나 깨달음에 관해서 경전이나 스승들에게 얻어들은 여러가지 지식과 개념들, 이러한 관념들이 없는 것을 무법상(無法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대개는 구도자들이 이러한 법상(法相)에 집착하는 구도자들이 많읍니다.

무법상(無法相)이란 절대진아에 대한 어떤 관념이나 비젼 뿐만 아니라, 경전의 가르침, 스승의 가르침, 지혜,선정,깨달음 이러한 일체의 관념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리라는 것입니다. 진리나 스승의 가르침도 놓아 버려야지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이지, 만일 그런 관념에 집착하여 붙잡고 있으면 그것은 진리(법)가 아니라 집착일 뿐입니다.

깨달음도 공부할 때에 목표로 삼는 것이지, 그것을 이루고 나면 모든 것을 다 버리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이러한 법상을 버리면, 그 법상이 없다는 것에 또 집착할 것이 아니냐, 즉 공(空)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냐, 그래서 그 법상이 없다는 것도 또한 생각의 일종이므로 그것마저 버려야 한다는 것이 무비법상(無非法相)이라고 합니다.

즉 법에 대한 관념도 버리고, 법이 아니라는 생각도 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될 것은 법상(法相)이 공(空)이라고 생각한다면, 비법상(非法相)은 "공이 아니다"라고 생각을 할 수가 있고, 이것은 다시 말하면 "유(有)"라고 유추할 수가 있는데, 이렇게 생각에 생각을 붙이면 끝이 없이 돌아갑니다.

그래서 아예 상(相)도 없어야 하고, 상(相)이 없음도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법상이 없다'는 생각도 한쪽면이고, '법상이 있다'라는 생각도 또 다른 생각의 한쪽 면이므로, 마치 동전이 앞과 뒤면이 함께 붙어있는 것처럼, 생각에도 '있다'와 '없다'가 같이 붙어 다니므로 이 양면 생각이 둘다 없어져야 여래를 볼 수 있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죠. 이 법상 과 비법상을 모두 부정하게 되면 오직 생각할 수 없고 모르는 것만 남게 되는 것이죠.

 

위에서 여래를 증득해서 무한량의 복덕을 얻은 사람은, "나라는 생각" "사람이라는 생각",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생각", "영원히 사는 영혼이 있다는 생각" 그리고 "진리가 어떤 것이라고 하는 생각" "진리는 어떤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러한 모든 생각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여래의 무한한 복덕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卽爲着我 人衆生 壽者

하이고 시제중생 약심취상 즉위착아 인중생 수자

若取法相 卽着我 人衆生 壽者

약취법상 즉착아 인중생 수자

何以故? 若取非法相 卽着我人 衆生 壽者

하이고? 약취비법상 즉착아인 중생 수자

무슨 까닭이겠는가? 이 모든 중생이 만약 마음에 상을 취한다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할 것이며,

만약 법상을 갖는다면 아,인,중생,수자에 집착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만약 비법상을 갖는다면 아,인,중생,수자에 집착할 것이기 때문이다.]

구도자가 이원적인 대상에 이끌린다면, 당연히 그것을 취하는 '나라는 주체'가 생겨나서 아상,인상,중생상에 집착한다는 것이죠.

일단 아상이 생기면 인상,중생상,수자상은 자연히 동시에 딸려 나오게 됩니다.

반면에 이원적인 대상에 이끌리지 않으면, 그는 "나라는 생각"이 없이 대상이 없는 무아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법상(法相)이란 것은 진리에 대한 이원적인 관념이므로, 이것도 이원적인 아상(我相) 입장에서 진리를 관념으로 생각하는 것이므로, 자연히 아상을 따라서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밖의 어떤 현상이든, 내면의 관념이든 이원적인 대상의 상(相)이므로, 이 이원적인 상을 취하는 주체는 아상(我相)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아상을 따라서 인상,중생상,수자상은 저절로 따라 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는 주체와 보는 대상은 항상 함께 생기고 멸하는 것입니다.

대상이 생기면 당연히 주체가 있는 것이고, 보는 주체가 있으면 상대적으로 보여지는 대상이 생겨나므로, 주체가 상(相)이면 대상도 상(相)이고, 대상이 상(相)이면 주체도 이원적인 상(相)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또한 보는 자가 사라지면 대상도 사라지고, 대상이 없으면 보는 자도 없는 것이죠.

 

그런데 법에 대한 어떤 관념이나 이미지를 가져도 "나라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지만, 법에 대한 관념이 없어도 역시 "없다"라는 관념 자체가 상(相)이므로 결국 나라는 아상(我相)이 생겨나는 것이죠.

예를 들면 절대진아는 공(空)이라고 하는 것이 법상(法相)이라면,

비법상(非法相)이란  절대진아는 "공도 아니다"라는 부정관념인데, 이것도 하나의 이원적 생각이기 때문에 아상(我相,나라는 생각)의 대상적인 관념(相)입니다.

결국 "공이 아니다"하는 부정관념도 이원적인 생각의 범위 안에 있는 것이므로 여기에는 주체가 이원적 아상이 붙고, 또한 인상,중생상,수자상도 자연히 따라 붙을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없다'와 '있다'는 결국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입니다.

어떤 생각이라도 있으면 생각하는 주체가 있기 마련이고, 따라서 그 상태는 이원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만일 깨달음이란 몰록 비이원화 상태가 되는 것인데, 어떤 강렬한 빛의 체험이나 공의 체험을 기억해서 그것이 깨달음의 증거라고 이야기 한다면, 이것은 체험하는 자와 체험대상이 남아 있어서 이원적인 체험을 기억하고 있으므로, 체험자인 아상(我相)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이며, 엄격히 말해서 비이원적인 깨달음의 체험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다시 말하면 현상을 주시하는 '내가 있다'는 주시자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이죠. 

비이원적인 깨달음은 이 말없이 지켜보는 주시자 자체가 사라져야, 모든 것이 절대바탕 속으로 가라앉읍니다. 남는 것이 하나도 없죠. 

그래서 세기적으로 유명한 성인들도 중간 과정에서 작은 체험들은 이야기를 하다가 최종 단계에 대한 체험에 대해서는 거의가 입을 꼭 다물고 침묵을 지키거나 아무런 체험도 없다고 말해버립니다.

이 상태를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즘 대부분의 깨달았다는 사람들은 중간 과정에서 어쩌다 이원적으로 특이하게 체험한 내용을 자기 체험의 증거물로 사람들에게 성급하게 공개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 경우는 "나는 무엇인가 체험을 했다"는 이원성의 아상(我相)상태를 보여주는 것이죠. 또한 구도자는 수행 중에 의식상이나 육체상으로 무슨 특이한 체험이 일어나면 이것이 깨달음과 관계가 되는가, 아니면 근기가 높아지는 증표인가,하고 궁금해 하며, 아마도 깨달음에 가까워지는 증표인가 보다,라는 등 상상을 하거나 기대감에 기분이 들뜨지만, 좌우지간 어떤 체험이든 그것은 주객의 이원적인 심리 또는 생기(生氣)활동의 특이흐름현상이므로 기특하게 여길 것은 하나도 없읍니다.

오히려 그런 체험이나 특이능력 현상들이 사라져야 정상적인 과정에 들어가는 것이며, 그런 모든 특이체험이나 초능력 현상같은 것은 수행을 방해하는 병(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수행병에 대해서는 수능엄경에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수행상의 병이 생기는 것은 바로 법상(法相)에 너무 집착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장애 현상입니다.

 

이 문장들에서 반복해서 설명하는 것은 "진리는 공(空)이라고 말하는 것도 틀렸고,

공이 아니다 또는 유(有)다, 하는 말도 옳지 않으며, 공도 아니고 유도 아니다(非空非有)하는 것도 옳지 않고, 바로 공이면서 유다(卽空卽有)도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이것이 능단(能斷) 금강경의 깊은 가르침이므로, 무엇으로 어떻게 짤라 버려야 하는가?

바로 이와같이 짤라 버려야 합니다. 어떻케?

바로 <그와같이~>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이시의고 여래상설 여등비구 지아설법 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황비법

이런 뜻에서 여래는 항상 말한다. '그대들 비구는 내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다는 것을 알라.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야?" ]

위의 여러 문장에서 보여준 이유 때문에 부처님은 자기가 설법하는 것도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므로, 그 방편을 이용해서 이 이원화 관념의 세계를 넘어 갔으면, 부처님의 설법과 경전도 과감히 버려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만일 깨달았다면 부처님의 설법 뿐이겠읍니까, 깨달음 자체도 놓아 버리고, 자기의 귀중한 스승의 가르침도 집착할 필요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지요.

자기가 소속된 종교나 조직에 대한 집착도 다 버리고, 그외 사회적 명예나 학식, 지위, 권위의식 같은 것도 다 놓아 버리게 되어야 하겠지요.

 

이 문단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 원본 해석이나 티벳트 서장본 해석 내용에 있어서 구라마즙본과의 차이점은 내용상 크게 차이나는 부분이 별로 없어서 인용을 생략했읍니다. 

이렇게 해서 금강경 제 6분의 "바른 믿음은 드믈다"에 대한 이야기를 이만 마치겠읍니다.

                                                                    -무한진인-